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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신이 케이지 안으로-32화 (32/204)

제 32화: 끝까지 바라본 주먹에는 쓰러지지 않는다.

준모가 자신의 양복 상의 단추를 푼다.

예수의 눈이 커졌다.

그동안 장난스런 준모만 지켜봐 왔다.

그런데 지금 살짝 입가에 걸린 준모의 웃음이 여태 봐온 천진난만한 것과는 질이 전혀 다르다.

웃음인데 굉장히 서늘하다.

이따금 불량한 언행으로 이마를 찌푸리게 해도 천성이 착한 사람인 걸 알고 난 이후 누구도 준모를 불안한 눈으로 보지 않는다.

그런데 돌변한 태도에 냉기가 느껴지기까지 했다.

‘준모씨가...’

사내들 역시 매우 당황했다.

통 큰 검정 바지와 자신의 상체보다 훨씬 더 크게 입은 상의.

부담스럽게 올백으로 넘긴 준모의 모습은 사실 일반인들이 보기에 사내들보다 더욱 위협적이었다.

준모의 행동은 거침이 없었다.

자신들같이 어리숙한 놈들이 아닌 진짜 음지 생활의 종사자.

“이런 씨밸럼들이 어디서 소란 피우고 지랄이야. 너네 어디 식구야. 어디서 생활해?”

준모는 짜증이 올랐다.

아무리 자신이 요즘 성질이 죽었다지만 이런 양아치들쯤이야.

비록 두호를 따라 생활을 청산하고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말단이 되었지만, 자신도 한때는 험한 밥 좀 먹어본 남자.

여지껏 억눌려있던 스트레스가 한 번에 터져 나왔다.

“내가 문우파 식구 넘버 38인데 이 자식들이 진짜 죽을라고.”

38번째 순위 정도면 사실 막내라고 봐야한다.

하지만 사내들은 거친 준모의 기세에 주춤한 표정이었다.

준모는 흥분한 듯 병을 뒤집어 들었다.

언제든지 한바탕 할 준비가 되어있는 모습.

그러자 사내들은 당황한 듯 괜히 허세를 부리며 자리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아! 씨발 너, 다음에 보자.”

“길거리에서 보이면 진짜 죽어 너는.”

그 말을 들은 준모가 병을 던지는 시늉을 하니 사내들은 꽁무니 빠지게 도망쳤다.

“확 씨.”

쫓아나갈 듯 노려보더니 준모는 들고 있는 병을 조심스럽게 내렸다.

여자들이 온 테이블에서 박수를 치는 것이 보인다.

준모는 쑥스러운 듯 고개를 바짝 숙인 다음 재빠르게 불판으로 신경이 옮겨졌다.

“아 씨. 고기 다 탔네.”

두호는 부드럽게 웃는다.

“오호. 준모 아직 안 죽었는데.”

예수는 엄지를 치켜들었다.

“준모씨 대박. 반전 매력.”

그러자 머쓱한 듯 준모는 머리를 매만졌다.

“에이 참. 이게 뭐라고. 소주가 떨어졌네요.”

쑥스러운 듯 재빨리 술을 가지러 냉장고를 향해 걸어갔다.

두호는 눈을 감았다.

미간을 약간 찌푸리는 것이 뭔가 계산을 하는 모양이었다.

예수는 두호의 그런 모습을 보며 슬며시 입을 연다.

“괜찮으세요?”

두호는 눈을 떴다.

그러더니 가게 안을 스윽 둘러본다.

가게에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가족끼리 식사하는 모습도 보였고, 친구나 연인 그리고 여성끼리 온 사람들도 많았다.

“뭘 그렇게 보세요?”

“저렇게 쉬운 쪽도 있는데. 우리가 가까운 것도 아니고.”

말의 의도를 헤아리지 못한 예수는 눈을 깜빡거렸다.

뭔가 내용이 있어 보이지만 언뜻 떠오르지는 않는다.

“우리보다는 저들을 상대로 시비를 거는 것이 힘자랑 욕자랑 하는데 낫다는 거죠.”

“아아!”

예수가 짧게 신음을 흘렸다.

시빗거리라면 건장한 두호와 준모가 있는 자기들 탁자보다는 다른 곳이 훨씬 여건이 좋다.

그건 곧 애초의 목표가 두호였다는 뜻이었다.

예수의 표정이 굳어졌다.

두호는 이번 대회에서 우승 가능성이 높은 선수중 한 명으로 알려져 여기저기 적지 않은 카메라를 받고 있다.

그런 두호가 볼썽 사나운 폭력 사건에 연루라도 됐다는 기사가 나간다면 본인은 물론이고 필린으로서도 막대한 피해를 떨쳐낼 수 없다.

