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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신이 케이지 안으로-34화 (34/204)

제 34화 : 끝까지 바라본 주먹에는 쓰러지지 않는다.

그녀는 천천히 걸어나왔다.

이번 PRIDE-K에서 메디컬 팀의 팀장을 맡게 된 도민영이었다.

흰 가운에 검정 슬랙스를 입고 나온 민영이 채호의 옆에 나란히 섰다.

도민영의 등장에 참가자들은 모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

예수가 이국적인 미인의 상이라면 민영은 가냘픈 동양적 미모를 갖고 있었다.

옅은 화장에 긴 생머리와 얇은 입매.

꽃 같다고 느껴지는 그녀의 눈빛은 예수의 눈과는 느낌이 달랐다.

열정과 자신감을 표현한 예수의 눈.

절제와 차분함이 보이는 민영의 눈.

하지만 자신의 커리어를 위해 매 순간 최선을 다한 자만이 보여주는 그 눈빛을 민영 역시 보여주고 있었다.

“모두 반갑습니다. 여러분의 여정과 함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대회 기간동안 부상 없이 잘 준비하실 수 있도록 정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간결하게 참가 소감을 밝힌 민영의 귀가 부끄러운 듯 빨개졌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를 보는 참가자들은 계속해서 싱글벙글한 표정이었다.

채호는 가볍게 민영의 경력을 소개했다.

“부상 방지로 근래의 최고라고 평가받는 닥터입니다. 저희가 어렵게 모셨습니다. 자 그럼 곧바로 검진을 진행해 주시죠.”

직원들은 빠르게 검진 안내 서류를 참가자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다.

주민이 한 발자국 앞으로 걸어나와 크게 말하였다.

“피 검사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CT 촬영이 끝나고 한 명씩 인터뷰를 진행할 겁니다. 중간 중간에 카메라맨분들이 소소한 인터뷰도 진행할 거니까 잘 응해주시길 바랄게요. 자 일단 1번 강형수씨!”

강형수라는 호명에 손을 번쩍 든 사내는 곧바로 피 검사실로 출발했다.

아마도 종이의 적힌 순번과 이름으로 순서를 알 수 있는 듯 싶었다.

두호는 자신의 종이의 적힌 자신의 차례를 확인하였다.

‘50번.’

딱히 지각을 한 것도 아니지만 자신의 순번은 맨 마지막이었다.

아마 자신이 편하게 검진을 받을 수 있도록 필린이 배려한 것이 분명했다.

편하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왕이면 1번으로 해주지. 얼른 하고 가게.’

병원 시설이나 구경할까 싶어 고개를 돌리던 중 직원들 사이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채호와 눈이 마주쳤다.

3개월 만에 보게 되는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손짓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눈빛이면 충분했다.

채호가 두호를 바라보는 시선은 응원이었고, 두호가 채호를 바라보는 눈빛은 부드러움이었다.

그렇게 잠시 두호를 바라보던 채호는 직원들과 함께 천천히 검진실을 떠났다.

두호는 채호가 걸어나간 문을 잠시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잡지가 여러 권 꽂힌 책장을 하나 발견하였다.

슬그머니 걸어가 잡지 한 권을 꺼내든 그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펼쳤다.

차분히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기로 했다.

“50번 백두호님 들어오실게요!”

두호는 쥐고 있던 순번표를 반으로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두호는 자신을 안내하는 직원을 묵묵히 따라 이동했다.

복도의 오른쪽으로 꺾어 진료실로 향하니 한 카메라가 두호와 직원을 곧바로 따라 붙었다.

계속해서 자신을 따라오는 카메라가 여전히 어색하고 불편하지만 애써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신경쓰지 말라는 듯 VJ는 손짓 했지만 그 모습에 더욱 신경이 쓰였다.

검진은 사실 별로 특별할 것이 없었다.

인바디와 피 검사 그리고 뼈 부분의 이상이 없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다수의 촬영이 있었다.

다만 한번 검사를 시작하면 마지막 X-RAY 촬영까지는 막힘없이 진행되는 것이 편하게 느껴졌다.

사소하지만 섬세한 이 동선에 필린의 고민이 느껴졌다.

“잠시 대기 하실게요.”

진료실 문 앞에 서있는 두호는 주머니에 손을 꽂고 흥미로운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올해는 검사 참 많이 받네.’

예전 용병 생활할 때는 큰 부상을 당해야만 병원으로 왔다.

건강검진이라는 말도 어색하다.

용병이 건강검진이라니.

