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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신이 케이지 안으로-31화 (31/204)

제 31화 : 끝까지 바라본 주먹에는 쓰러지지 않는다.

아시안게임 국가대표 69kg급 결승전.

경기 4시간 전 락커룸 안에서 일준은 몸을 풀고 있었다.

힘겹게 결승까지 올라온 자신과는 달리 전 경기 KO승으로 올라왔다는 상대에 대한 정보를 들은 그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일준의 나이는 어느덧 26살.

아직까지 이뤄놓은 것이 없는 운동 선수에게 불안과 걱정이 밀려오는 시기였다.

이 악물고 한 계단만 더 오른다면 자신도 분명히 꽃을 피울 수 있을거라 생각했지만, 마지막에 올라온 상대 선수는 자신의 인생에 가장 큰 파도였다.

백두호.

나이도 17살이라고 한다.

주목받는 신인이 생기면 언론은 늘 그렇듯 상대 선수를 악역으로 묘사한다.

그렇기에 오늘 경기에 악역은 자신임이 분명하다.

원래는 어제 치러졌어야할 경기였지만, 경기장 시설에 문제가 생기면서 마지막 결승전을 오늘 치루게 되었다.

긴장을 풀겸 가벼운 쉐도잉을 하던 그 순간 방으로 일준의 코치 김성일이 들어왔다.

숨을 헐떡이며 주위를 조심스럽게 살핀 그는 오늘따라 수상해 보였다.

“일준아. 일로와봐.”

조용히 일준을 부른 김성일은 일준이 소파에 앉자마자 품속에서 조그만한 은색 케이스를 꺼내었다.

왜인지 무엇인가에 쫓기는 듯 계속해서 주위를 살피는 행동을 하였다.

그 모습을 본 일준 역시 덩달아 눈살을 찌푸렸다.

은색 케이스는 딸깍 소리와 함께 열렸고 그 안에는 주사기가 하나 들어있었다.

“이게 뭐에요?”

일준은 알 수 없는 께름칙함을 느꼈다.

손도 대지 말아야 할 것 같은 그런 느낌.

김성일은 조용히 일준에게 귓속말을 하였다.

“해외 용병들이나 쓰는 약인데. 내가 어렵게 구한거야 이거.”

“예?”

일준은 당황스러웠다.

“근데 이걸 왜...?”

그러자 코치는 목소리를 더욱 내리깔며 일준의 어깨의 팔을 올렸다.

“솔직히 말할게. 너 이대로면 저놈 못 이긴다. 백두호 그놈 경기 영상 봤는데 아예 다른 차원의 재능이더라.”

그 말을 들은 일준은 아무말도 하지 못하였다.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 질문에 발끈도 못한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자신은 다르다.

이길 수 있다 라는 말을 해야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그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했다.

“너 이대로 끝날 거야? 니 운동 선수한답시고 이뤄놓은 게 뭔데? 너 나이는 더 먹어가지. 밑에 애들은 치고 올라오지. 프로로 나가면 뭐 쉬울 것 같애 임마?”

다그치듯 계속해서 아픈 곳을 찌르는 김성일이였다.

그 말을 들은 일준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이기에 그 역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자신의 재능은 더 높은 세계를 바라보기엔 너무나 초라하기에.

“너 그래도 국가대표는 한 번 해야할 것 아니냐. 국가대표 타이틀만 달면 나중에 체육관을 열어도 뽀대가 달라 임마. 그리고 아버지가 얼마나 기뻐하시겠어.”

일준의 눈은 흔들리고 있었다.

분명히 안 된다.

자신이 복싱을 사랑한 이유는 정정당당함이었다.

그 깨끗하고 아름다운 모습에 자신은 복싱선수가 되기로 하였다.

하지만 경기는 아름다웠을지 몰라도 경기장 밖 자신은 아름답지 못했다.

초라했다.

그저 부모의 품속에 숨어 자신에게 몰아치는 파도를 피하는 도련님일 뿐.

일준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효과가 뭔데요.”

그러자 김성일은 주사기를 꺼내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아드레날린 분비를 극대화 시켜서 통증도 없애주고, 몸 신체 기능도 향상 시키는거야. 효과 직빵이지. 내가 진짜 어렵게 구해왔다.”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일준의 표정은 어두워져 갔다.

결국은 자신은 이 따위 편법을 쓰지 않고서는 승리할 수가 없는 사람이다.

비겁하게 살아야먄 겨우 목표한 바를 이룰 수 있는 그런 양아치.

