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쟁의 신이 케이지 안으로-33화 (33/204)

제 33화 : 끝까지 바라본 주먹에는 쓰러지지 않는다.

일준이 고개를 들어 확인하니 당구장 친구 동하였다.

조금 전 종로의 삼겹살집에서 두호에게 시비를 건 사내들이었다.

“젠장!”

동하가 다른 잔에 술을 가득 채우더니 단숨에 마셔 버린다.

“일준아. 미안하다.”

그건 지시한 일이 틀어졌음을 직감하기에 충분했다.

“실패했다.”

일준의 이마가 좁혀졌다.

탁!

동하의 손이 품속에 들어가더니 접힌 봉투 한 개를 꺼내 탁자 위에 올린다.

“약속은 약속이고.”

일의 마무리를 전제로 받았으나 실패했으니 돌려주는 것이다.

동하의 표정엔 아쉬움이 가득했다.

딸칵!

일준은 담배 한 개비를 물더니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길게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쪽수가 몇인데 그것 하나 처릴 못하고.”

“건달이었습니다. 족보까지 까면서 들이데는데 도저히...”

동하 뒤로 선 사내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말했다.

“건달? 왜 그 놈이 건달이랑 있어?”

“우리야 모르지...”

일준이 흘긋 담배를 꺼내무는 동하를 바라보았다.

여우는 여우를 알고, 늑대는 늑대를 알아본다.

비록 골목 건달이지만 동하도 보통내기는 아니다.

그런 그가 주먹 한 번 섞지 않고 도망왔다는 건 상대가 보통내기는 아니라는 뜻이다.

하지만 건달이라니.

세월엔 장사 없다고 그놈 또한 변해버린 것인가.

아니면 단순한 우연의 일치인가.

그 어느 쪽이든 좋은 징조는 아니다.

“챙겨 넣어.”

일준이 탁자 위 봉투를 턱으로 가리켰다.

이 정도 돈은 일준에게 필요도 없다.

담배를 깊게 빨아들인 후 팔을 소파 뒤로 걸친채 다리를 꼬았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감은 그는 곧 날카로운 시선으로 동하를 쳐다보았다.

“너 그 약쟁이들 전화번호 알지?”

“약쟁이? 아. 걔네들 알지 그럼.”

일준이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 껐다.

‘판을 좀 더 키워야겠어.’

하지만 동하는 무슨 일로 약쟁이들을 찾는지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내가 내일 물건 전해주면 ...”

일준이 눈을 빛내며 말하기 시작했다.

동하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오랜만에 필린의 간부들과 코치진들이 모여있었다.

모두가 피곤한 듯 어깨를 주무르고 목을 좌우로 꺾는다.

그 중 제일 상석에 앉은 채호의 얼굴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그간에 고생이 보이는 듯 얼굴에 짙게 낀 다크 서클과 조금 헝클어진 머리.

턱에 올라와 있는 푸르스름한 수염은 완벽한 자기관리를 보이는 그의 이미지와는 사뭇 달랐다.

대회를 준비하는 기간부터 단 하루도 맘 편히 쉬는 날 없이 열심히 달려온 그였다.

“그래서. 흠흠”

그는 잠긴 목소리를 풀기 위해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서류를 펼쳐보였다.

“한 번 볼까.”

그러자 주민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양옆으로 서류를 나눠주었다.

회의장 전체에는 서류를 넘기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주민이 레이저 포인터로 한 곳을 가리켰다.

“상위 100명의 기록과 평가가 예상보다 훨씬 뛰어납니다. 이런 사람들이 여태 어디 숨어 있었는지 오히려 신기할 정도 였습니다.”

채수와 탁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숨은 고수는 이런데 쓰는 표현이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탐 나는 인재들이 많았다.

특히 몇 명은 프로에 바로 데뷔를 시켜도 상위 랭커는 거뜬히 들어갈 실력자였다.

채호는 주민의 말에 동요하지 않고 묵묵히 자료를 살피고 있었다.

“그 중 눈에 띄는 사람은?”

