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9화 : 끝까지 바라본 주먹에는 쓰러지지 않는다.
“원투를 더 빠르게 내야지.”
“클린치 때 몸 바싹 붙이고!”
언뜻 보면 같은 참가자의 신분끼리 훈수를 두는 것이 이상해 보인다.
하지만 훈수가 아니라 응원이었다.
수십수백 번 경기를 뛰어온 프로와 달리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대체로 경험과 실력이 모두 부족하다.
더군다나 프로를 상대한다라는 부담감은 움직임을 더욱 위축시키고 소극적으로 변하게 만든다.
훈수를 두는 것이 아니라 코칭스태프의 역할을 서로가 자처하는 것이다.
“그렇지 거기서 겨드랑이 파서 손 넣고!”
“에이. 그런거 맞아주면 안돼!”
그런데도 출전자들은 모두 부담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실수를 하였고 자주 넘어지거나 코너에 몰렸다.
프로의 움직임은 알고도 대처하기가 힘들다.
꽈당!
두호가 구경하는 곳에서 테스트를 진행하던 사내는 부담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실수하며 넘어졌다.
프로선수가 이 상황을 놓칠 리가 없었다.
가볍게 마운트 포지션(공격자가 드러누운 상대를 걸터앉은 상태)을 차지하였고 파운딩을 (그라운드의 상위 포지션에서 주먹을 내리꽂는 것) 빠르게 쳐대니 결국 심판은 TKO 선언을 하였다.
실전에선 선수가 의식이 살아있으니 계속해서 진행시키겠지만 이것은 스파링이다.
굳이 부상 위험을 무릅쓰고 경기를 진행하게 하지는 않았다.
프로는 가볍게 손을 모아 참가자에게 인사를 하였다.
“고생하셨습니다.”
두호는 패배한 참가자를 말없이 지켜본다.
‘저 사람은 더 성장하겠네.’
프로라는 걸 알면서도 패한 것이 분한 듯 링 바닥을 치며 씩씩거렸다.
패배는 성장하기 위한 가장 자극적인 동기부여다.
패배를 딛고 더욱 노력한다면 훨씬 더 강한 파이터가 될 것을 두호는 참가자의 눈빛을 보며 예상했다.
그렇게 한동안 다른 스파링을 구경하던 중 필린의 직원 한 명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백두호씨 스파링 준비하겠습니다! 보호장비 착용을 위해서 대기실로 오세요!”
그 소리를 들은 준모는 주먹을 불끈 쥐며 더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으라차차! 우리 형님 나가신다. 싹 다 길 터라!”
두호는 대기실 쪽으로 이동하였다.
준모는 자신의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이미 시야에서 멀어진 두호를 발견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이어이! 우리 형님 글러브는 좀 더 얇은 거로 준비해놔!”
그 소리를 들은 주위 구경꾼들은 준모가 모르게 킥킥거렸다.
테스트를 진행하는 링 너머에 스파링 감독관으로 초빙된 프로선수들의 대기 장소가 있다.
대기 장소 가장 뒤편에는 다부진 체격에 해병대 돌격 머리를 한 사내 한 명이 앉아 있었다.
도경욱.
중국의 MMA 단체 군룬에서 활동 중인 웰터급 선수.
군룬의 수준은 XFC보다는 떨어지지만, 자본력만큼은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종합격투기 단체다.
중국에서도 가장 오래된 단체인 군룬.
선수층도 굉장히 두껍고 팬층도 확실해 중국 격투기 시장의 중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도경욱은 그런 군룬에서 6연승을 달리는 특급 선수이다.
어느새 웰터급 8위에 랭크된 그는 장차 챔피언도 가능할 것이라는 대단한 평가를 받는 선수였다.
하지만 도경욱의 표정은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조금 전 선수 대기실로 불쑥 탁현이 찾아왔다.
탁현의 고등학교 후배였던 경욱은 대기실로 찾아온 그를 발견하고는 허둥지둥 뛰쳐나가 맞이했다.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여긴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탁현은 대기실 안을 조심스럽게 둘러본 다음 경욱에게 손짓했다.
“잠깐 얘기 좀 하자.”
경욱을 복도로 불러낸 탁현은 대기실의 맞은편 화장실로 그를 데려갔다.
탁현은 변기 칸을 한 번씩 열어보며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였고 조용한 목소리로 경욱에게 말했다.
“너 백두호라는 사람이 테스트 보러오면 네가 봐.”
뜬금없는 탁현의 말에 의아해하는 경욱이었다.
순간 경욱의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설마 이거 승부조작 청탁 그런 건가?’
