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3화 : 전쟁의 신은 죽었다.
드르륵 쾅.
한 사내가 방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왔다.
“태건아! 광고 봤냐?”
사내가 들어온 곳은 수미의 직원들이 체력단련을 하는 지하창고였다,
이 공간은 오래전에 만들어져 곰팡이 냄새가 났지만, 기구들은 자주 사용했는지 관리가 잘 되어있었다.
그리고 체력 단련실 안 태건은 평행봉에 매달려 기계체조의 플란체(Planche) 동작을 하고 있었다.
플란체는 매우 고난도의 동작으로 많은 코어 힘과 근력을 요구하는 동작이다.
엎드린 자세에서 하체를 공중으로 띄워 몸이 지면과 수평이 되도록 만든다.
오랜 시간 자세를 유지했는지 태건의 얼굴에서는 땀이 뚝뚝 떨어졌다.
휙!
평행봉에서 사뿐히 뛰어 내려온 태건이 고개를 들었다.
“왜?”
체육관을 들어선 사내는 태건의 입사동기이기도 하지만 고향 친구인 황석희였다.
가까이 다가온 황석희는 태건의 근육질 몸을 보며 눈을 좁혔다.
“살벌하네.”
태건의 몸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일반적으로 몸 좋은 사내를 볼 때 드는 느낌이 아니었다.
마치 잘 벼려진 칼 한 자루를 보는 듯했다.
몸은 예전보다 감량이 되었지만 말랐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날카롭고 단단해진 느낌.
태건은 근래 들어 더욱 자기 몸 상태와 감을 강력하게 끌어 올리는 중이었다.
“아까 뭐라고 한 거야?”
“대회 모집 공고 나왔던데, 확인해 봐.”
뒤이어 지하창고 안으로 수미가 걸어들어왔다.
“때가 된 거지. 컨디션은 어때?”
태건과 황석희는 수미에게 가벼운 목례를 했다.
“좋습니다.”
표정 없는 대답이다.
수미의 눈이 태건의 몸을 훑었다.
‘제대로 칼을 갈았구나. 두호 놈 긴장 좀 해야겠는데.’
태건은 한쪽에 벗어 놓은 옷과 수건을 집어 들고는 체육관을 걸어 나갔다.
“어디 가?”
황석희가 물었다.
“대회 일정 나왔다며.”
태건은 벗어 놓은 옷을 가볍게 걸치며 수미에게 고개를 숙였다.
“다녀오겠습니다.”
수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탁!
문을 닫고 사라졌다.
“야 일준아.”
“아 닥쳐 쫌. 가락구니까 말 시키지 마. 집중해야 돼.”
“이거 재밌을 것 같지 않냐.”
일준과 동하는 내기 당구를 치고 있었다.
얇은 눈썹과 찢어진 눈매.
그리고 공을 쳐다보는 일준의 눈은 굉장히 사나워보였다.
쭉 찢어진 눈과 클래식한 정장바지를 입고 있는 일준은 모든 신경을 당구공에 쏟고 있었다.
돈이 걸린 승부다.
상대가 누구든 무조건 이겨야 한다.
‘아이씨.’
근데 오늘따라 망할 큐대가 춤을 춘다.
게임 내내 끌려다니기만 했고 한 번도 앞서가지를 못했다.
딱!
마지막 빨간 공이 맞고 이제 쿠션 하나 남았다.
사각사각!
초크로 큐대를 다듬으며 공을 보는 일준의 눈에서 파란 기운이 뿜어 나온다.
스윽!
각도를 잡은 듯 고개를 숙이고 큐대를 몇 번 조준하더니 강하게 공을 때렸다.
따악!
일준의 눈이 거칠게 공을 쫓아 흐르더니 갑자기 찢어진다.
“아아!”
아슬아슬하게 비켜나가는 공을 보며 일준이 고개를 들어 올린다.
“오늘 진짜 더럽게 안 맞네!”
“얼씨구. 진정하고 이것 좀 보라고.”
동하가 핸드폰을 내밀자 일준이 거칠게 낚아챘다.
“뭔데?”
동영상 하나가 나오고 있었다.
유명 연예인들이 나와 격투기 대회를 홍보하는 내용이었는데 일준이 피식 웃었다.
“PRIDE-K? 이게 뭐야?”
동하는 자신이 때릴 공의 각도를 찾아 움직이며 말했다.
“한 번 나가보지 그러냐. 판이 크던데, 너 그래도 아시안게임 국가대표 선발전 우승했었잖아.”
“됐고, 빨리 쳐.”
일준은 동하의 핸드폰을 당구대 위에 올려놓았다.
딱!
동하가 공을 때렸다.
