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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신이 케이지 안으로-36화 (36/204)

제 36화 : 끝까지 바라본 주먹에는 쓰러지지 않는다.

두호는 필린 직원의 안내를 받아 회의실이라고 적혀있는 방 안으로 들어섰다.

회의실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사진 촬영과 인터뷰를 할 수 있는 스튜디오로 개조되어 있었다.

많은 카메라들이 한 방향으로 늘어서 있었고 방송국 직원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맞은편에는 조그만한 다이닝 테이블과 큰 소파 의자가 있었고 이번 PRIDE-K에 메인 MC인 이미주가 앉아 있었다.

대본을 확인하며 무엇인가를 메모하던 미주는 방 안으로 들어선 두호를 발견했다.

“네! 이쪽으로 오세요.”

두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천천히 테이블의 맞은편으로 걸어갔다.

자리에 앉음과 동시에 더욱 바빠진 실내 분위기는 두호에겐 매우 낯설고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미주는 두호의 기분을 눈치챘는지 자연스럽게 대화를 유도했다.

“검사 받으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마지막 순번 이셨죠?”

“네.”

“별 이상은 있으셨나요?”

“아니요. 손목 정도만 주의하면 될 것 같다고 했습니다.”

미주는 싱그러운 웃음을 지었다.

“인터뷰는 별거 없어요. 그저 편하게 생각하시는 바를 대답 해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메인 PD인 송대일이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반갑습니다. 저는 이번 PRIDE-K에 메인 PD 송대일입니다.”

두호도 자리에서 살짝 일어나 인사했다.

이 프로그램의 현장 최고 관리자.

방송국 체계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프로그램 책임자라고 하는 걸 보면 제일 높은 사람일 것이다.

“자 그럼. 우리도 슬슬 시작할까요?”

어느 정도 정리가 된 듯 방금 전과는 달리 차분해진 주위를 확인하고는 두호를 향해 돌아보았다.

“두호씨 괜찮겠죠?”

“네.”

대일은 목에 걸고 있던 헤드폰을 다시 귀에 썼다.

“자. 스탠바이 할게요. 오늘 마지막 인터뷰입니다.”

꺼져 있던 카메라에 빨간불이 들어오고 곧 실내는 조용해졌다.

조명 팀이 준비한 조명을 제외하고는 모든 불이 꺼졌다.

대일 또한 메인 카메라의 뒤편에 서서 밝은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자 큐!”

촬영이 시작됨과 동시에 미주는 마지막으로 대본을 확인하는 듯 했다.

예수에게 받은 서류에는 이번 인터뷰의 의미와 용도에 대한 설명도 있었다.

간단한 인터뷰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방송국 입장에선 주인공을 찾는 단계.

이번 대회가 누구를 중심으로 흘러갈 것인지를 정하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간단하게 자기소개 부탁드릴게요.”

미주가 웃는다.

두호는 어떻게 저토록 자연스런 웃음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놀랍기까지 했다.

“올해로 20살인 백두호입니다.”

“네. 반갑습니다, 두호씨. 예선을 통과하신 기분이 어떤가요?”

많은 시선들이 집중되어 있다.

두호는 느릿하게 입을 열어 말했다.

“오랜만에 다시 시작한 운동이라 걱정했지만, 잘 풀린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미주는 인터뷰 대본을 내려놓은 채 즉흥적으로 대화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아나운서 출신인 그녀는 이 인터뷰의 정확한 포인트를 어렵지 않게 잡아갔다.

큰 줄기를 짚고 작은 가지들은 자신이 정리하면 된다.

더욱 많은 이야기를 끌어내는 것이 인터뷰어가 갖춰야 할 능력중 하나다.

“오랜만에 운동을 다시 시작하셨다고 하셨는데. 어떤 운동을 하셨었나요?”

“복싱을 했습니다.”

미주는 자신의 수첩에 천천히 메모를 하며 질문을 던졌다.

“얼마나 운동을 하셨는지가 궁금해요. 선수 출신이신가요?”

두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방송국 입장에서는 굉장히 곤란할 만큼의 단답이지만 미주는 눈치 빠르게 질문을 약간 선회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대회 입상이나 경력 같은 걸 설명 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중학생때부터 시작을 했었구요. 아시안게임 국가대표 선발전에 출전한 적이 있습니다.”

