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7화 : 끝까지 바라본 주먹에는 쓰러지지 않는다.
늦은 저녁 서울로 도착한 수미의 일행은 문평동에 도착했다.
서울의 얼마 남지 않는 빈민촌 중 하나다.
동네를 쭉 가로지르는 기찻길이 유명한 동네이다.
시끄러운 소음과 좋지 않은 치안으로 땅 값은 끝을 모르고 떨어졌고 결국 재개발로 인하여 사람 하나 살지 않게 된 폐촌.
낮시간엔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유명하지만 해가 지면 갈 곳이 없는 노숙자들이 자리를 차지하는 곳이다.
개 짖는 소리까지 잦아든 깊은 밤 라이트를 켠 차량들이 나타났다.
차량은 모두 석 대였는데 짓다만 건물 앞에서 천천히 멈춰섰다.
시멘트 포대가 뒹굴고 빗물에 낮아진 모래 더미로 잡초가 무성한 것이 공사가 중단된지 꽤 오래되어 보였다.
벌컥!
멈춰선 석 대의 차중 가운에 차량 문만 열리고 황석희가 내린다.
뒷문이 동시에 열리고 수미가 내렸는데 어둠에 덮인 주위를 스윽 한 번 훑었다.
“들어가시죠!”
황석희가 앞장을 섰다.
두 사람을 내려준 석 대의 차량은 그대로 출발해 사라졌다.
승용차들이 떠나고 이삼 분 정도 지났을쯤 봉고차 한 대가 같은 자리에 멈춰섰다.
봉고차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내렸다.
“늙은년이 이 시간에 여길 왜 온 거지?”
“뭐 낸들 아냐. 여기 재개발 관련해서 온거겠지 뭐.”
운동복 차림에 두 사람은 모두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검은색 마스크를 했다.
“어후야. 하루종일 운전만 했더니 허리 아파 죽겠다.”
운전석 문이 느릿하게 열리며 또 한 명의 사내가 내렸는데 일행과 같은 복장이었는데 두 손으로 허리를 받쳤다.
“고생했다 새끼야. 담배 하나 필래?”
“어 줘봐.”
일행이 불까지 붙여 건네준 담배를 입에 물고 운전석에서 내린 사내는 건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른 사내 한 명은 차 안에서 카메라를 꺼내 건물을 배경으로 사진을 몇 방 찍더니 다시 차 안으로 던져넣었다.
“야. 이 건물로 들어간거 맞냐?”
“맞어. 아까 보니까 남자 한 명이랑 들어가던데?”
사내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야. 모여봐.”
“왜?”
두 사내는 피우던 담배를 발로 비벼 끄며 다가왔다.
운전석 사내가 일행중 한 명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이 짓 하는 이유가 결국 회장님 복수 아냐?”
“그렇지?”
그는 담배를 깊게 빨고 꽁초를 발아래로 툭 던졌다.
“그럼 그냥 미행으로 끝내지 말고 저년 우리끼리 잡을까?”
“야. 조상무님이 미행만 하라고 했잖아.”
어깨를 내어준 사내가 눈을 찌푸렸다.
운전석 사내는 답답하다는 듯 어깨에 있는 손으로 가슴팍을 툭툭 쳤다.
“네가 그러니까 아직도 잔바리인거야. 니가 오야붕이다 치자. 그럼 어딜 청소 해야하는 지를 알려주는 사람이랑 알아서 청소를 해주는 사람이랑 누가 더 고마워?”
“당연히 뒤지.”
“그래. 임마.”
운전석 사내는 팔소매를 걷어올리며 모자를 거꾸로 뒤집어썼다.
“만약 우리끼리 성공하지? 장담하는데 우리 영업장 몇 개는 그냥 꽁으로 받고 남은 인생 사장님 소리 듣는거야 임마.”
그 말을 들은 다른 두 사내 또한 점점 눈에 욕심이 차올랐다.
목을 좌우로 한 바퀴 돌리기도 하고 양팔을 만세 부르듯 들어올렸다 내렸다 하며 몸을 풀기 시작했다.
“연장 없냐? 이럴 땐 연장이 깔끔하긴 한데.”
“야 저기.”
한 사내가 가르킨 곳에는 아직 공사중이라 치우지 않은 쇠파이프나 각목 같은 것이 가득했다.
“이 기특한 새끼. 이걸 발견하다니.”
“야 얼른 준비하자. 부자 될 준비.”