그 표정을 조용히 지켜본 김성일은 위로하듯 어깨를 두드렸다.

“걱정하지마 임마. 너 이기지 못해도 버티기만 하면 너희 아버님이 알아서 해결해주실 거야. 너 경기 끝날 때까지 서 있기만 해도 우승이라니까?”

일준은 마음이 답답한 듯 거친 숨을 내셨다.

그리고는 망설이는 자신의 뺨을 때리고는 벽을 세차게 발로 찼다.

그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진심으로 그는 고민하고 있었다.

이내 결심이 선 듯 눈을 떴을 때 방금 전 일준의 선한 눈빛은 사라졌다.

독기가 가득찬 그의 눈은 굉장히 섬뜩해져 있었다.

‘시발. 이게 뭐. 이런 것도 다 능력이야.’

김성일은 조심스레 문을 열고 주위를 둘러본 후 방문을 잠궜다.

굳게 닫힌 락커룸 밖에서 들려오는 일준의 신음소리는 어딘가 처연했다.

늦은 저녁 두호와 준모는 종로에 있는 한 삼겹살집에 도착했다.

“그래요 이게 사람이 먹는거죠!”

자신이 훈련하는 동안 운동을 도와줄 수는 없으니 식단조절이라도 함께 해주겠다면서 안 보이는 데서는 모르겠지만 면전에서는 라면도 먹지 않은 준모였다.

그 모습이 기특해 오늘은 제대로 위에 기름칠을 시켜줄 생각으로 데려왔다.

“많이 먹어.”

준모는 신난 듯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메뉴판을 뒤적이다 두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소주잔을 든 모양을 만들어 마시는 시늉을 해댔다.

“형님, 그럼 진짜 살짝...?”

그 모습을 본 두호는 가볍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준모는 아주 재빠르게 손을 들며 점원을 찾았다.

“저기요! 여기 삼겹살 4인분 하고 어제처럼 한 병 주세요!”

주문을 마치고 얼마 되지 않아 점원은 테이블에 소주 한 병을 올려놓았다.

두호에게 잔을 건네자 고개를 저었다.

몸 관리차 술은 대회가 끝날때 까지 참는 것이다.

두호는 술병을 뺏어 들어 대신 한 잔 따라주었다.

“그동안 고생했다. 이제는 내가 다 알아서 할게.”

밑반찬으로 나온 음식들을 열심히 집어먹던 준모는 급하게 잔을 들어 두호가 내미는 술을 받았다.

“에이. 형님. 오른팔이 왜 오른팔입니까? 잡다한 일들은 제가 다 해야죠.”

두호는 의아한 듯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누가 오른팔이야?”

“당연히 저죠. 벌써 막 휘둘러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러자 두호는 오랜만에 큰 소리를 내며 웃었다.

준모는 자신을 자주 웃게 한다.

이거면 오른팔로써의 역할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래 너 오른팔 해라.”

그러자 멋 들어지게 술 잔을 높게 하늘로 뻗어 엄숙하게 말하는 준모.

“이 밤, 공식적인 오른팔 승진기념 파티로 하시죠.”

그러자 누군가가 잔을 소리나게 두 사람의 책상으로 올려놓았다.

“왼팔 자리는 비나요?”

두호와 준모는 깜짝 놀라며 옆을 올려다보니 예수가 서 있었다.

예수는 살가운 눈웃음을 띄며 자리에 합석했다.

“두호씨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그러자 두호는 정중하게 예수를 향해 인사했다.

“예수님도 잘 지내셨습니까?”

준모는 예수의 옷이 밝은 베이지색임을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치마라도 가져올게요. 에잉 뭔 고깃집에 저런 옷을 입고 왔대.”

예수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 준모를 다시 앉혔다.

“에이 됐어요. 튀면 뭐 어때.”

세련된 외모와 달리 굉장히 털털했다.

예수는 봉투의 내용물을 대충 확인한 다음 두호에게 건네주었다.

봉투를 건네받은 두호는 이게 뭐냐는 듯 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음. 며칠 뒤 진행할 인터뷰 질문이랑 향후 일정에 대한 이야기에요. 원래는 저희가 답변 내용도 만들어드리려 했지만 대표님이 알아서 잘 하실거라 하셔서요.”

두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채호는 세부적인 디테일은 자신에게 완전히 맡기기로 한 듯 했다.

“대표님은 지금 뭐하십니까?”

“방송국 미팅 가셨어요. 저보고 이거 전달해주고 퇴근하라 하셔서요.”