“아무래도. 파리가 조금 꼬인 것 같네요.”

태건의 움직임이 날카롭다.

거친 숨소리를 토해내며 뻗어내는 주먹이 빠르다.

퍼어억!

퍼퍼!

터지는 샌드백의 소리가 주위 공기마저 서늘하게 만들었다.

잠시 공격을 멈추어 샌드백과 같이 천천히 흔들거리는 그의 몸은 마치 어린아이가 장난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두 발은 쉼 없이 무게중심을 이동하는 중이었다.

마치 사냥감을 앞에 둔 포식자의 희롱.

최근 들어 몸 상태와 감각이 절정에 치닫고 있다.

과거의 자신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몸은 변하고 있다.

그 모습을 부사장 황석희가 바라보고 있었다.

무표정하게 태건의 훈련을 바라보는 그의 뒤로 조용히 수미가 다가왔다.

“뭐하나?”

수미가 다가온 것을 뒤늦게 알아챈 그는 허리를 숙여 인사하였다.

“오셨습니까.”

수미는 태건이 훈련하는 모습을 덤덤하게 바라본다.

땀을 비오듯이 흘리는 태건의 모습을 보며 수미는 넌지시 물어보았다.

“어때?”

잘하고 있는지의 대한 물음이었다.

황석희는 수미의 최측근이자 공식적인 오른팔이다.

실력을 행사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어김없이 황석희가 나섰다.

“글쎄요”

그때 라운드의 마감을 알리는 알람벨 소리가 들려왔다.

-띵띵띵

태건은 때리던 샌드백을 멈춰세우고 알람벨이 울리는 탁자로 천천히 걸어갔다.

알람벨을 대충 툭 하고 끈 그는 바로 앞에 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고는 땀 흘리는 얼굴에 수건을 뒤집어 썼다.

“실력이야 이제 제가 댈 바는 아닌 것 같지만...여전히 그 시절에서 못 벗어난 듯 합니다.”

수미의 표정이 약간 굳어진다.

벗어야 한다.

주먹에서 풍기는 어두운 그림자를 지워야 하는 것이다.

싸움이 아닌 스포츠다.

“으흐흠!”

수미는 팔짱을 꼈다.

벌써 15년이 넘었다.

태건과 황석희를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이 지금도 선명했다.

상처 입은 어린 맹수.

생기를 잃은 눈빛.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한 끼 먹을 것에 목숨 걸던 사람.

수미는 돌아서 걸어갔다.

그 옆을 황석희가 빠르게 붙어섰다.

“나아질 겁니다.”

“그래야지.”

위로 한다고 뱉은 말인데 수미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두 사람이 사라지고 혼자 남은 태건은 얼굴을 덮은 수건을 벗어 패대기치듯 바닥에 던졌다.

태건의 표정은 무언가 떠오르는 듯 불편해 보였다.

고개를 휘저은 그는 한숨을 옅게 토해냈다.

“다녀왔습니다.”

늦은 시간 집으로 돌아온 두호가 울린 벨소리를 듣고는 아버지는 재빠르게 문을 열어주었다.

대문 앞에 서 있는 두호를 대충 살피고 조용히 들어오라는 듯 손가락을 세워 입술에 댄다.

“밥은?”

“먹었어요. 어머니는요?”

왜인지 그리 늦은 시간이 아니었지만 집 안이 조용했다.

“너희 엄마 지금 잔다. 내일 새벽에 물건 들어오잖아.”

다른 시장 가게들과 달리 건어물은 장기 보관이 쉬워 수량이 부족할 때마다 새로 유통을 받는다.

아마도 내일 유통받는 물건들이 들어오려나 보다.

두호의 손에 들린 검은 봉지를 아버지는 이게 뭐냐는 듯 가리켰다.

“손에 뭐야?”

두호는 아버지에게 봉지를 내밀며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먹어보니까 맛있어서 좀 사왔어요.”

저녁 식당에서 곱창도 팔기에 2인분을 포장해왔다.

아버지는 환하게 웃는다.

참 무뚝뚝한 아들이 이럴 때마다 가슴이 따듯해짐을 느낀다.

“자 그럼. 아들이 사왔으니 맛 좀 볼까.”

아버지는 검은 봉지를 들고 식탁에 앉았다.

두호는 어머니가 자는 방을 슬쩍 쳐다보았다.

“같이 드시면 좋을텐데.”

“너희 엄마 잠 많은거 알잖아.”

이렇게 잠 많은 사람이 어떻게 새벽같이 시장 일을 나가는지.

부모의 책임감이란 정말 끝을 알 수가 없다.

촤락!

비닐 봉지속 안에 플라스틱 일회용 도시락이 들어 있었다.

