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5화 : 끝까지 바라본 주먹에는 쓰러지지 않는다.
협회장의 말을 들은 양성학은 분노로 인해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한평생을 복싱과 함께 살아왔다.
현역 시절 흔하디 흔한 무명 선수였지만 복싱을 정말 사랑하기에 은퇴를 하고서도 지도자의 길을 걸은 것이다.
많은 지도자들이 그렇듯 자신도 어린 선수들에게 스포츠맨쉽을 가르쳐왔다.
스포츠맨쉽이 없다면 우리는 스포츠가 아니라 그냥 싸움일 뿐이라고.
하지만 정작 이 어른들은 스포츠맨쉽이란 게 없었다.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링 안에서 아이같이 눈물을 흘리며 엉엉 소리내 우는 두호의 모습이 보였다.
어찌나 서럽게 우는지 그 모습을 지켜보는 양성학의 마음이 더 아팠다.
17살의 고등학생.
보통 사람은 쓰러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혹독한 훈련을 아무런 불만 없이 버텨내던 두호다.
비가 쏟아지는 날에도 꽤 먼 거리의 집까지 교통비가 아깝다며 후드를 뒤집어쓰고 로드워크를 하던 아이.
끊어진 글러브의 끈을 일일이 테이프로 붙여가며 써가던 아이.
모두가 돌아간 뒤에도 혼자 남아 훈련을 하던 아이.
왜 그렇게까지 열심히 하냐고 자신이 물어보았을 때 두호는 쑥스러운 듯 답했다.
얼른 집을 도와야 한다고.
자신에게는 이 방법밖에 없다고.
그 순수하고 간절한 꿈이 이 욕심 많은 어른들의 농간에 무너져 버렸다.
양성학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저 애가 도대체 무슨 죄가 있다고 이 개새끼들아!”
주먹이 날아갔고 대표의 얼굴에 정확히 꽂혔다.
퍽 소리와 함께 쓰러진 대표의 위로 올라탄 양성학은 연거푸 주먹을 날렸다.
그 모습을 발견한 사람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뜯어말렸다.
사람들의 만류에 그는 끌려나가듯 일으켜 세워졌다.
그의 울분 섞인 외침에 관중들이 숙연해지기 시작했다.
“니들은 뭐 때문에 이 지랄을 한거야. 돈이야? 자리야? 쟤는 지 인생 걸고 여기서 서커스 원숭이처럼 싸운거야. 알아 이 새끼들아?”
관계자는 빨리 손으로 치우라는 듯 직원들을 닦달했다.
하지만 그는 그들을 뿌리치고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이 핏발을 세우며 고래 고래 소리 질렀다.
“근데 우리들이 뭘 가르쳐! 저 애한텐 뭐라고 변명을 해! 이제 저 아이는 무슨 희망으로 살아야 하냐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양성학은 끌려나갔고 두호는 한참을 더 링 위에서 오열했다.
그렇게 상처로만 남은 국가대표 선발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 저녁.
두호는 경찰에 입건되었다.
두호는 상담실을 빠져나왔다.
분명히 직접 겪은 자신의 일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섞인 아주 복잡한 감정이었다.
당혹감, 패배감, 괴리감과 절망감.
트라우마처럼 남은 그날의 순간이 지금 두호의 머릿속을 괴롭히고 있었다.
무척 덤덤한 표정으로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 두호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자신이 직접 해결할 수 없는 일을 해결해줄 아주 믿음직한 사람.
“이모.”
전화를 건 상대는 수미였다.
-죽은 줄 알았다.
말은 섭섭한 듯 하지만 오랜만에 듣는 두호의 목소리라 그런지 굉장히 반가워 하는 눈치였다.
“죄송해요. 제가 조금 바빴습니다.”
-그래. 용건이 뭐야.
두호의 목소리는 순식간에 착 가라앉았다.
“사람 하나 따 줄 수 있어요?”
그러자 수미는 두호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을 눈치챈 듯 덩달아 목소리가 차분해졌다.
따 달라니.
제거인가.
조사인가.
- 뭔 일이냐?