“20명 정도 있습니다. 서류 마지막에 다 모아놨으니 살펴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채호는 곧바로 서류를 크게 넘겨 기대 인원들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중요한 건 최종 16명에 뽑힐만한 인물들이다.

만년필을 안주머니에서 꺼낸 그는 참가자들의 명단을 확인하고는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커리어부터가 남다른 그들.

가라테 국가대표, 레슬링 상비군, 또한 현역 프로 복싱선수와 아시안게임 유도 메달리스트까지.

또 대한민국에 몇 없는 블랙벨트의 자격을 가진 유명 주짓떼도 있었다.

경력과 수상기록은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로 인정받는 재목들이었다.

그렇게 종이를 넘기다 보니 두호와 태건의 자료가 올라왔다.

두호의 경력 칸은 한 줄로 끝나 있었다.

-아시안게임 국가대표 선발전 준우승-

다른 선수들의 화려한 커리어의 비해 정말 단촐한 경력이었다.

심지어 태건의 경력란은 비어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장을 넘기니 일준의 참가서가 나왔다.

두호의 경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같은 내용의 한 줄이 있었다.

-아시안게임 국가대표 선발전 우승-

이 한 줄을 본 채호의 속마음은 씁쓸했다.

“배틀먼스 기간 중 사용할 숙소와 시설은 어때요?”

이번 배틀먼스의 진행을 맡은 간부들중 하나가 자신감 넘치게 말했다.

“이상 없습니다. 바로 사용도 가능합니다.”

“네. 수고하셨습니다.”

채호는 서류와 다이어리를 툭 하고 덮었다.

자신이 사용하던 만년필 또한 상의 안 주머니로 집어 넣었다.

정말 모든 준비는 끝났다.

배우(선수)들부터 카메라와 장소.

그리고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담당할 룰 까지.

“이제 시작입니다. 방송국 사람들에게 영상 잘 따놓으라고 말하고 코치진들과 직원분들은 선수들 편의에 문제가 없게 준비 잘 해놓으세요.”

“네. 알겠습니다.”

짧은 시간에 회의를 마무리 지은 채호는 곧바로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직원들이 살피기에는 별 이상이 없는 것 같아 보였지만 사실 채호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예수에게 들은 보고에 의하면 누군가 계획적으로 두호에게 접근했다.

의심가는 사람들이 몇 명 있었다.

하지만 단순히 심증일 뿐이니 자신이 대비하기에는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결국 전화기를 꺼낸 채호는 곧바로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좀 나서주실 일이 생겼습니다.”

상대가 뭐라고 묻는 듯 채호는 예 하며 대답했다

***

“날 사랑해줘요. 날 울리지마요. 숨 쉬는 것보다...”

사람들의 일상이 시작되는 9시.

따사롭게 내려앉은 햇빛을 누군가가 노래를 흥얼거리며 느끼고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준모는 두호의 집 앞에 서 있었다.

“그래. 이게 내 일상이지. 드디어 되찾은 기분이구만.”

평화로운 골목.

조금씩 들리는 차들의 소리와 밝은 아이들의 웃음소리.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걸어다니고 출근을 서두르는 직장인들.

눈과 함께 마음마저 편안해지는 이곳은 준모에게는 고향처럼 느껴졌다.

근래의 필린과 보육원 생활은 자신에게는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싶었다.

빌딩으로 가득 차 삭막하게 느껴지는 강남의 필린과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산과 나무 밖에 없는 화천의 보육원.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난 이제 돌아왔으니까.

무엇인가 폼을 잡고는 싶지만 마땅한 자세가 없어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는 준모는 멀리서 걸어오는 두호를 확인했다.

두호는 언덕 계단을 터벅터벅 내려오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감동적이기까지 한 그 모습에 준모는 큰 목소리로 인사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두호는 손을 들어 인사를 받았고, 곧장 차를 향해 다가왔다.

준모가 채 문을 열기 전 곧바로 차에 타버렸다.

혼자 쏙 들어가 버린 두호를 보며 준모는 혼자 미소지었다.

‘형님도 참.’

자신을 배려해주는 게 느껴지지만 전혀 상관없었다.

