제 38화 : 끝까지 바라본 주먹에는 쓰러지지 않는다.
사진 속에는 이번 PRIDE-K의 스폰십을 맺은 중요 관계자들이 담겨있었다.
심지어 자신까지 찍혔다.
한참을 살피던 채호는 다시 한 번 빠르게 훑고 나서 어금니를 물었다.
요즘 주위가 어수선하다는 걸 간파하고 있었다.
뭔가 불편한 기류가 거미줄처럼 흘러다녀 불편했는데 이것이었던 모양이다.
누군가가 자신의 뒤를 캐고 있다.
그것도 아주 노골적이고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자네도 현역에서 손 뗀지 꽤 오래됐나 보이. 이런 것도 눈치 못채고.”
채호의 표정이 더욱 우그러진다.
쥐고 있던 카메라를 흔들며 황석희에게 물어보았다.
“이건 어떻게 구한 겁니까?”
“아까 서울로 올라오던 중 저희 직원이 미행을 눈치 챘습니다.”
처음 수미의 차를 운전하던 사내가 손을 들고 앞으로 나왔다.
“따라온 건 오전부터 따라다녔는데 확신이 없어 보고는 드리지 않았습니다. 서울에서 벗어나 인적이 뜸한 고속도로까지 발견이 되어 바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진 속에는 이번 PRIDE-K의 관련된 중요 인사들이 사진속에 담겨있었다.
스폰서쉽 뿐만이 아니라 필린의 간부들까지.
이것만 보더라도 사내들의 미행의 목적이 보였다.
일이 커지기 전 상대의 수를 예측하여 미리 정리해야 한다.
“실마리는 잡혔습니까?”
“저 차가 그놈들이 타고 온 차인데 정리하던 중 발견했습니다.”
황석희는 잠시 채호에게 카메라를 건네주어 조금 전 세 명의 사내들이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이겁니다.”
사진속에는 두 명의 사내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그 사진을 본 채호는 더욱 속이 끓어올랐다.
마치 자신을 조롱하는듯한 모습의 두 사람이다.
30대 초반쯤으로 보인다.
“세 놈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네. 한 놈은 사진에 찍히지 않았습니다.”
어찌보면 바다에서 모래알 찾는 것보다 더 힘든 일 일수도 있다.
잠시 생각을 하는 듯한 얼굴의 채호.
품 안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불을 붙이고는 잠시 주위를 둘러본다.
사적인 원한 관계를 뒤지는 것은 삼류다.
그들에게 돈이 될 만한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 돈을 거슬러 따라가다 보면 보통 문제는 거기 있기 마련이다.
채호는 머릿속을 정리하려는 듯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주위를 둘러본다.
계산이 서지 않았을 때 보이는 행동의 하나다.
쭈욱!
담배를 필터까지 빨아 제친 채호는 퉤하며 땅바닥에 버렸고 발로 비볐다.
PRIDE-K.
수미의 신뢰와 채호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다.
처음으로 수미는 자신의 후배들에게도 소개시켜주지 않은 재계의 인사들을 연결 시켜주었다.
그렇다면 채호는 보여주어야 한다.
그들이 원하는 건 격투기 산업의 부흥 따위가 아니다.
단 하나.
기업의 홍보.
이 일을 잘 해낸다면 해외에서도 먹힐 자본력과 국내에서의 탄탄한 기업적 입지를 가지게 된다.
하지만 누군가가 나타나 자신이 차려놓은 밥상을 맛도 보기 전 걷어 차려한다는 사실이 기가 막혔다.
뚝!
주위를 둘러보던 채호의 고개가 멈췄다.
계산이 나온 모양이다.
채호는 황석희에게 조용히 다가가 귓속말을 하였다.
마음만 같으면 직접 찾아내 작살을 내주고 싶지만 상황이 여의치가 않다.
이제 자신은 용병이 아닌 한 기업의 오너이니.
두 사람은 한참을 심각한 표정이었고 이내 황석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어르신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황석희는 아직도 하늘의 별을 살피는 수미를 향해 인사를 올리고 부하들과 함께 타고 온 차로 뛰어갔다.
부우웅!
차량들이 일제히 시동을 걸더니 문평동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채호는 수미의 옆에 다가섰다.
“짚이시는 곳 있으십니까?”
“이 손에 몇 명의 피를 묻혔을 것 같나.”
무덤덤하게 말하는 수미였다.
평생을 남을 짓밟고 일어서 지금의 위치에 도달한 수미다.
과거 현성회 시절에 악연까지 포함한다면 오히려 용의선상에 넣어야 할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진다.
더군다나 은퇴를 선언한 그녀.
