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쟁의 신이 케이지 안으로-24화 (24/204)

제 24화: 전쟁의 신은 죽었다.

장충체육관은 대회 참가 신청을 하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들어올 때 필린 직원이 건네준 번호표를 들고 바닥에 앉아 자신의 접수 순서를 기다린다.

“5월인데 벌써 이렇게 덥냐.”

책상을 놓고 앉아 신청을 받는 필린 직원들은 상의를 벗거나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 올렸다.

주무 부서인 서울시에 급히 에어컨 작동을 요청했지만, 담당자가 일요일이어서 나오지 않았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당직 근무자들에게 요청했지만 자신들 소관이 아니라며 고개를 돌렸다.

여기저기 참가자들 사이에서 대기자들 에어컨 좀 틀어달라는 아우성이 터져 나왔지만 방법이 없다.

채수가 마이크로 전후 사정을 설명하자 여기저기서 욕설이 튀어나온다.

대회의 참가 신청 기간은 2주였다.

7일째인 오늘까지 벌써 팔천 명이 넘는 선수들이 신청했는데 몰려오는 기세를 보아 마감까지 일만 명은 거뜬히 넘길 것으로 예상되었다.

“우리나라에 격투기 선수들이 이렇게 많았어?”

키보드를 두들기던 채수가 손목을 돌렸다.

출전하고자 하는 체급과 주소 나이 직업 등을 기록하는 일이 완전 중노동이다.

“좀 쓸 만한가?”

그때 채호가 다가왔다.

신청서를 받고 있던 직원들이 고개를 돌리며 눈인사했다.

“대표님. 우리나라 인구가 몇이죠? 오천만?”

채수는 형 채호를 향해 물었다.

“그렇게 많이 온 거야?”

“조금 전 팔천 찍었어요.”

채호는 미소를 지으며 바닥에 순서를 기다리며 앉아 있는 사내들을 바라보았다.

모두가 프로 선수가 되고 싶은 야망을 갖고 찾아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싸움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재보고 싶어 신청한 사람도 있을 테고, 사는 것이 너무 무료해 심심풀이로 나온 이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사업을 홍보할 욕심을 갖고 신청한 이도 있지 말란 법은 없다.

어려서 잃어버린 동생을 찾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격투기와 거리가 먼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태권도 국가대표 상비군 출신에서부터, 아마추어와 프로 복싱에서 이름을 날리는 사람도 몇몇 보인다.

텔레비전에서 봤던 레슬링 선수도 있고 아시안게임에서 유도 은메달을 딴 선수도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국내 격투기 단체에서 활동 중인 현역 선수들도 신청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작은 나라에서 어떻게 이렇게 많은 인재가 쏟아져 나오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어쨌든 참가자가 많다는 건 좋은 일이다.

누군가에겐 새로운 출발을 위한 기회.

또 다른 누군가에겐 자신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다.

단 한 사람이라도 이 대회를 통해 꿈을 얻고 삶의 가치를 깨우친다면 그걸로 대성공인 것이다.

“어떻습니까?”

채수가 슬며시 다가와 묻는다.

“다른 건 제쳐두고 사람 많이 몰린 것만으로도 이미 절반은 성공한 듯싶습니다.”

“아직까지 한 번도 이런 이벤트가 없었지. 돈 놓고 제일 싸움 잘하는 놈이 쓸어가는 게임이야말로 가장 진솔한 것 아니겠어?”

채수가 씨익 웃는다.

“참. 형 두호 씨 연락돼?”

채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살짝 걷어진다.

“찾으러 나선 준모씨도 연락이 안 된다.”

“서류 봤는데 아직 신청 안 했어요? 방송에 그렇게 광고가 나가고 하니 모르고 있지는 않을 것이고.”

처음 두호를 도와주지 않겠다는 채호의 결정에 모두가 놀라면서 일부에서 극렬한 반대가 있었다.

이번 대회를 통해 필린의 가치를 확실하게 알리자면 두호를 내세워 강력하게 우승자로 몰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채호는 단호했다.