두호는 누군가 자신의 대화를 듣지 않을까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두호는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조금 더 낮추었다.
“걸리는 일이 있습니다. 바쁘지 않으면 알아봐 주시죠.”
“흐흠!”
전화기를 통해 수미의 한숨 소리가 들린다.
수미는 두호를 걱정하는 듯 물어보았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두호에게는 항상 따뜻한 모습을 보이는 그녀였다.
- 뭐 헛짓거리 하는 건 아니지?
“그런거 아니에요, 알아보시다 보면 알게 될 겁니다.”
- 그래. 알겠다. 이름 석 자 적어서 보내라.
대답한 직후 수미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전화가 끊기자 필린의 직원이 다급하게 자신을 찾았다.
“백두호 씨! 백두호 씨 어디계세요!”
두호는 팔을 들어 자신이 여기 있음을 알렸다.
인이어를 쓴 직원은 땀까지 흘리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아마 전화하느라 사라진 자신을 열심히 찾아다녔던 것 같았다.
“한참 찾았어요. 인터뷰 하셔야 하니까 이쪽으로 오실게요.”
“네.”
두호는 잠시 멈춰서 수미에게 마저 메시지를 남겼다.
메시지를 보내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은 그는 무거운 발걸음을 뗐다.
검정색 승용차 3대가 줄지어 이동하고 있었다.
가운데 차 안에는 수미가 타고 있었다.
뒷좌석에서 눈을 실 같이 뜬 수미는 핸드폰을 빤하게 쳐다보았다.
하지만 힘껏 바라보아도 잘 보이지 않는 듯 조수석에 앉아있는 황석희에게 핸드폰을 건넸다.
말하지 않아도 수미가 핸드폰을 건넨 이유를 알아챈 그는 두호의 메시지를 대신 읽어주었다.
“이름 정일준. 2021, 그러니까 약 3년전 아시안게임 국가대표 선발전 우승자랍니다.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찾아뵈서 말씀드리겠다 합니다. 그리고...”
말을 하다 말고 바깥 풍경을 보고 있던 수미가 고개를 돌렸다.
수미는 뒷이야기가 궁금한 듯 황석희를 빤히 쳐다보았다.
황석희는 옅은 미소를 띄우며 작게 웃었다.
“갈 때 뭐 사갈까요? 라는데요.”
수미는 씨익 웃음 지으며 넋두리했다.
가끔이지만 정말 두호가 손주같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
“연락이나 자주 하지.”
그 모습을 본 황석희도 옅은 미소를 띄웠다.
모신지 꽤 되었지만 두호와 엮인 일에서만큼은 평소의 그녀와 다르다.
평소엔 쌀쌀맞은 겨울 같다면 두호 관련된 이야기를 할 때만큼은 따듯한 봄이었다.
수미는 조수석에서 건네는 핸드폰을 받아 자신의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 놈 뒤 좀 캐서 알려줘.”
“네. 어느 정도로 하면 될까요.”
잠시 생각을 하던 수미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싹 다.”
황석희는 수미의 의중을 파악한 듯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어. 내가 문자로 보내주는 놈. 신상 다 따놔. 사는 곳부터 과거 이력까지. 티나면 안된다.”
그렇게 황석희가 바쁘게 업무를 지시하는 동안 수미는 운전석에 앉은 부하가 신경이 쓰였다.
운전석의 부하가 자꾸만 백미러와 사이드미러를 번갈아가며 쳐다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차선을 변경하기 위해 확인하는 것 같았지만, 어딘가 신경쓰이는 구석이 있는 듯했다.
수미는 그 모습을 이상하게 여겨 운전을 하는 부하에게 물었다.
“뭔 일이야.”
“아무래도 자석이 붙은 것 같습니다.”
언제부터인지 누군가가 자신들을 따라오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안이 보이지 않게 검게 썬팅이 된 승합차 한 대가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자신들을 따라 붙고 있었다.
전화를 끊고 황석희는 곧바로 자신의 사이드미러를 확인해 보았지만 그의 위치에서는 그 승합차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수미에게 말했다.
“어쩔까요?”
수미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은퇴를 선언했지만, 사자는 절대 고양이가 되지 않는 법이다.