그 역시 쿠션이었는데 정확하게 두 개의 공을 때리며 성공한다.
“흐흐흐!”
동하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일준아!”
그때 한 사내가 일준을 불렀다.
말끔한 정장 차림이다.
“아버님이 찾으셔. 가자.”
“알았어요.”
일준은 점수판 아래 풀어 놓은 위블로(HUBLOT) 손목 시계를 차더니 지갑에서 십 만원짜리 수표 두 장을 꺼내 탁자에 올려놓는다.
“너 다음에 한 판 더 해?”
“연습 좀 많이 하셔야겠어요. 도련님.”
약 올리듯 동하는 수표 두 장을 들어 입에 맞춘다.
“재수 없는 새끼!”
“크크크!”
투덜거리는 일준을 보며 동하는 큰 소리로 웃었다.
당구장은 5층 건물 지하에 있었는데 계단을 올라오자 길가에 비상등이 켠 승용차 한 대가 정차해 있었다.
독일의 명차와 정면 승부를 벌이기 위해 한대자동차에서 야심 차게 내놓은 T90이었다.
물론 일반 서민들이 타기에 쉽지 않은 차지만 그의 집안 재력치고는 약소하다.
보는 눈이 많으니 검소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샀다고 한다.
일준은 재빨리 조수석에 올라탔고 사내가 운전석에 올라섰다.
부웅!
차는 곧장 당구장을 떠났다.
“꼰대가 왜요?”
“아버님이 요즘 너 걱정 많으시잖아.”
“어휴.”
적색등에 잠시 멈췄던 승용차는 녹색으로 신호가 바뀌자 빠르게 출발했다.
흘긋!
운전하는 사내는 조수석의 일준을 슬쩍 쳐다보았다.
일준은 말없이 창밖을 보고 있었는데 이마를 찡그리고 있었다.
당구장에서 보았던 환하고 자유로운 기색은 찾아볼 수 없는 답답한 그림자다.
“후우!”
일준이 길게 한숨을 쉬더니 우두둑 의자를 뒤로 젖히고 눕는다.
아버지가 자신을 부르는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다.
아버지는 자신이 회사를 물려받았으면 한다.
일준은 싫다고 했다.
왜 싫으냐는 아버지의 질문에 그냥 싫다고 했다.
인생의 반을 땀 흘리며 운동을 해왔는데 이제 와서 책상에 앉아 서류나 보라고?
차라리 노가다를 할지 언정 그런 고리타분한 일은 절대 못 한다.
아니 죽어도 안 한다.
팟!
뭔가 생각 난 듯 핸드폰을 꺼내더니 녹색 검색창을 켰다.
광고 배너에 쉬지 않고 동영상 하나가 돌아가고 있는데 조금 전 당구장에서 봤던 그 광고였다.
일준은 동영상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잊고 지냈던 감정들이 떠오르는 듯 가볍게 몸서리가 쳐졌다.
하지만 빛나는 두 눈이 흔들리는데 그건 흥분이었다.
어렸던 자신이 한때 가장 바라왔던 그것.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뤄내고 싶어 했던 그것.
‘어!’
운전하던 사내는 놀랐다.
조금 전까지 일준의 얼굴을 두껍게 덮고 있던 먹구름이 씻은 듯 사라졌다.
어느새 햇볕이 쨍쨍 내리쬐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뭘 보기에.’
일준은 잠시도 영상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내려야지 일준아. 도착했어.”
목적지에 도착했는데도 일준은 영상을 보고 있었다.
“어어.”
일준은 다시 한 번 영상을 보더니 주머니에 핸드폰을 넣었다.
차 밖으로 나온 일준은 하늘을 뚫을 듯 솟아 있는 빌딩을 한참 동안 올려다보았다.
햇빛 가득하던 일준의 얼굴이 어느새 먹구름에 덮였다.
“형.”
“응.”
“끝나고 체육관 갈거니까 한 시간 뒤에 차 대놔요.”
“체육관? 아침에 갔잖아?”
대답없이 씨익 미소를 지으며 일준은 건물 로비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아직 아침 해가 떠오르려면 시간이 아직 남았다.
보육원 입구의 고정문을 해제하고 황성태가 걸어 나왔다.
황성태는 멈칫했다.
안개가 자욱했다.
그야말로 세상을 다 잠식해버린 듯 보육원 앞에 모든 산이 안개에 잠겨있었다.
보육원 앞마당을 쓸기 위해 구석에 있는 빗자루를 집어 들었다.
주머니에 넣어놓았던 장갑을 꺼내 한쪽씩 착용하며 천천히 보육원 뒤편으로 이동하였다.