수미에게 복수를 꿈꾸는 사람들에겐 이 순간이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다.
“골치 아플 수도 있겠네요.”
* * *
“아이고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네. 조심히 가세요.”
쾅 소리와 함께 택시의 문이 닫혔다.
웬일인지 준모의 차가 아닌 택시에서 두호가 내렸다.
잠시 그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는 자신의 바로 머리 위에 떠있고 그 옆에 몇 점 떠 있는 구름이 마치 엽서 같다고 느꼈다.
그의 손에는 누구에게 줄 선물인지 금색 보자기가 하나 들려있었다.
두호가 도착한 곳은 과거 자신이 다녔던 구탑고였다.
졸업도 못한 곳이지만 그래도 자신의 학교이니 모교 아니겠나.
마지막 남은 매듭을 풀기 위하여 그는 준 3년 만에 이곳을 찾아온 것이다.
사실 교도소에 복역 중 양성학은 몇 번이나 두호의 면회를 위하여 찾아왔지만, 번번히 거절당했었다.
두호의 마음은 절망속에 빠져있었다.
그의 얼굴을 보면 더욱 무너질 것 같아서.
다시 또 복싱을 하고 싶어질까봐.
그렇게 두호는 귀를 막고 애써 그를 외면했었다.
과거 두호의 유일한 동반자이자 하나뿐이었던 스승.
배고프다 하면 자신의 얇은 주머니를 털어서라도 배를 불려주던 사람.
복서의 긍지는 주먹이 아니라 쓰러지더라도 다시 일어나는 다리에서 나온다고 말해준 그.
자신을 대신해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싸워주었던 그에게 말도 없이 새 출발을 한다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 생각했다.
3년 만에 돌아온 구탑고는 변한 것이 없었다.
큰 정문으로 들어온 순간 점심시간인지 많은 학생들이 운동장에 나와 있었다.
남녀 공학인 구탑고는 마치 대학교 캠퍼스 같았다.
신난 아기새처럼 듣기 좋게 시끄러운 운동장을 한 발씩 걸어갔다.
한 발 자국을 걸으니 필름처럼 두호의 학교생활이 보였다.
다시 내민 한 발에는 땀 흘리며 훈련하던 권투부가 그려졌다.
그리고 이어진 한 발자국에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던 양성학이 보인다.
다음 한 발을 때려 하던 두호는 잠시 멈춰 섰다.
생각에 잠긴 듯 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두호였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쭉 들어가다 보니 학생들이 사용하는 강당과 권투부가 사용하던 작은 체육관이 보였다.
그 체육관 입구를 멀리서 바라보았다.
수 없이 드나들며 많은 시간을 보냈던 체육관.
하지만 오늘따라 저 문이 너무나 작아보였다.
마치 자신을 거부하는 듯.
이제 이곳에 네가 있을 곳은 없다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한숨을 푹 내쉬며 체육관을 향해 무거운 걸음을 옮기는 그 순간 누군가가 자신을 불렀다.
“두호야?”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본 두호의 눈에 익숙한 얼굴이 담겼다.
양성학은 눈이 휘둥그레져 들고 오던 페트병 물을 쾅 소리가 나게 떨어트렸다.
“두호 맞니?”
두호의 진정되었던 마음이 다시 들끓었다.
그리 긴 시간이 흐른 건 아니었지만 그의 얼굴은 세월이 유독 묻어나는 것 같다.
두호는 들고 온 금보자기를 자신의 옆에다 내려놓고 손을 모았다.
“잘 지내셨습니까?”
짧은 인사말과 함께 고개를 깊게 숙인 두호였다.
양성학은 손을 떨었고 눈가에 작은 눈물이 보였다.
뛰어난 재능이 있었지만, 환경이 바쳐주질 못했다.
의지가 훌륭했어도 세상은 매몰차게 저 아이를 외면해버렸다.
떨어트린 물병을 주울 생각도 없이 성큼성큼 두호에게 걸어갔다.
복잡한 마음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던 두호를 그저 따듯하게 안아주었다.
“고생했다 이 놈아. 정말 큰 고생 했어.”
두호를 놓고는 몸 상태를 확인했다.
예전보다 더욱 좋아진 몸에 그는 안도감을 느꼈다.
혹시나 폐인처럼 살다 몸이라도 상하면 어쩌지라는 걱정을 한 그였었다.
“좋아졌구나!”
두호는 말없이 웃어 보였다.
양성학은 이럴 것이 아니라는 듯 떨어진 물병을 얼른 줍고는 두호를 체육관으로 데리고 갔다.