그녀는 창 밖으로 시선을 떼지 않았고 무덤덤했다.
“일단은 서울까지는 데리고 가지.”
하지만 곧 수미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이렇게 됐으니 얼굴은 봐야겠다.”
“네. 조치하겠습니다.”
황석희는 바로 전화를 걸어 무언가를 지시했다.
늦은 저녁.
PBS 별관 카페에서 채호와 김진석 국장은 마주 앉아 있었다.
첫 미팅 때와는 달리 채호는 넥타이를 푼 채 셔츠만 입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물론 김국장 또한 편한 옷차림이었다.
단지 채호와 차이라면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연신 커피를 홀짝 거린다.
흥행의 기미가 보인다.
아니 이미 흥행이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언론이 이 PRIDE-K를 집중하기 시작했다.
채호는 자신의 가방에서 서류 뭉치를 꺼내 김국장에게 건네주었다.
“이번 예선 테스트 결과입니다. 정확히 100명이에요.”
“네. 수고하셨습니다.”
스테이플러가 아닌 줄 끈으로 엮여져 있는 서류들은 꽤 무게가 나가 보였다.
양손으로 무거운 서류 뭉치를 받은 김국장은 곧바로 눈에 뛰는 사람들이 있는지 서류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사르륵
한 장씩 종이가 넘어간다.
필린은 유망한 격투기 선수를 찾는게 목적이지만 자신은 다르다.
흥행 될 법한 캐릭터.
스타성이 있는 사람을 찾아야 했다.
방송국은 끊임없이 새 얼굴을 찾아야 한다.
실력은 조금 부족하더라도 개성이 좋다면 자신들의 방송국 프로그램에 계속해서 노출시킬 수 있다.
실제로 그렇게 해서 더욱 잘 나가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
그러기 위해서 노선 정리와 입장 정리는 필수다.
“음. 필린이 따로 눈여겨 보고 있는 선수가 있을까요?”
“김 국장이 원하는 사람이라면 8번, 41번 정도 일 겁니다.”
자신과 원석의 기준이 다르다는 것을 이미 알아채고 있는 채호는 김국장의 고려 사항까지 정리한 상태였다.
윈윈을 아는 채호였다.
채호의 말을 들은 김국장은 시원하게 웃었다.
“이거 마음이 읽힌 것 같아. 무섭네요 하하.”
김국장은 속으로 이런 부하직원 한 명만 있다면 참 소원이 없겠다 생각했다.
김국장은 8번째와 41번째 순번의 사내들의 서류를 따로 빼놓았다.
신청서에 붙은 사진만 보더라도 외모는 굉장히 준수했다.
각각의 나이는 27살과 33살.
현재 두 사람은 각각 주유소 직원과 체육관 코치로 일하고 있었다.
김국장은 이 두 사람이 상당히 마음에 들어하는 눈치였다.
“인터뷰 하는걸 보니 입담도 꽤 있는 것 같더라구요. 다른 50명도 지켜보는 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그럼 필린측은 따로 있을까요?”
채호는 참가 신청서류 두 장을 가르켰다.
“21번, 50번.”
김국장은 안경을 끼며 서류를 찬찬히 읽어보았다.
“21번 친구는 인터뷰 마친 상태입니다. 얘기를 간략하게 추려보자면 중국집에서 배달 일을 하는 친구인데 원래 가라테 국가대표였다고 하더라구요?”
김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석에 가까운 방송소재.
이런 대회나 오디션 프로그램은 실력자를 찾는 프로그램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실력있는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그 실력이 더욱 빛나 보이는 사연이 있는 사람을 대중들은 응원하고 사랑한다.
그리고 그 사랑은 방송국에게 돈이 된다.
“음. 좋네요. 이런 친구들이 장사가 잘되죠. 50번 친구는 아직 인터뷰 진행중이라구요?”
“네. 하지만 이 친구는 제가 좀 알죠.”
김진석은 50번째 참가자의 서류를 뽑아 들었고 서류 맨 위에 올려놓았다.
정리되지 않은 턱을 쓰다듬으며 김진석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백두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