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5화 : 끝까지 본 주먹에는 쓰러지지 않는다.
두호와 준모는 체육관 바닥에 붙어있는 화살표를 따라 이동했다.
계단을 따라 내려오니 체육관 입구로 보이는 큰 문이 하나 보였다.
문 앞에는 진행요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여럿 서 있었고 벌써부터 카메라들은 촬영을 시작하고 있었다.
슥!
준모가 진행요원에게 서류를 들어보이자 손가락으로 문 안쪽을 가리켰다.
진행요원이 함께 들어가려던 준모를 막았다.
“대회 지원자들과 관계자만 출입이 가능합니다. 세컨들은 2층으로 가주시죠.”
준모는 헛기침을 크게 하며 목을 이리저리 꺾기 시작했다.
큰 눈에 한껏 힘을 준 그는 부담스럽게 어깨를 활짝 폈다,
“흠흠.”
그러고는 자신의 품 안에서 사원증을 꺼내 보이며 씨익 웃었다.
사원증을 확인한 진행요원은 슬쩍 물러서며 어서 들어가라는 자세를 취했다.
한껏 폼을 잡으며 두호를 돌아보았다.
두호는 그런 준모를 보며 일부러 놀란 척 웃어 주었다.
“오.”
준모는 두호의 반응에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문을 활짝 열었다.
화악!
들어서던 두호가 놀란다.
마치 뜨거운 비닐 하우스에 들어선 것처럼 후끈한 열기가 얼굴을 덮었다.
넓은 체육관은 사람들로 넘쳐났는데 곳곳에서 체력 테스트가 벌어지고 있었다.
“으아아아!”
“하나만 더.”
참가자들이 내뱉는 거친 호흡과 신음, 하나 더를 외치는 동료와 세컨들의 외침이 체육관을 가득 메웠다.
‘뜨겁네.’
넓게 펼쳐진 예선 시험장엔 수 많은 사람들과 진행요원이 있었다.
족히 몇백 명은 되어 보이는 지원자들이 각자의 시험에 집중한 얼굴로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을 떨어트렸다.
꿈을 향해 질주하는 그들의 표정은 무서울 만큼 진지했다.
결국은 모두가 경쟁 상대일 테지만 큰 목소리로 서로를 응원하는 모습은 역시 승부의 세계에
서 살아온 사람들답게 순수한 열정이 넘쳤다.
그리고 곳곳에는 방송국 카메라들이 수십 대는 동원된 듯 참가자의 인터뷰와 예선 현장 촬영
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었다.
왼쪽 벽면에는 맨몸 운동 기구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풀업(턱걸이)을 위한 철봉과 푸쉬업(팔 굽혀 펴기) 바 그리고 싯업(복근 운동) 보드.
이른바 맨몸운동의 대표 격인 이 3가지의 운동을 시험하는 체력 테스트 구간이었다.
그리고 시험장에 중앙부터 오른쪽 벽면 끝자락까지 스파링 테스트를 위한 링이 있었다.
일일이 링을 세우지는 않았으나 대신 복싱 경기장의 규격에 맞춰 정사각형의 선을 긋고 네 모
퉁이에 기둥을 세운 뒤 줄을 감은 임시 가설된 링들이 보인다.
바닥에는 주짓수 매트가 깔려있어 안전을 생각하는 의도도 엿보였다.
이 모습을 천천히 둘러본 두호는 옅은 미소를 띠었다.
대한민국.
아니 아시아의 넘버 원 에이전시가 개최한 대회이니 타 대회와는 다른 수준일 것을 자신 또한
예상했었다.
하지만 지금 이곳의 모습은 자신의 예상마저 훨씬 웃돈다.
구들과 운동 장비들 또한 중고가 아닌 새로 준비한 듯 상태가 아주 깨끗해 보였다.
고개를 돌리니 시험장 2층에서는 각 격투기 단체들의 관계자들과 타 회사 소속의 에이전트들
그리고 선수들 개인의 코치들이 있었다.
이번 대회에서 눈에 띄는 선수들을 접촉하려는 의도.
하지만 의아한 모습이다.
필린이 거액을 써가며 만든 독자적인 대회였지만, 이렇게 대회 내부 상황을 지켜볼 수 있다면
타 에이전트들이 선수들을 먼저 접촉해 낚아채 갈 수도 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떼 놈이 벌어가는 그림.
하지만 필린은 타 단체와 에이전트들이 관람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
자신감.
‘이런 퍼포먼스도 준비하고, 확실히 채호가 감이 좋네.’
하지만 이 퍼포먼스는 단순히 다른 에이전시를 견제하기 위함이 아니다.