바쁘게 손을 움직이는 미주의 눈이 번뜩였다.

사연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있지만 말을 하지 않는 듯한 느낌.

다년간에 인터뷰어로서의 경험이 말해주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정말 대단하네요. 혹시 어떤 결과를 남기셨을까요?”

“준우승 했었습니다.”

촬영장 안의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다른 엘리트 스포츠 출신들과 비교하여 경력이 굉장히 짧은데도 놀라운 성적이다.

두호의 재능이 분명하게 엿보이는 대답이었다.

“우와 정말 대단하신 분이 참가를 해주셨네요. 장래가 촉망받는 복서이셨는데, 그럼 어쩌다 운동을 그만 두셨는지 여쭤도 괜찮을까요?”

두호는 미주의 질문에 예수가 전해준 정보지를 기억해냈다.

정해준 답변은 없었지만 인터뷰의 가이드라인이 있었다.

하지만 두호는 그 가이드라인이 내키지가 않았다.

자신이 주도해야하는 이 대회에서 평범한 인터뷰로는 주목 받을수가 없었다.

그 순간 두호에게 본능적으로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이슈를 만드는 간단한 방법.

충격과 포장.

자신은 마케팅과 컨셉 따위는 잘 모르지만 채호가 말해준 것이 있다.

형님이 가지고 있는 두호라는 아이의 소재는 누구라도 탐낼 겁니다. 하늘이 준 듯한 소재에요. 그저 전달만 잘 되어도 충분합니다.

사실 지금 진행되는 이 인터뷰는 너무나 상투적이다.

말 주변이 없는 운동선수가 수줍어하는 레퍼토리.

속으로는 웃음 지었지만 두호는 맘을 다잡았다.

‘거 한 번 하지 뭐.’

무덤덤한 표정은 사라지고 어느새 어두운 표정이 두호의 얼굴에 드러났다.

모든 사람들은 두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주 또한 대답이 궁금한지 의자를 조금 땡겨 앉았다.

“저는 범죄자입니다.”

순간 장내에 정적이 흘렀다.

두호는 잠시 그 정적을 내버려 두었다.

미주는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정리하려 하였지만 두호가 먼저 선수 쳤다.

“특수 폭행과 상해로 징역을 받아 소년 교도소에서 2년 2개월 간 복역했고 올해 1월에 출소 했습니다.”

피디는 아예 입을 벌리고 다물 줄을 몰라했다.

‘사연이 있는 줄은 알았지만 범죄자였을 줄이야.’

두호의 충격적인 고백에 당황한 미주는 말을 더듬었다.

“아. 네. 지금 너무 갑작스러워서 현장에 있는 모두가 놀랐는데 조금 더 자세히 말씀 해주실 수 있을까요?”

두호는 무심히 과거 두호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차분한 목소리로 담담하게 자신의 과오를 풀어내자 스텝들은 빠져들었다.

아시안게임에서 억울하게 우승을 놓친 이야기.

시장에서 자신의 부모님을 지키기 위해 불량배들과 싸운 이야기.

교도소에서 다시 세상으로 나오기가 두려워 자살 시도를 했다는 이야기.

그저 묵묵히 자신의 삶을 이야기할 뿐이지만 흡인력은 차원이 달랐다.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다.

“끝까지 바라본 주먹에는 쓰러지지 않는다고 누군가가 저에게 말씀 해주셨습니다. 과거는 과거에 두고 저는 현재를 살 것입니다.”

베테랑 미주도 두호의 이야기에 깊이 빠진 듯 두 눈을 반짝 거렸다.

“복서의 긍지는 주먹이 아닌 다시 일어서는 다리에 있습니다.”

두호는 씹듯 마지막 말을 뱉어냈다.

모두에게 보여 줄 것이다.

쓰러트리기 위한 싸움이 아닌 쓰러져도 계속해서 다시 일어나는 삶을 말이다.

그게 자신이 배운 복서의 정신이고 자세였다.

“아!”

미주는 감탄한 표정이었다.

산전수전 다 겪어 초연해진 느낌과 청춘의 패기가 동시에 느껴진다고 하면 지나친 칭찬일까.

“정말 즐거운 얘기입니다. 두호씨의 도전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저 또한 응원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미주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두호에게 손을 내밀었다.