처음 옐로우 맘바에 입사할 때 타 병원에서 의탁받은 검사가 전부이다.

그나마도 병원으로 온 것은 자신의 의지로 온 것이 아닌 동료들의 도움으로 긴급 이송될 때 였다.

그랬던 그가 두호의 몸으로 돌아와서는 정말 자주 검사를 받게 되었다.

두호 옆에 서 있던 직원이 문을 훽 열어주며 두호를 안으로 안내했다.

“들어가실게요! 닥터 자문이 끝나고 인터뷰 하도록 하겠습니다.”

넓은 진료실 안에서 민영이 밝은 웃음으로 자신을 맞았다.

“어서오세요. 백두호님!”

두호는 늘 그렇듯 정중한 인사를 하였다.

“반갑습니다.”

“네. 여기 앉으세요.”

민영은 책상 옆 의자에 두호를 안내하였고 음료수 한 잔을 건넸다.

두호는 고개를 꾸벅하며 음료수를 받았고 그저 들고만 있었다.

민영은 친절한 목소리로 검진 시 촬영했던 부위들을 따져보면서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다.

“음. 일단은 다른 검사상에서는 별다른 이상은 없었어요.”

두호의 CT와 X-RAY 촬영본을 한 장씩 넘기며 천천히 확인했다.

컴퓨터의 촬영본 중 한 군데를 콕하니 짚은 민영은 두호를 바라보았다.

“다만 왼손 손목 부분이 다른 부분보다 인대가 얇고 짧더라구요. 혹시 손목 한번 보여주시겠어요?”

민영의 부탁에 두호는 입고 있던 셔츠의 소매 부분을 조금 걷었다.

소매 부분을 걷으니 예전 두호가 교도소에서 생겼던 깊은 자상 자국이 보여졌다.

“일상 생활에는 불편한 점이...아.”

민영은 상처를 보고는 잠시 말을 잃었다.

어느 부위에 상처인지에 따라 참 다양한 생각이 든다.

하지만 손목 부위에 깊게 새겨진 이 자상만큼 보는 사람의 숨을 잠시 멎게 만드는 건 없을 것이다.

민영은 잠시 말이 없어졌다.

아주 짧고 강렬하게 이 사람의 지난 시간이 잠시 그려졌다.

하지만 두호는 이 상처에 대해서 별로 신경쓰지 않는 듯 민영을 쳐다보았다.

“일상에서 불편한 점은 없습니다.”

민영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 꼼꼼하게 두호의 과거 진료 자료를 찾아보며 질문을 계속해서 던졌다.

두호는 대답은 성실히 하였지만 이 진료시간이 조금은 지루한지 조금씩 다른 곳으로 시선이 향하였다.

마지막 질문이 끝난 후 민영은 두호의 진료 차트를 툭 덮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민영은 말을 망설이는 눈치였고 수줍게 웃고 있었다.

두호는 무슨 일이냐며 고개를 들어 그제서야 민영의 얼굴을 제대로 보게 되었다.

“저 혹시 기억나세요?”

두호는 눈을 찡그렸다.

어디선가 본 듯은 한데. 확실하게 기억이 나질 않는다.

도혁의 몸은 아니었고 두호의 기억이 분명한데 명확하게 떠오르지가 않는다.

기억을 해내지 못하는 것을 눈치챈 민영은 살갑게 웃었다.

“그 예전에 아시안게임 복싱 국가대표 선발전 출전하셨던 분 맞죠? 그때는 학생이었고!”

두호는 멍한 표정으로 그저 고개만 흔들었다.

사실 누구나 이런 때가 제일 곤란하다.

상대는 자신을 정확하게 기억하지만 자신은 기억하지 못할 경우.

“네.”

“그 예전에 제가 거기서 의료팀으로 있었거든요. 준결승전 때 제가 눈 위쪽 봉합해 드렸었는데..”

“아!”

그 순간 기억의 조각들이 맞춰졌다.

준결승전이 끝나고 두호는 눈 위가 찢어져 코치진들과 함께 의료팀을 찾아갔다.

복싱 경기 중 눈이 찢어지는 사고는 일상적이다.

그런데 그날 유독 상처가 심해 곧바로 의료팀을 찾아갔다.

그때 자신을 치료해준 젊은 여의사가 바로 민영이었던 것이다.

“하하. 잘 지내셨나요?”

“네. 두호씨는 못 본새 몸이 더 좋아지신 것 같네요.”

두호는 아무렇지 않은 듯 웃어보였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자신을 기억해준 것은 고맙지만 그 대회는 두호에겐 상처로 남아있을 경기였다.