“일단 조져, 나머지는 골로 보내도 상관 없을테고 늙은 년은 목숨만 붙여놓자고 데리고 가야 하니까?”
여자와 사내 한 명 제압하면 부자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밝아진 그들은 기대에 부풀어 올랐다.
꼭 미행만 하라는 조상무의 명령이었지만 도저히 놓칠 수가 없는 기회였다.
하지만 그 순간.
수미와 황석희가 건물 밖으로 걸어나왔다.
“자네들은 누군가?”
여유로운 눈빛으로 사내들을 훑어보는 그녀와 달리 황석희의 눈빛은 새파랗게 타오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튀어나가 찢어 죽일듯한 기세.
“이 새끼들이 감히...”
수미는 황석희에게 진정하라는 듯 손을 뻗었고 나긋한 목소리로 그들을 불렀다.
“나 같은 늙은이한테 뭐 붙어먹을 것 있다고 쫓아다니나.”
사내들은 방금전 희희덕거리는 분위기와 달리 당황했다.
잡은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걸려든 것이다.
그나마 둘 뿐이라는 것이 조금은 안심되었으나 그렇게 마음이 썩 편하지는 않았다.
사내들은 쇠파이프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누가 보냈는지만 말하면 내 해코지는 않겠네.”
사내들의 얼굴은 굳어진다.
이제야말로 부딪히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셋 모두 한쪽으로 시선을 자주 모은다.
황석희였는데 뭔지 모르게 부담스러운 것이다.
다부진 체격에 시퍼런 눈빛으로 자신들을 쏘아본다.
하지만 자신들이 여러 면에서 유리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운전석 사내가 앞장섰다.
스스로에게 투쟁심을 자극하듯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
“쫄리는 놈은 빠져 씨발. 어차피 달라지는 건 없어.”
“누가 안한데?”
“그래. 이리 뒤지나 저리 뒤지나.”
운전석 사내가 수미를 향해 달려들었다.
기다렸다는 듯 황석희가 고무줄을 당긴 듯 앞으로 튀어나갔다.
부우웅!
선두 사내의 쇠파이프를 슬쩍 피하며 운전석 사내의 가슴을 뻥하고 걷어 차버렸다.
사내는 그대로 나동그라진다.
쿠우우!
뒤따라오던 다른 사내가 휘두른 쇠파이프를 이번에도 가볍게 피한 뒤 중심을 잃고 휘청이는 사내의 무릎을 걷어찼다.
붕 떠서 넘어지는 사내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잡아 그대로 바닥으로 내리꽂았다.
이어 마지막으로 달려오는 사내에게 벼락처럼 달려들더니 뒷목을 감싸 안았다.
콰악!
황석희가 달려들자 쾌재를 부르던 사내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황석희는 사내의 뒷 머리를 자신의 손으로 단단히 움켜쥐고는 얼굴에 팔꿈치를 꽂아 넣기 시작했다.
3방이 넘어갈 쯔음 그의 얼굴에는 핏기가 가셨고 5방째에는 눈이 풀리기 시작했다.
퍼덕!
사내는 그대로 주저 앉았다.
황석희는 입고 있던 정장의 단추를 툭툭 풀었다.
“어떻게 죽고 싶지?”
셋 모두 일어나지도 못할 만큼 황석희의 공격은 폭발적이었다.
발버둥 치고 일어나려고 했지만 가슴을 맞은 사내는 숨쉬기가 벅찬 것이 뼈에 문제가 있는 듯 했고, 무릎을 찍힌 사내는 뼈가 부러진 것 같았다.
불현듯 운전석 사내 눈이 번득인다.
도저히 이 상황은 반전될 여지가 없는 것 같았다.
여전히 여유로운 수미의 표정과 자비가 없어보이는 황석희.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자신들이 타고 온 차가 30미터 밖에 있다.
성공은 장담 못하지만 시도는 해볼 필요가 있다.
서로가 눈 신호를 주고 받고는 세 사내는 자신들이 타고 온 봉고차를 향해 가동할 수 있는 모든 신체를 움직여 뛰기 시작했다.
절뚝거리고, 가슴을 감싸 쥐고, 아픈 얼굴을 찡그리며 달린다.
파팟!
그런데 갑자기 왼편에서 자동차 라이트가 보였다.
길게 이어지는 라이트는 다가오는 차량이 모두 석 대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라이트는 금세 가까워졌는데 사내들 눈이 커졌다.