“좋은 시간이었어요.”

악수를 한 손을 자연스럽게 놓으며 미주는 자신의 품 안에서 조그만 뭔가를 꺼냈다.

“제 명함입니다.”

두호는 명함을 받아 쥐었다.

직원이 두호에게 출구를 가리키면서 일정을 설명했다.

“다음주 월요일부터 배틀먼스를 시작합니다. 자세한 안내는 바깥쪽에서 도와드릴게요.”

두호는 명함을 주머니에 넣고 스튜디오로 꾸며진 사무실을 걸어나갔다.

탁!

미주는 닫힌 문에서 좀체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때 PRIDE-K 메인 PD인 송대일은 미주 옆에 나란히 섰다.

“돈 되는 느낌 오지?”

미주는 팔짱을 끼며 굉장히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음. 그런 일이 있었군요.”

거의 비슷한 시간 채호의 입에서도 두호의 얘기가 흘러나왔다.

채호는 일회용 잔에 담긴 커피를 빨대로 휘저었는데 담배를 한 개비 피우고 다시 들어오는 길이다.

같이 담배를 피우고 자리로 돌아오는 김국장은 채호의 입을 통해 나오는 두호의 얘기에 여러차례 표정이 변했다.

방송계에 몸 담은지 어느덧 25년 차.

오랜 시간은 그에게 여러 가지 경험을 가져다 주었다.

특히 흥행의 감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 감이 자신을 이 자리까지 올려놓은 거니까.

확신이 들었다.

무조건 된다.

기대도 않았던 상상을 초월한 소재였다.

마치 하늘에서 어떤 식으로든 잘되라고 내려보낸 듯 영화 같은 스토리텔링.

이 사람 관련해서 방송 몇 개 뽑아낸다면.

그의 욕심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이 대표님. 말씀하시는 걸 들어 보니 공식적으로 필린이 눈여겨보는 선수라고 봐도 되겠습니까?”

김국장은 자신의 안경을 밀어올리며 슬쩍 채호를 떠보았다.

애초에 우승자는 예정되어 있는 것 아니냐라는 의미기도 했다.

참가자의 개인 신상과 과거까지도 알 정도라면 분명한 관심의 표시.

그런데 만약 그가 아니라고 대답한다면 자신의 방송국으로 미리 채가도 상도의를 어기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부터는 비즈니스 싸움이다.

하지만 채호는 노련하게 답을 피했다.

“뭐...대회 우승은 사연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 말을 들은 김국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여간 능구렁이라니까. 이대표.’

김국장이 건넨 말이 어리석은 질문이 되어버렸다.

우승만 한다면야 없는 스토리텔링도 만들어낼 수 있는 필린이었다.

스토리텔링이든 돈이 되든 일단은 실력이 있는 선수가 먼저라는 것.

너무 당연하다는 듯 말하지만 알아챌 수가 없는 채호의 속내.

대회가 끝나기 전 참가자들에게 자신들이 미리 접촉을 시도하면 상도의를 어기는 것이 된다.

김국장은 채호에 대한 평가를 수정했다.

이런 부하직원은 밑에 두는 것이 아니다.

아랫사람이 상사의 생각보다 더 깊다면, 언젠가 자신을 밀어내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두호의 이야기를 잠시 밀어놓고 방송 편집과 대회 진행 사항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누던 중 채호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한 통 울렸다.

수미였다.

채호는 잠시 김국장에게 양해를 구했다.

“잠시 전화 좀...”

“네네.”

김국장은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손바닥으로 어서 받으라는 시늉을 하였다.

채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전화를 받았다.

“네. 어르신.”

-자네가 붙었다고 한 먼지. 꽤 큰 것 같네.

“네?”

채호는 무슨 일이 생겼음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무슨 일 있나요?”

-전화보단 이리로 오지. 주소 남겨 줄테니.

착 가라앉은 수미의 목소리에 사항이 심상치가 않다는 것을 느낀 채호였다.

지금은 김 국장과의 대화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채호는 전화를 끊고 곧바로 자리로 돌아가 외투와 가방을 챙겼다.

“죄송합니다. 제가 급한 일이 생겨서 곧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김 국장은 어서 가보라는 듯 손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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