예수는 싱긋 웃으며 두호를 쳐다보았다.

업무를 벗어난 그녀의 표정은 이제야 평범한 20대의 얼굴이었다.

방금 전 준모처럼 잔을 살짝 들어 두호를 바라보았다.

“이 밤, 저도 한 끼 얻어먹어도 되겠죠?”

두호는 흔쾌히 웃어 보였다.

“물론이죠.”

그러나 준모는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기 월급은 어디다가 쓴데. 가난한 형님 주머니나 노리고.”

속삭이듯 혼자 투덜거린다고 했지만 흥분이 지나친 듯 예수가 들어버린 모양이다.

준모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대표님이 얻어먹으라고 했거든요. 두호씨 돈 많다고. 그리고 저도 직장상사 아닌가요? 준모씨?”

예수의 매서운 눈빛에 준모는 곧바로 눈을 내리깔았다.

두호는 괜찮다는 듯 손짓했다.

“예, 많이 드세요. 다른 코치님들도 오시면 좋을텐데.”

두호의 호탕한 승낙에 기분 좋아진 듯 예수는 준모에게도 술을 한잔 건넸다.

쨍!

팔을 뻗어 준모의 잔에 억지로 부딪치더니 잔을 비웠다.

“코치님들 절대 못 올껄요? 요새 완전 바빠요.”

이번 대회에서 가장 바쁘고 힘든 사람들이야말로 코치진들이다.

주민은 이번 프로젝트 전체 선수들의 컨디셔닝과 영양을 담당하게 되었고, 탁현과 채수는 선수들의 총 코칭과 진행을 맡게 되어 배틀먼스를 준비하고 있었다.

배틀먼스부터는 다양한 코치진들과 함께 훈련하기 때문에 총 책임자인 두 사람은 굉장히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또한 대회 심사위원의 자격도 가지고 있는 두 사람이 두호와 괜히 엮여 곤란한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못 오는 분들은 어쩔 수 없고, 저나 좀 많이 사주세요. 알았죠?”

예수를 바라보는 두호의 눈이 좁혀졌다.

차가운 이미지와 달리 털털하고 인간미가 있다.

그 순간 시끌벅적하게 한 무리가 들어왔다.

“야! 메뉴판 가져와!”

두호는 슬쩍 사내들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거두었다.

어딘가 어색한 그들의 모습.

시끌벅적하게 들어온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는 횟수가 잦았다.

자연스럽게 두호가 쳐다보면 그들은 황급히 고개를 돌려버렸다.

두호는 직감적으로 알 수 없는 싸늘함을 느꼈다.

그때 무리 중 한 사람이 화장실을 가는 척하며 통로 쪽에 앉은 예수를 툭 쳤다.

예수는 입으로 가져가던 술잔을 떨어뜨렸다.

팍!

유리 깨지는 소리에 다른 손님들까지 돌아본다.

예수는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지만, 가게 안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기엔 충분했다.

사내는 사과는커녕 오히려 예수를 쳐다보며 아주 음흉한 눈빛을 보냈다.

“오우오우. 너무 이쁜 아가씨. 너무 미안하고?”

사내는 예수를 향해 웃으며 오른손으로 거수경례를 했다.

사과가 아닌 노골적인 시비였다.

그러면서 두호와 준모를 훑어보았다.

“저런 뺀질이 새끼들이랑 술 먹지 말고, 우리랑 먹자. 어때? 내가 시원하게 한번 쏠게!”

예수는 젓가락을 탁하니 놓고, 새끼 손가락을 까딱 구부리는 사내를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그래. 우리랑 먹자니까?”

예수는 싱긋 웃어보이더니 가운데 손가락을 펴 보였다.

“이거나 먹고. 찌그러지든가. 별 거지 같은게.”

그 모습에 사내는 잠시 당황한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얼굴 좀 이쁜 것들이 꼭 삑사리를 내요. 말하는 싸가지 봐라 이거.”

순식간에 주변의 분위기가 싸해지만, 예수는 오히려 한심하다는 듯 사내를 쳐다보았다.

쾅!

사내는 곧바로 예수의 옆에 있는 의자를 걷어차며 손을 번쩍 쳐올렸다.

이 모든 걸 쭈욱 지켜보고 있던 준모가 젓가락을 탁 놓으며 일어났다.

“이런. 개양아치 새끼들이 어른들 식사하시는데. 아구창 털어 아구포로 만든 다음 형님 어머님 가게에서 절찬리에 판매해 버릴까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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