딱 소리와 함께 도시락을 열어보니 안에는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곱창이 가득 들어있었다.

아버지는 같이 포장되어있던 일회용 나무 젓가락을 툭하고 부러뜨려 둘로 나눴다.

하나를 집어 먹은 아버지는 맛이 마음에 드는 듯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집 맛있네. 나중에 너희 엄마랑 한 번 가야겠다.”

“네.”

아버지의 곱창 씹는 소리가 조용한 부엌을 울린다.

“오늘 대회 예선 다녀왔니?”

굉장히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두호에게 물었다.

다행히 곱창이 대화의 어색함을 상당부분 씻어준다.

좋지 않은 과거를 지녔기에 가급적 깊이 들여다보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어디 그렇게 되는가.

꿈에 대한 미련이 남아서 이런 도전을 이어가는지, 아니면 단순히 자신의 미래에 대안이 없어 다시 시작하는 건지.

돈을 벌기 위함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냥 하는지.

또한 실패를 했을 때 어떤 말로 위로를 해야 할지도 준비해야 한다.

자신의 역할은 그런 것이니까.

“예선은 붙은 것 같아요.”

“정말이냐?”

아버지 눈이 커진다.

“아직은 별것 아니에요.”

예선은 어려울 일 없다는 의미다.

“축하한다!”

그리고는 어머니가 깨지 않았는지 조심스럽게 살피고는 젓가락을 살짝 내려놓았다.

“아들.”

“네.”

아버지는 잠시 은박지로 된 도시락 속의 곱창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두호는 말없이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사뭇 진지해진 아버지의 얼굴에 너무나 큰 걱정이 보인다.

“옛날에 너희 할아버지는 나한테 이런 얘기를 했단다.”

두호는 아버지의 말을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파도는 이끄는 게 아니야. 그 위에 타는 거라고. 너가 하고있는 모든 일이 잘되길 빌지만 다 잘 풀리길 바라는 것 역시 욕심일테지.”

흐름에 맞추며 살라는 것이다.

모난 짓 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되 결과는 온순하게 받아들이고 인정하라는 뜻이다.

“어려운 말 아니란다. 멈출 때 멈추고 달릴 때 달릴 줄 알면 되는거야.”

두호는 침묵했다.

짧은 말이지만 그 어떤 얘기보다 가슴을 크게 파고든다.

최선을 다했으면 결과에 절대 일희일비 하지마라는 뜻이다.

한 번의 큰 실수로 조바심을 내며 서두르지 말아라.

그래야 사랑하는 모든 것을 계속 사랑할 수 있기 때문에.

“네. 그럴게요.”

“근데 이거 맛있다.”

아버지는 곱창을 입안 가득 넣고 씹었는데 환한 얼굴이다.

언더락스 잔이 움직이며 안에 든 얼음조각이 부딪힌다.

달그락.

일준은 술잔을 들고 이마를 찌푸렸다.

최종 16명의 선발에는 자신이 있었다.

운동을 쉰 적도 없고 오히려 현역때 만큼이나 열심히 했으니까.

하지만 누구든 실력만 갖고서 대회를 우승할 수는 없는 법이다.

모든 일에는 운이라는 것이 작용하고, 운보다 더 확실한 승부의 추를 자신에게 가져오기 위해서는 전략 전술, 즉 작전을 세우고 실행하는 것이다.

신경전.

지금이야 사람들의 단순 분쟁을 표현할 때 쓰는 말이지만 실제 뜻은 그렇지 않다.

모략, 선전 따위로 적의 신경을 피로하게 하고 사기를 잃게 하는 고도의 전술이다.

현시대에서의 신경전은 경쟁자들의 훈련과 집중을 방해하는 것이다.

비겁해 보일 수도 있지만 이것은 상대를 꺾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전략이다.

실제로도 프로들의 경기에서는 상대의 컨디션을 떨어트리기 위해 많은 방법들이 동원된다.

언론 플레이와 도발 또는 물리적인 견제까지 망설이지 않는다.

이곳에 오는 모두가 돈과 명예를 위해 이 대회를 참가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돈과 명예는 깨끗한 사람에게는 잘 닿지 않는다.

그 어떤 과정이 있었던지 마지막에 벨트를 들고 있는 놈이 결국 승자.

이긴 놈이 강한 것이다.

‘반드시 이번 대회를 우승하여 재기에 성공한다.’

쭈욱!

‘그럴려면 장애물들은 미리 치워놔야지.’

잔 속에 담긴 술을 비웠다.

빈 잔에 다시 술을 채우고 병을 놓을 때 문이 열렸다.

방 안으로 순식간에 사람들이 밀고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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