PRIDE-K의 투자한 수 많은 스폰서들을 위한 것이었다.
대회 이후에도 계속해서 필린과의 거래를 이어갈 이유.
대한민국에 필린보다 나은 곳은 없다 라는 명가의 여유.
두호는 눈을 매섭게 떠 모든 것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그의 눈빛을 본 준모는 당황하였다.
처음 보는 눈빛이었다.
‘뭘 하시는 거지?’
두호는 테스트가 진행되지 않는 빈 풀업바의 슬쩍 매달려보기도 하고, 또 바닥을 쾅쾅 밟아
보기도 하였다.
용병시절에 배운 지혜이다.
- 너가 밟고 있는 곳의 모든 것이 아군이 되어야 한다.
공간의 대한 이해도는 곧 자신이 활용할 수 있는 전략의 수를 뜻한다.
물론 이 공간에서 전투야 일어나지 않겠지만 공간의 대한 이해도가 좋아서 나쁠 것은 없다.
이 대회는 완벽하게 자신의 계획안에서 진행이 되어야 한다.
자신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힘써줬다.
기대한 만큼 보여주는 것.
이것이 그들을 위한 보답이다.
두호는 씨익 웃으며 조용히 몸을 돌려 자리를 빠져나갔다.
어차피 예선 테스트 기간은 아직 하루가 남았다.
마지막까지 지원자들이 몰린 다음 진행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말 없이 걸어가는 두호를 준모는 재빠르게 따라 붙었다.
“테스트는 안 보시게요?”
“응. 마지막까지 무르익으면 하자. 먼저 할 일이 있어.”
두호는 그렇게 예선 시험장을 떠났다.
그리고 누군가가 두호를 섬뜩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저 새끼를....”
“에이 씨발!”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비벼 끄는 사람은 모영배였다.
그는 겨우 1년을 넘게 끊었던 담배를 다시 손에 쥐었다.
모로해피캐피탈.
전 모영파.
불법을 일삼는 불건전 기업들이 대체로 그러하듯 그들 역시 물장사와 돈 장난으로 시작했다.
가난한 어린 시절.
자신과 비슷한 이유와 시기에 이 생활을 시작한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그러다보니 하루가 멀다 하고 서로 죽고 죽이는 밥그릇 싸움이 벌어졌고 수 많은 건달들이 지방으로 밀려나거나 죽었다.
하지만 모영배는 살아남았다.
뺏기기 전에 뺏었고, 못 가질 것 같으면 훔쳤다.
그렇게 악착같이 살아온 현재 그는 대한민국 대부업계의 큰손이 되었으며 모영파는 모로해피캐피탈로 이름을 바꿔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하지만 얼마 전 수미와의 일전에서 그 콧대 높은 모영배는 망신을 당해 속이 펄펄 끓는다.
“이게 뭔 개망신이냐. 어휴.”
자신이 수족처럼 부리는 부하들이 힘 한번 제대로 못써보고 당했다.
나이가 들었지만 그래도 이 바닥 현역들에겐 가장 영향력 있는 모영배다.
씻을 수 없는 굴욕을 당한 그날이 떠올라 아직도 잠 못 이루는 그였다.
비록 수미가 아량을 베풀어 자신의 비밀들을 신고 없이 온전히 자신에게 건네주었지만, 분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긴 테이블의 가장 가깝게 앉은 조상현 상무가 모영배에게 말했다.
“회장님 이대로 넘어가실 겁니까?”
“절대로 안 되지. 이 바닥은 카라깃 접히면 그땐 정말 끝인 거야.”
하지만 방법이 없다.
인맥도 주먹도 자신에겐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그러자 조상무는 모영배에게 공손히 서류 하나를 넘겨주었다.
“제가 요새 지켜보니까. 금고 사업 접고 다른 걸 준비하나 봅니다.”
서류를 살피려 모영배는 자기 목에 걸린 금테 안경을 꼈다.
꽤 도수가 높은 안경임에도 잘 보이지 않는 듯 눈을 좁게 떴다.
“PRIDE-K? 이게 뭐야.”
“영업은 필린에 이채호 대표가 뛰는 것 같지만 쩐주는 조수미인 것 같습니다.”
서류를 흔들어 보이며 조상무를 매섭게 쳐다보았다.
“확실해?”
“네. 얼마 전부터 밑에 놈들 좀 따보니까. 필린과의 접촉이 많습니다. 그 과정 중 조수미도 여러번 보였고요.”
조상무의 얘기를 참고하여 서류를 보니 얼추 맞는 것 같았다.