우리가 아니라고 부인해도 대중은 짜고 친 고스톱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차피 한국이 아닌 세계 무대에 나가려면 이런 식으로 두호를 성장시켜 봤자 도움이 안 된다는 채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을 매가 있다면 국내에서 실컷 두들겨 맞게 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어디십니까? 형님.’

하지만 결국 삼일 전날까지도 두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PRIDE-K의 지원 접수 기간은 13일 차로 접어들었다.

주민은 체육관 입구에 서 있었다.

원래 안에서 신청자들이 작성한 몸무게를 자료 삼아 체급 정리하고 있어야 했다.

물론 계체량을 하겠지만 일단 당사자들이 작성한 몸무게를 토대로 구분은 해 놓아야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초조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다 오늘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밖으로 나온 것이다.

하루 남았다.

“내일이 신청 마감인데.”

채수가 다가왔다.

채수 또한 표정이 그다지 밝지 못했다.

주민은 채수의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혼자서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엄청난 배기음과 소리를 내며 차 한 대가 들어왔다.

“이거 뭔 소리야?”

들어오는 차를 눈을 좁게 떠 바라보았다.

멀리서 다가오는 구형 에쿠스 한 대.

눈에 익숙한 차량이고 번호다.

“준모 씨 차 아냐?”

예전 채수는 준모에게 물었다.

“준모씨 이게 뭡니까? 요새 세단 좋은 거 많이 나오는데 각쿠스라뇨?”

그러자 준모는 단호하게 손을 저으며 말했다.

“이 차의 배기음과 각이야말로 한국 누아르의 상징이죠.”

모두가 제멋에 사는 세상이라고 하지만 한숨만 나왔던 준모의 취향을 얼마나 비웃었던가.

그런데 오늘은 오랫만에 보는 첫사랑을 보는듯하다.

거침없이 밀고 들어온 차에서 준모가 내렸다.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내린 그는 문을 쾅 소리가 나게 닫았다.

“표정들 보니까 목이 빠져라 기다렸나 보네요. 주민 코치님은 목이 벌써 기린이 됐네.”

주민은 밝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채수는 얼마나 반가워하는지 손뼉까지 치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죠. 애끓는 한숨 소리가 화천까지 들리더라고.”

준모가 한쪽으로 비켜나며 두호를 향해 손을 젓는다.

뒤이어 뒷문을 열고 내린 사람은 두호였다.

지난 3개월 동안 길러왔던 더벅머리는 어느새 깔끔하게 정리되어 뒤로 넘겨져 있었고. 검정 반바지와 회색 후드티를 입었다.

스포츠백 하나를 뒤로 들쳐멘 그는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다가왔다.

“두호씨.”

채수와 주민이 동시에 입을 열었는데 목소리가 떨린다.

두호는 말없이 그저 빙긋 웃었다.

“도대체 어디서 뭘 했습니까? 준모 매니저님도 전화를 받지 않고.”

그러면서 재수는 준모를 흘겨보았다.

준모는 답답하다는 듯 자신의 가슴팍을 쳤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 주십시오. 난 생각 없는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채수가 물었다.

“무슨 말입니까?”

“고3 수능생을 방해하면 됩니까? 안됩니까?”

“당연히 안되죠.”

“두호 형님은 온 힘을 다해 이번 대회를 준비 하셨습니다. 그런데 내가 전화나 받으면서 옆에서 시끄럽게 하면 될까요?”

“어디서 무슨 준비를 했는데요?”

주민이 물었다.

준모는 두호를 바라보았는데 형님 입으로 얘기하라는 눈치였다. 뒤이어 두호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두호는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들어가서 신청하면 되죠?”

두호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체육관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채수와 주민의 눈이 걸어가는 두호의 뒷모습에 박혔다.

흘긋!

주민이 채수를 툭툭 치며 두호를 가리켰다.

“몸이…. 하체 봐.”

“목도 달라졌어.”