이형언 펠릭스 신부가 미사를 진행하는 소강당이 있었다.
이번 주말에 다른 외부 손님들도 온다고 하니 이참에 정리를 해야 했다.
성당 앞에 도착하여 빗질하기 시작하려 할 때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느껴졌다.
자신 외에 누군가가 있는 듯했다.
‘무엇일까.’
이 위화감의 원인을 찾기 위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두호가 훈련하던 공터로 이동해보았다.
여전히 조용했고 풀 벌레 소리만 들려왔다.
누군가 있다.
황성태는 빗자루를 들고서 위화감이 밀려오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겨갔다.
멈칫!
소성당 끄트머리에 있는 작은 공터에 도착한 황성태는 눈을 크게 떴다.
두호였다.
짙은 안개 속에서 두호가 섀도잉(Shadoing)을 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한 건가.’
얼굴에 땀이 비 오듯 흘러내린다.
무엇인가를 완성하려는 듯 늘 분신처럼 달고 다니던 모래주머니도 없었다.
황성태는 빗자루를 들고 두호의 섀도잉을 지켜보았다.
손의 속도는 안개 속이라고는 하지만 눈이 쫓기가 어려웠다.
어찌나 스텝이 가벼운지 그 흔한 모랫바닥 훑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황성태는 마른침을 삼켰다.
가상의 상대를 만들어내어 상상 속의 싸움을 하는 것이 섀도잉이다.
두호는 앞 손 잽을 뻗은 다음 원을 그리다 쾌속하게 잽을 날렸다.
마치 상대의 시야를 가리며 조금씩 공간을 장악해나가는 모습이었다.
앞 손 잽을 여러 차례 뻗어대다 순식간에 뒤로 빠지며 원투를 찔러 넣었다.
혼자서 하는 훈련이었지만 섀도잉 상대가 실제로 존재하는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아웃파이팅 이구나.’
황성태 눈에는 자신 또한 함께하는 듯 섀도잉이 명확하게 그려졌다.
처척!
두호의 자세가 바뀐다.
스위칭(Switching).
오른발을 앞에 두었다.
사우스포(Southpaw: 왼손잡이들의 복싱 자세).
물러설 의지가 전혀 없는 듯 꼿꼿하게 세워진 왼발 뒤꿈치는 마치 견인포의 다리처럼 굳건했다.
한껏 단단하게 끌어올린 상체에서 쉼 없이 펀치를 내었다.
가상의 상대와 마치 모든 것을 건 싸움을 하듯 그는 무자비하게 주먹을 뻗어댔다.
얼굴에서 몸통으로, 다시 몸통을 치는 척하며 얼굴로 향하는 오른손.
황성태가 강조하던 어떤 자세에서도 완벽한 뒷받침을 해줄 튼튼한 하체.
‘인파이팅.’
파고든다.
하체에서 나오는 두호의 인파이팅은 부드럽던 방금의 아웃 파이팅과 달리 굉장히 포악했다.
가드를 한다면 가드째로 부숴버릴 듯한 박력.
이윽고 두호의 주먹이 멈췄다.
숨을 고르며 자신의 섀도잉을 복기하듯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우두커니 서 있는 황성태를 발견한다.
“뿌리가 잘 내렸군.”
두호의 하체에 대한 칭찬이다.
두호가 몇 걸음 가까이 다가오면서 안개에 가려져 있던 몸이 드러났다.
부드럽고 튼튼해 보인다.
산줄기처럼 쭉 뻗은 어깨와 다부진 목은 가히 압권이었다.
“명심하게. 이성만 담겨야 할 주먹에 감정이 담기면 상대에게 안 닿는 법이야.”
황성태는 빗자루를 챙겨 천천히 돌아섰다.
“몸 조심하게나.”
그리고 안갯속으로 홀연히 사라진다.
두호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한참을 서 있었다.
채호는 늦은 밤 저녁 자신의 사무실에서 TV를 무표정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유명 아이돌과 배우들이 나와 자신이 기획한 대회 PRIDE-K를 열심히 홍보 중이었다.
리모컨으로 TV의 전원을 종료한 후 한숨을 내뱉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책상 위에는 수많은 대회 참가신청서들이 올라와 있었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아주 전쟁터네.”
주머니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물며 창밖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강남의 밤거리는 대낮보다 훤했다.
불이 꺼지지 않은 고층 빌딩들과 들려오는 사람들의 목소리.
수많은 차들의 경적소리와 분주한 이곳의 거리.
이것들을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가슴속에서 야망이 불타오른다,
“어쩌니 해도 전쟁터는 그분의 무대지.”
채호가 바라보는 어두운 창문 너머로 도혁과 두호의 얼굴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