모든 것이 달라지기 시작한 그 날.

물론 자신이 겪은 일도 아니었고 또 몇 년이 지난 이야기이지만 자신은 그 이야기를 떠올릴 때마다 그날 두호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무의 능력 중 가장 편리하기도 하면서 불편한 점이기도 했다.

“그때 분명히 두호씨가 이긴 경기였는데. 안타까..”

순간 자신이 실언을 함을 느낀 민영은 다급하게 손사레를 치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도 없이...”

“아닙니다. 다 지난일인데요 뭐.”

“다시 도전하시는 모습 보기 좋아요. 이번에는 꼭 좋은 결과 있기를 바래요.”

“감사합니다.”

곧바로 두호의 몸 상태에 대해 조언을 하기 시작했다.

두호는 따로 부상으로 여길만한 문제는 없었지만 손목의 인대 부분의 주의를 요했다.

“네. 그럼 배틀 먼스 시작하실 때 뵙도록 할게요!”

“감사합니다.”

두호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

서류를 세워 책상에 몇 번 내려친 그녀는 무엇인가 생각이 난 듯 두호를 불러세웠다.

“아 맞다. 그 얘기 들으셨나요?”

두호는 문고리를 잡다 말고 뒤를 돌아봐 민영을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요?”

“그 결승전 때 붙으신 그 분. 그 분도 대회 참가했다고 하더라구요.”

순간 두호의 표정은 차가워졌다.

두호의 싸늘한 표정에 민영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여 침을 삼켰다.

분노보단 살기에 가까운 두호의 표정.

“그 새끼가...여기 있다구요?”

민영을 앞에 두고 거침없이 뱉어내는 두호다.

상처가 깊을수록 뇌는 그 사람을 오래 기억한다.

두호에게는 일준이 그런 인물이다.

손목의 흉터만큼이나 잔인하게 새겨진 기억.

심판의 판정 이후 장내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곧이어 관중석에서 관중 하나가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장난하냐? 이게 어떻게 저 새끼 승리야!”

그것을 시작으로 수 많은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너도나도 한 마디씩 쏘아붙였다.

“사기다 사기!”

“위원회측이랑 무슨 사이냐! 돈 처 먹었어?”

흥분한 관중석에서 간간히 물병 같은 것이 링 주위로 날아오기도 했다.

양성학은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 무너진 두호의 모습을 보고는 머리가 하얘졌다.

충격이 심한 듯 망연자실한 표정의 그였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트릴 듯 무릎을 꿇은 채 일어나지 못하는 두호였다.

하지만 양성학은 이내 정신을 차렸다.

선수들에게 늘 말해왔다.

심판에게 직접 항의하지 마라.

항의는 감독과 세컨의 몫이니까.

지금 양성학이 해야 할 일은 하나였다.

선수를 대신하여 불합리와 싸워주는 것.

양성학은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판정단과 협회측을 향해 걸어갔다.

날아오는 물건들로 인하여 이미 아수라장이 된 판정단 석은 정신이 없었다.

양성학은 판정단 석 앞에 똑바로 섰고 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차분했다.

“뭐 때문입니까?”

“양 감독.”

판정단 대표위원은 책상을 빙 돌아서 그에게 걸어갔다.

마치 아이를 달래려는 듯 양성학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자네도 알잖아. 요새 우리나라 선수층이 과거와 달리 점점 얇아지는거.”

양성학은 그 말에 대답도 없이 그를 노려보았다.

대표는 링 안에서 한쪽 구석에 앉아 멍하니 있는 두호를 손으로 가르켰다.

“저 아이 재능? 넘치지. 근데 말이야. 저 일준이라는 아이의 재능도 상당하잖아.”

그 순간 홱하니 날아온 물병을 허리를 숙여 피해낸 대표였다.

신경질이 난 듯 관객석 쪽을 한번 노려보고는 다시 양성학을 바라보았다.

“이번 아시안게임은 일준이 나가고. 다음 아시안게임은 두호가 나가면 되지 않겠어? 어차피 우승은 따논 당상일텐데. 이번 아시안게임에 저 친구 아버님이 참 많은 도움을 주셨거든. 아니면 내가 프로 협회 사람들도 모시고 왔으니 프로로 진출해보는 건 어떤가.”

그 말을 들은 양성학은 멍한 표정으로 링을 돌아보았다.

한 소년이 울고 있었다.

그저 꿈을 향해 열심히 달린 죄 밖에 없던 가난한 소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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