주민은 두호의 하체를 보고 놀랐고 채수는 두꺼워진 목에 충격을 받은 얼굴이다.

목은 안면에 가해지는 충격을 흡수한다.

즉 두껍다는 건 충격에 버티는 힘이 좋다는 얘기였다.

3개월 만에 너무 달라졌다.

‘뭘 했기에?’

오랫동안 격투기계에 몸을 담았지만 3개월 만에 이렇게 몸을 바꿀 수는 없다.

“천재가 노력까지 했다 이 말이지?”

두호의 뒷모습을 향하는 채수의 눈이 열기로 상기되었다.

참가 신청서 제출을 마치고 두호는 각종 테스트가 진행될 시험장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PRIDE--K에는 총 3개의 과정이 있다.

예선, 배틀 먼스, 본선 토너먼트.

최소한의 역량을 확인한 뒤 선별된 인원 중 두 달간의 트레이닝을 진행한다.

그 트레이닝 기간 중 여러 가지 미션을 통해 최종적으로 16명을 선발하여 본선 토너먼트를 치른다.

우선 가장 먼저 예선 시험장에선 100명을 추려낸다.

그때 준모가 조그만 수첩 한 권을 들고 달려왔다.

“형님 좀 더 자세한 프로그램 나왔습니다.”

준모는 들고 있던 수첩을 펼쳐 들었다.

“예선에서 중점적으로 보는 건 체력이랑, 코치진들과의 스파링, 그리고 면접이랍니다.”

“면접?”

걸어가던 두호가 돌아보자 재빨리 수첩을 들이민다.

“보세요. 맨 밑에 면접하고 쓰여 있잖아요.”

두호는 피식 웃었다.

‘채호답네.’

면접이 있는 이유는 뻔하다.

드라마를 만들기 위한 소재를 가졌는지를 확인하기 위함일 것이다.

같은 능력과 실력을 갖춘 사람이 있다면 조금 더 매력적인 사연을 가진 사람을 찾기 위함일 터.

중계까지 되는 마당이므로 아주 중요한 과정이기도 했다.

그 시각 채호는 필린의 본사 대표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대회 진행 상황 보고서를 읽고 있는 그는 피곤한 듯 연신 목덜미를 주물렀다.

책상 위에 놓인 가득 찬 재떨이가 그가 처리하는 업무량을 보여준다.

어느덧 예선 참가 기간의 마지막 날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두호가 신청했다는 보고를 듣지 못했다.

혹시나 계획이 틀어지는 것이 아닌지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대표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예수였다.

“대표님. 보고 드릴게 있습니다.”

채호의 시선은 여전히 보고서에 있었다.

다른 대답이 없자 예수는 웃으며 얘기를 이어갔다.

“주민 코치가 말하길 두호 군이 현장 지원하러 왔답니다.”

잠시 행동이 멈춘 채호는 아무 말 없이 의자를 뒤로 젖혔다.

“왔단 말이지?”

“별로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어떤 사람인지 아니까.”

채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잠시 생각이 많아진 표정을 짓던 채호는 예수를 돌아보았다.

“어떻데?”

“변화가 좀 보이나 봅니다.”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마음이 편해진 듯하였다.

“만나러 가시겠습니까?”

채호는 고개를 흔들어 보이고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손목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한 그는 다시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촬영 잘 따놓으라고 해. 그리고 지금 섭외된 코치진 중 제일 터프한 사람이 누구지?”

스파링 테스트를 위해 현역 선수들을 섭외해 놓았다.

예선 현장에서 80명의 현역 선수들이 돌아가며 스파링 테스트를 진행한다.

그들 중 가장 강한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도경욱 선수 있습니다.”

도경욱.

중국 MMA 단체에서 활동 중인 현역 선수이다.

현 랭킹은 웰터급 8위로 장차 챔피언전까지 노릴 만하다는 평가를 받는 선수였다.

“두호 군이랑 붙혀.”

채호가 싸늘하게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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