경욱은 헛기침하며 조심스럽게 탁현에게 되물었다.
“백두호가 누굽니까? 제 순번이 아닌 것 같은데요.”
그러자 탁현은 경욱의 말을 탁 끊었다.
“그건 알 거 없어. 그냥 네가 하면 돼.”
경욱은 그런 탁현을 싸늘하게 응시하였다.
“승부 조작 청탁 이런 거면 거절하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탁현은 잠시 멍해졌다.
그리고 잠시 후 큰 목소리로 웃으며 경욱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야야. 그런 거 아니야. 그냥 네가 제대로 검증 한 번 해달라고.”
자신이 오해했음을 안 경욱은 고개를 숙여 사과의 뜻을 전했다.
그렇지만 여기 있는 모두가 프로다.
왜 굳이 자신이 하길 바라는 걸까.
“그 친구가 누군데요. 진짜 제대로 해요?”
“사정 봐주지 말고. 제대로.”
탁현을 좁힌 시선으로 바라봤다.
도대체 뭐하는 놈이기에 대회 관계자가 찾아와 제대로 손을 봐달라고 말하는 건가.
“그러다 다치면 난 책임 없어요 선배님.”
탁현은 경욱을 약 올리듯 티셔츠의 어깨 부분을 툭툭 털어주었다.
탁탁!
“그럴 일 없으니까 너나 집중해. 그러다 너가 다친다. 나 갈게?”
싱긋 웃음을 짓고는 그대로 탁현은 화장실을 빠져나갔다.
갑자기 경욱은 욱하는 마음이 들었다.
같은 프로라도 자신은 격이 다르다.
군룬에서 락커룸 보너스까지 받는 에이급 선수.
‘사정 봐주지 말고 제대로 하라고.’
자신을 무시한 듯한 탁현의 말에 기분이 언짢아진 도경욱은 목을 꺾으며 몸을 풀기 시작했다.
‘날 뭘로 보는거야. 그냥 링 위에서 죽여야겠다.’
불쾌한 열기가 온 몸을 덮는다.
2층 한쪽에서는 주민과 채수가 나란히 서 있었다.
두 사람은 대회 접수처가 있는 현관 로비에 있어야 하지만 두호의 스파링을 지켜보기 위해 잠시 내려왔다.
“기대되네요.”
“그러게요. 3개월이 지났는데 뭘 준비하고 왔을지.”
분명히 두호의 몸은 범상치 않았다.
하지만 격투기는 다르다.
하드웨어도 중요하지만 동체급에선 소프트웨어의 성능이 더욱 중요한 스포츠이다.
몸이 좋아진 것뿐만 아니라 격투기의 실력 자체가 늘어야만 했다.
두호의 스파링을 기다리던 주민과 채수는 멀리서 다가오는 탁현을 발견했다.
“경욱이한테 말했어?”
탁현은 채수의 옆에 나란히 서서 말했다.
“어. 조금 긁어놨으니까. 제대로 할걸?”
“경욱이 새끼. 화 좀 나겠네.”
격투기 챔피언들을 탄생시키기 위한 대회다.
그러나 두호를 위해 기획된 대회라고 해도 무리한 표현은 아니다.
하지만 상대까지 만만하게 준비해서는 안된다.
두호에게 가장 부족한 점은 격투기에 대한 경험 부족이다.
단기간에 강자들과 최대한 많은 실전으로 두호의 감을 끌어올려야 한다.
“오 저기. 저기!”
링 안으로 헤드기어를 쓴 두호와 경욱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이번엔 채수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을 코치진 모두가 쳐다보았다.
무표정한 두호와 달리 잔뜩 상기된 표정의 경욱이다.
중앙에서 만난 두 사람의 사이로 심판이 천천히 다가왔다.
“엘보우랑 버팅 조심해주시고. 3분 동안 진행할 겁니다. 출혈 발생 시 심판의 권한으로 곧바로 스파링 중지 시키겠습니다.”
경욱은 두호를 매섭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두호는 담담하게 넘겼다.
심판은 두 선수가 준비되었음을 확인하고 양 선수의 글러브를 툭 건드렸다.
“좋습니다. 파이트!”
두호는 심호흡을 크게 하였다.
헤드기어를 글러브로 문지르며 제대로 고쳐 썼다.
경욱은 천천히 한 걸음씩 앞으로 걸어가며 조심스럽게 압박을 시작했다.
아무리 화가 난 상태지만 흥분하지 않는다.
천천히 상대를 갉아 먹어야 자신이 원하는 운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 경험에서 나오는 실력이다.