자신이 아는 조수미와 깊은 관계에 기업들이 스폰서로 여럿 들어가 있다.
그러나 자신이 맞잡이 하기에는 너무나 큰 거물들이다.
“그놈들을 직접 건들면 싸움 구실이 되니 우리는 숟가락이나 얹는 거죠.”
조 상무의 말에 구미가 확 당긴 모영배였다.
확실히 전면전으로 넘어가면 자신이 없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자신이 이득을 보면서 상대방만 엿 먹일 수 있다면.
이것은 꿩 먹고 알먹고, 도랑치고 가재 잡는 격이다.
구미가 확 당긴 듯 자신의 옷 소매를 정리하며 물어보았다.
“그래서 방법은?”
조상무는 자신이 계획한 방법을 차분히 설명했다.
모영배는 처음엔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지만 이내 함박웃음을 지으며 손뼉을 쳤다.
“하하하하! 이거라면 그 여편네도 속 좀 끓겠어! 좋아 좋아 조상무!”
기분이 좋아진 모영배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곧바로 담배 하나를 꺼내 물었다.
조 상무는 재빠르게 주머니에서 금색 휘장이 박힌 듀퐁을 꺼내 모영배가 물고 있는 담배의 불을 붙였다.
청아한 소리가 사무실에 울린다.
라이터가 주머니에 들어갔고 모영배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명심해! 은밀하게 진행해야 돼.”
“걱정하지 마십시오. 차질 없이 준비해놓겠습니다.”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은지 모영배는 연신 너털웃음을 지었다.
“과거의 인물은 과거에 남아야지. 당신이 선 넘은거야.”
담배를 빨아대는 모영배 얼굴이 만족스럽다.
* * *
가게에서 돌아온 어머니는 밥을 앉혔다.
전기밥솥에 적당히 물을 붓고 뚜껑을 닫은 뒤 취사 버튼을 누르고 아침에 바빠서 그대로 놓고 간 그릇들을 설거지하기 시작했다.
딩동!
초인종 소리?
수돗물 소리가 크다. 잘못 들은걸까?
딩동딩동!
이번에는 분명히 들렸는데 남편은 이미 집에 들어와 씻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찾아온 사람도 없다는 생각을 하며 천천히 수돗물을 잠그고 행주에 손을 닦던 어머니 동작이 갑자기 급해졌다.
휙!
행주를 던지며 거실을 빠르게 지나쳤고, 곧 현관문에 도착했다.
두호가 연락도 없이 사라진지 어느덧 3개월이 지났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그저 믿고 기다리기로 했지만, 부모로서 걱정이 드는 것 어쩔 수 가 없었다.
한 번의 실수 이후로 유독 걱정이 많아졌다.
혹시나 두호일까 싶어 어머니는 재빨리 잠긴 대문을 열고 나갔다.
“맙소사!”
두호였다.
그것도 아주 건강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저 왔어요.”
많은 생각을 했다.
부모님을 만나면 무슨 말을 먼저 꺼낼까.
온다 간다 말 한마디 없이 사라졌으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어떤 인사를 하겠다는 결정을 내리지 못했는데 막상 어머니를 보자 오면서 생각했던 말과는 전혀 거리가 먼 ‘저 왔어요’란 말이 튀어나왔다.
그마저도 무덤덤한 얼굴로.
어머니는 아무 말이 없었다.
아무래도 너무 무성의한 인사가 아닌가 싶다.
두호는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 바빴어요.”
저 왔어요 할 때보다는 약간의 부드러움과 짧았지만 얼굴에 미소도 지었다.
어머니는 감정이 정리가 되지 않은 듯 우두커니 서 있었는데 어깨가 들썩일 만큼 길게 한숨을 내 쉬었다.
왔으니 됐다.
물어볼 것이 정말 많았지만 다 큰 아들이고 이렇게 나타났으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별일이 있으면 이렇게 멀쩡할 리가 없지.’
어머니는 몸 성하게 돌아온 두호를 따듯하게 반겼다.
“어서 와 아들. 살이 좀 빠졌네?”
두호는 고개를 숙이며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방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아버지가 마당을 가로질러 걸어오고 있었다.
엉거주춤 서 있는 두호를 발견한 아버지가 빙긋 웃었다.
정말 웃고 싶어 웃었으랴.
어머니 못지 않게 마음 졸였을 것이다.
다만 아버지라는 이유로 내색을 하지 않았을 테니까.
자신마저 불안해하고 걱정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어머니는 완전히 흔들릴 것이기에.
“밥은 먹었니?”
“아뇨!”
“잘 왔다. 때맞춰.”
아버지는 어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