“자자. 이럴 게 아니라 얼른 들어가자. 오랜만에 만난 제자를 이렇게 세워둘 수 없지!”
조금 전 그렇게 자신을 거부하는 듯 보였던 문은 이제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어서 오라고.
네가 오기를 기다렸다고.
두호는 말없이 체육관 내부 한쪽 벽면에 진열되어있는 사진들과 트로피를 보았다.
구탑고는 권투 명문이라고 부르기엔 부족하지만 그래도 졸업생들 중 한국 챔피언 한 명을 배출한 경력이 있는 학교였다.
벨트를 든 사람은 있었지만, 메달과는 연이 없던 구탑고.
과거 두호의 등장으로 처음 메달리스트를 배출할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던 구탑고였다.
하지만 그 큰 기대를 한 몸에 받던 두호는 메달리스트가 아닌 범죄자가 되었다.
빼곡히 진열된 트로피들과 함께 옆에는 우승자들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선배들의 발자취와 사진 속 밝은 모습들을 두호는 그저 말없이 훑어보고 있었다.
한 발씩 옆으로 이동하던 중 그는 멈칫했다.
두호의 시선이 멈춘 곳에는 자신이 받은 아시안게임 선발전 준우승 상패가 놓여있었다.
시상식을 참석하지 않고 자리를 무단으로 이탈하였으니 그날의 사진은 있을 리가 만무했다.
대신 과거 양성학과 훈련 중 촬영한 사진이 하나 붙어 있었다.
한 교사는 양성학에게 말했다.
- 이봐 양 감독. 범죄자 자식이 뭐가 그렇게 자랑스러워 사진까지 걸어놓나. 그냥 비워두지 그래? 보기도 안좋구만.
하지만 양성학은 두호의 일을 감추지 않았다.
결과는 안좋았지만 두호의 순수한 마음과 땀을 자신만이라도 기억하겠다는 듯이 말이다.
사진 속 두호는 쑥스러운 듯 고개 숙여 웃고 있었지만, 어깨동무를 한 양성학은 아주 밝게 웃고 있었다.
“오랜만에 네가 왔는데 대접할 게 별것 없네. 미안하구나.”
양성학은 체육관의 주방으로 사용되는 창고 방에서 나왔다.
열심히 뒤져보았지만 내놓을 것이 마땅치가 않는 듯 어색하게 웃는다.
두호는 양석학의 손에 들린 물병을 잡았다.
“괜찮습니다. 이거면 충분합니다. 물맛 좋네요.”
양성학은 천천히 두호의 옆으로 걸어왔다.
두호가 보고 있던 사진과 상패를 그 역시 바라보았다.
갑자기 붙어있던 사진을 툭 하고 뽑아 건넸다.
“가져가라.”
두호는 손사래를 치며 거절의 의사를 내비쳤지만 양성학은 기분 좋게 웃으며 끝내 두호의 손에 사진을 쥐여주었다.
“혹시나 다시는 못 볼까 봐 걸어놓은 거다. 그런데 이렇게라도 봤으니 됐다. 너도 너 추억할 사진 하나는 있어야 할 것 아니냐.”
배려심 깊은 그의 말을 듣고는 복잡한 표정으로 사진을 바라보았다.
두호의 몸에 들어온 이후 이렇게 웃고 있는 두호의 사진은 처음 본 것 같았다.
‘이 아이도 이렇게 밝게 웃을 수 있었구나.’
두호는 사진을 조심히 상의 안 주머니에 넣었다.
“감사합니다.”
양성학은 손뼉을 비비며 두호를 자리로 안내했다.
“자 이럴 게 아니라. 앉아서 얘기하자. 점심은 먹었니?”
“네.”
양성학은 딱히 감독실이나 개인적인 공간을 만들어 놓지 않았다.
그저 체육관 한켠에 있는 책상에 앉아 업무를 보곤 했었다.
책상에 있던 신문지들을 팔로 대충 밀고 두 사람은 자리에 앉았다.
두호에게 궁금한 것이 많았는지 양성학은 의자를 바짝 당겨 앉았다.
“그래. 언제 나왔니? 말해줬으면 내가 마중이라도 나갔을 텐데.”
“아니에요 바쁘셨을텐데요. 저는 올 초에 나왔습니다.”
양성학은 두호의 현재를 확인하려는 듯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그 마음이 고마웠던 두호 역시 숨김없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러던 중 두호가 입고 있던 외투의 손목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양성학은 잠시 말을 멈추고 두호의 손목 쪽에 외투를 확 걷어내었다.
애써 가리고 있던 손목의 자상이 드러났다.
양성학은 고개를 밖으로 돌려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