‘반응 좀 볼까.’
경욱은 이번 대회 테스트 중 처음으로 먼저 선공을 가했다.
스파링은 승패를 가리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가 연습한 기술들을 부상 없이 사용하며 실전 감각을 끌어올리기 위함이다.
하지만 경욱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두호의 안면을 향한 경쾌한 왼손 잽.
힘을 줘 펀치를 내는 건 초보들이나 하는 행동이다.
프로들은 가볍게 지른다.
가벼움은 속도의 빠름을 의미하고 빠름은 역설적으로 무거워 진다.
두호는 한 걸음을 물러서며 가볍게 고개를 상대의 오른쪽 방향으로 더킹(상대의 스트레이트성 펀치를 좌우의 아래로 피하는 복싱의 방어기술)했다.
경욱은 처음 파이트 선언 이후 두호의 서 있는 자세를 보며 제대로 된 복싱 베이스 임을 예상했다.
많은 투기 종목이 발을 11자의 형태로 유지한다.
하지만 11자의 폭과 발의 방향으로 상대가 어떤 운동을 해왔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한쪽 방향으로 조금 꺾여 있으며 좁게 선 자세의 두호.
두호가 더킹으로 피할 것을 예상한 경욱은 떨어진 고개를 어퍼컷으로 맞춰 잡으려 했다.
하지만 두호는 경욱이 내는 어퍼컷을 정확히 앞 손으로 패링 해냈다.
이미 막힌 공격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
오히려 경욱은 더욱 쉴새 없이 빠른 속도의 펀치 압박을 가했다.
스파링이라고는 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감이었다.
처음보는 수준의 스파링에 구경꾼들은 열광하며 환호성을 질렀다.
“장난 아닌데.”
“우화아아!”
심지어 다른 코스에서 테스트를 하던 참가자들까지 돌아본다.
스슥!
근소한 차이로 피해낸다.
강하게 들어오는 펀치만 글러브로 막아내는 양상이 계속 되었다.
이 모습을 본 채수는 헛웃음을 지었다.
“주먹질로는 확실히 잡을 수가 없네.”
주민은 궁금한 듯 채수를 쳐다보았다.
그의 영역은 컨디셔닝.
상황 분석을 해내기에는 그의 전문 분야가 다르다.
“무슨 말이야?”
채수는 두호를 가리키며 히죽 웃었다.
“지금 펀치만 안내지. 거의 가지고 놀고 있어요.”
주민은 이해가 되지 않는 듯 하였고 탁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두호군이 펀치를 유도해내는 거지. 헤드 무빙 봐봐.”
자세히 보니 두호는 상대가 펀치를 내는 다음 손과 가까운 곳으로 머리를 옮겼다.
“저렇게 때리기 좋은 위치에 상대의 얼굴이 놓이면 몸이 먼저 반응하거든.”
채수의 분석이 정확했다.
두호는 상대의 펀치를 피해내고 상대의 다음 손이 때리기 좋은 위치로 머리를 옮겨놓았다.
이 모습을 본 상대는 머리로 생각하기보다는 본능적으로 손이 먼저 나가기 마련이다.
그렇게 상대의 주먹을 유도해내면 다음 방향으로 이동.
이 방법으로 자신이 피하기 좋은 위치로 펀치를 유도해내는 것이다.
주먹이 나오는 것을 보고 피하는 것이 아닌 자신이 피하기 좋은 위치로 주먹을 끌어내는 것.
“알고도 나가는 거지 펀치가. 근데 저게 아무나 하는 게 아냐.”
상대의 주먹을 이끌어 내는 담력.
그리고 그 주먹을 확인해내는 반사신경.
마지막으로 위험한 펀치를 구별해내 방어하는 동체시력까지.
이 삼박자가 자유자재로 이루어져야 운영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경욱이 미칠껄? 힘만 빠지고 정타는 없으니까.”
정확했다.
경욱은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반사신경이나 디펜스도 거슬렸지만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저 풋워크가 묘하네.’
인 앤 아웃.
상대와 가까워지고 멀어지는 두호의 재빠른 스텝 때문에 정확히 펀치가 닿질 않고 있었다.
자신이 때리려 하는 목표지점보다 가까우면 힘이 덜 들어가고 멀면 미는 주먹이라 데미지가 없다.
‘저 발을 잡아야 하는데. 제길.’
경욱은 더 이상 두호의 페이스에 말려들지 않겠다는 듯 아예 멀어졌다.
자세를 고쳐잡은 그의 표정이 전에 없이 진지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