오전부터 수미와 함께 다니던 차량들이었다.
부우웅!
차들의 속도는 멈출 생각이 없는데 빠른 속도로 달려들고 있었다.
그리고는 사내들이 봉고차에 도착할 즘 동시에 들이받았다.
쾅!
굉음과 함께 인도쪽으로 전복된 자신들의 차를 보고는 사내들은 망연자실했다.
승용차의 문이 열리며 사내들이 내린다.
이제야 깨닫는다.
자신들을 직접적으로 끌어내기 위하여 일부러 자리를 비운 것이다.
경계심을 늦추게 하고 확실한 순간에 잡아들이는 사냥.
그렇게 문을 열고 넓게 퍼져 다가오는 수미의 부하들이었다.
“튈 생각 하지마. 버러지 새끼들아.”
“건방진 새끼. 감히 어르신 뒤를 캐?”
수미의 얼굴에 웃음기가 없다.
그건 이번 질문이 대화로서는 마지막이라는 걸 의미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일세. 이 나이 먹고 사람 장사하기는 싫으니까.”
세 사람은 돌처럼 굳어버렸다.
수미의 말마따나 살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아는 모영배도 이 일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일이 잘못된다면 어떤 식으로든 보복을 당한다.
수미를 바라보았다.
‘모영배냐 지금 앞에 있는 수미냐.’
저울질은 쉽게 멈추지 않는 듯 했다.
사내들은 귓속말 이후 침을 꿀꺽 삼키고는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무엇인가 마음의 결심이 선 듯 그들은 눈짓을 주고 받았다.
그 순간 황석희는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곧바로 부하들에게 말했다.
“저 놈들 눈알 굴린다.”
황석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눈알을 굴리던 사내는 자신의 옆에 있던 모래주머니를 황석희의 부하들에게 냅다 뿌렸다.
황석희는 곧바로 자신의 옷으로 수미를 가렸다.
급작스럽게 사내가 뿌린 흙에 부하들은 당황하였는지 잠시 주춤 거렸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그 순간을 틈타 사내들은 아주 낮은 담벼락을 벼락같이 올라가 그대로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부하들 또한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도망간 방향으로 추격을 시작했다.
황석희는 도망가는 사내들에겐 시선도 주지 않았다.
“괜찮으십니까?”
수미는 괜찮다는 듯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부하들이 쫓아간 방향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표정을 숨긴 듯 했지만 수미를 오랫동안 모신 황석희는 알고 있다.
지금 자신의 주인은 굉장히 화난 상태라는 것을.
자신의 옆에 서 있던 부하에게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직원들 전원 소집해. 저 새끼 무조건 잡는다.”
“네.”
부하들은 신속하게 차를 향해 뛰어갔다.
남은 직원들을 모두 태워 출발한 차가 조금씩 멀어졌다.
채호는 카페에서 곧바로 빠져나와 택시를 잡았다.
“기사님. 문평동 부탁합니다.”
밤늦은 시간의 택시는 30분도 채 안되어 수미가 연락한 문평동 근처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고 곧장 택시가 떠나갔다.
수미가 연락한 문평동 근처에 도착하니 이미 렉카들과 공업사 차량들이 가득했다.
가로등 몇 개와 차량의 라이트로 밝혀진 이곳.
차에서 올라오는 연기까지 더해지니 서늘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 문평동의 공기를 더욱 무겁게 만드는 수미의 부하들.
애써 감추는 듯 싶지만 가려지지 않는 살기가 있었다.
주인의 눈 앞에서 사냥감을 놓친 사냥개들의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기며 서늘한 시선으로 채호를 바라본다.
하지만 그 사이를 채호는 아무렇지 않게 쭉 가로질러 갔다.
황석희는 멀리서 다가오는 채호를 발견하였고 정중하게 인사했다.
채호 역시 가벼운 목례를 하고는 시선이 수미에게로 향했다.
“어르신 저 왔습니다.”
수미는 담담한 표정이다.
“이 대표.”
수미가 고갯짓을 하자 황석희가 한 사내로부터 카메라 한 개를 전달받아 가져왔다.
“카메라군요.”
황석희는 직접 보라는 듯 건네주고 핸드폰의 빛을 비춰주었다.
채호는 카메라를 넘겨받아 들어있는 사진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처음 몇 장은 그냥 넘어가는 듯하더니 점점 표정이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