엄연한 아랫사람으로서 최선을 다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이렇게 떳떳하게 살 수 있는 건 온전히 두호 덕분이다.

“얼른 가자.”

무덤덤한 두호의 말에 운전석으로 곧장 뛰어가 자리에 앉았다.

며칠 전 예수에게 건네받은 PRIDE-K 관련 서류를 계속해서 보는 듯 두호는 굉장히 바빠 보였다.

“오늘 인터뷰 하는거지?”

준모는 자신의 핸드폰을 보며 오늘의 일정을 말해주기 시작했다.

두호는 제법 매니저의 업무에 잘 적응하고 있는 준모의 모습이 기특하게 느껴졌다.

“오늘 메디컬 테스트 하구요. 그 다음이 인터뷰네요.”

“메디컬 테스트? 그건 몰랐는데?”

준모는 차에 시동을 걸었고 곧장 차를 출발시켰다.

“네. 상위 100명에 뽑힌 사람들은 메디컬 체크 하고 이상 없으면 곧바로 배틀먼스 시작하려나 봐요. 아마 인터뷰는 메디컬 체크를 한 이후 하는가 봅니다.”

“그래?”

“형님. 인터뷰 질문은 잘 준비하셨나요?”

“그냥 보기만 했어. 얼른 가자.”

“네 출발하겠습니다!”

두호와 준모를 태운 차는 미끄러지듯 골목을 빠져나갔다.

두호와 준모가 도착한 곳은 굉장히 큰 개인병원이었다.

어지간한 2차 병원보다 진료 과목이 더 많은 이곳은 뉴하늘 병원.

강남 한복판에 위치한 이 병원은 수미의 소개로 필린과 연결된 곳이라고 들었다.

하루의 내원하는 환자만도 엄청날 이곳을 이틀간 필린에게 독점적으로 제공했다.

병원장과 수미 사이가 매우 깊고 돈독한 관계라는 걸 엿볼 수 있는 사안이었다.

50명씩 이틀에 걸쳐 검사를 진행하는 것을 알게 된 두호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예선과는 달리 예전에 보았던 익숙한 필린 직원들도 몇 보였다.

자신들의 주위엔 방송국 사람들이 일찍이 자리를 잡아 촬영을 시작했다.

대기하고 있던 참가자들에게 다가가 소소한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 때문인지 전체적인 현장의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모두가 모인 대기실로 채호와 예수 그리고 직원들이 걸어 들어왔다.

한 무리의 사람들을 이끌고 나타난 채호를 본 사람들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채호가 누군지를 알아차리는 행동들이다.

채호는 여유로운 미소를 띄우며 모두에게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필린 대표 이채호입니다.”

사람들은 박수와 환호가 쏟아졌다.

대한민국 스포츠 시장의 거물.

포보스 선정 미래를 이끌 기업인.

아시아에서 가장 큰 에이전시의 대표인 채호를 만나기만 한 것으로도 무언가를 이뤄낸 듯한 착각이 들게 했다.

“오늘 여러분은 배틀먼스라는 긴 여정을 떠나기 전 메디컬 테스트를 진행하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의 위대한 도전이 부상으로 인해 얼룩지는 것을 원치 않기 떄문이죠.”

운동선수에게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부상 방지.

부상의 여파가 단순히 훈련을 못하거나 기량 하락으로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더욱 큰 이유는 선수 생명과 관련이 되어있다.

분명히 몸에는 전성기라는 것이 있다.

어떠한 종목이든 평균적으로 선수 능력치가 커리어 통틀어 가장 뛰어난 순간.

하지만 이것을 오래 유지하는 것과 아예 경험도 못하고 끝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차이가 있다.

바로 부상방지에 얼마나 신경을 썼는가의 차이이다.

업계에서 메디컬 테스트는 주기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계속 강조하는 이유다.

채호는 누군가를 소개하려는 듯 약간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럼 이번 건강검진부터 대회의 마지막까지 여러분의 메디컬 파트를 담당해주실 도민영 닥터를 소개합니다!”

채호의 말에 뒤에 있던 직원들이 좌우로 갈라졌다.

그 사이로 한 여자가 머리를 쓸어넘기며 걸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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