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2화 : 전쟁의 신은 죽었다.
긴 팔 긴 바지에 밀짚모자를 눌러 쓴 남자가 예초기를 돌리고 있었다.
휴일을 맞아 성당 여기저기 무성한 잡초를 베는 이형언 펠릭스 신부였다.
날씨가 조금씩 더워지면서 잡초가 무성해졌다.
가만 놔두면 다른 꽃나무들이 성장에 방해받고 잡초에 밀려 죽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들이 뛰어놀다 돌부리를 못 봐 다칠까 염려되었다.
그는 이 보육원을 거느린 덕현 성당에 부임해 온 지 팔 년째가 되고 있었다.
자신이 쫓는 진리에는 언제나 아이들의 행복이 있을 거란 생각에 항상 아이들을 위하고 마음을 쓰는 그는 좋은 어른이었다.
하지만 시끄러운 제초기 소리 사이사이에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투투투!
예초기의 날이 회전하면서 돌조각을 친 것이다.
다행히 무릎까지 올라오는 장화를 신어 다치지는 않았지만 섬뜩했다.
신형 예초기는 돌멩이나 이물질이 튀어 작업자를 다치게 하는 옛날 것과 달리 뒤로 덮개가 있는데 이형언 신부가 쓰는 건 기름을 넣고 시동을 거는 아주 오래된 구형이다.
멈칫!
열심히 담 아래 수북이 자란 잡초를 베고 있던 신부가 잠시 고개를 들었다.
시끄러운 예초기 소리 사이사이로 전혀 다른 색깔의 소리가 파고 든다.
윙윙!
펑!
위이이잉!
퍼엉!
‘뭐야?’
신부는 예초기 시동을 껐다.
‘뭐지. 엔진에 문제가 있나?’
이형언 신부는 기계에 이상이 있다고 보고 전원을 종료했다.
예초기가 멈추자 순식간에 주위는 고요해졌다.
이형언 신부는 예초기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살폈지만 크게 고장이 난 부위를 찾지 못했다.
펑!
갑자기 들려오는 굉음에 이형언 신부는 엉덩방아를 찧었다.
깜짝 놀라며 주위를 두리번거릴 때 또 한 번 쾅하는 소리가 울리자 눈을 부릅떴다.
워낙 낡은 성당이다.
순간적으로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스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설마!”
이형언 신부는 예초기를 잠시 내려놓고 소리가 들려 온 곳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낡디낡은 성당 건물이다.
교구에 보수 공사에 대한 도움을 요청했으나 예산이 부족하다면서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었다.
어느 한쪽이라도 무너졌다면 할 수 없이 복구가 이뤄질 때까지 아이들을 잠시 다른 곳에 맡겨야 했다.
이상 무.
성당은 다행히도 온전했다.
그런데도 뭔가 터지는듯한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이형언 신부는 계단을 오르고 언덕을 넘어 뒷산으로 접어들었다.
뚝!
이형언 신부는 자기 눈을 의심했다.
“저게 말이 되는 건가…?”
멀리서 두호가 샌드백을 때리고 있었다.
자신도 샌드백을 알고 있고 과거 이곳 출신 아이가 황성태에게 떼를 써서 걸어 놓은 것이라고 했다.
언젠가 자기 주먹으로 한 번 때렸다가 손목이 부러지는 줄 알았다,
펑!
퍼퍼펑!
차라리 총성이다.
언뜻 군 시절 포병으로 복무할 때 보았던 곡사포 소리 같기도 했다.
자신도 모르게 이끌리듯 다가간 이형언 신부는 다시 한 번 더 놀란다.
힘도 경이롭지만, 속도가 더욱 시선을 붙잡았다.
주먹은 눈으로 좇아가기 힘들 만큼 빨랐고 그러면서 수시로 이동하는 스텝은 경쾌하고 현란하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소리나 빠른 주먹을 보아 샌드백이 좌우로 심하게 흔들릴 것 같았는데 살짝 떨 듯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한쪽에 차곡차곡 쌓인 가죽 가방은 주먹에 맞아 헤지거나 찢어진 샌드백들이다.
준모를 시켜 공수해 온 십여 개 샌드백도 이제 거의 바닥이다.
“그래도 조금 쓸만해 졌군.”
이형언 신부는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황성태가 다가와 있었다.
“엄청난데요.”
그런데 고작 쓸만해 졌다는 너무 인색한 평가 아니냐는 의미였다.
황성태는 입술을 물고서 두호의 훈련을 지켜보았다.
눈이 가늘어지며 두호의 동작을 자세히 바라본다.
대회가 다가오고 있었다.
필린은 막바지 준비를 하느라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메이저 대회를 만들기는 쉽지 않다.
더욱이 스포츠 문화사업의 크기가 작은 한국에서 비주류 격투기 대회를 흥행시킨다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라 불가능한지도 모른다.
하지만 필린이 하면 다르다는 걸 보여주기 위하여 모두가 최선을 다했다.
경기 방식을 놓고 열띤 토론을 하고 있는데 회의실 문을 열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이 대표.”
“오셨습니까.”
채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인사를 올린 사람은 바로 수미였다.
수미의 한 손엔 서류 봉투가 들려 있었다.
채호는 회의하던 직원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잠깐만 실례할까요?”
직원들이 일어나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나가면서 수미 일행을 흘긋거렸는데 단번에 범상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걸 느낀다.
특히 몇 명의 사내가 풍기는 기세는 아무런 행동 없이도 위협이 느껴진다.
결국 회의실에는 채호와 수미 그리고 태건만이 남아있었다.
수미는 자신이 들고 온 서류 봉투를 건넸다.
“한 번 봐.”
“예!”
채호는 대답했지만 당장 열어보거나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이번 대회 규칙을 약간 비틀었다는 얘길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두호 얘기를 자연스럽게 꺼낸다.
두호를 필린이 전혀 도와줄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는 말에 수미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태건도 조용한 수미를 흘긋 돌아보았다.
“잘했네. 확신만 있다면 자네의 계획대로 밀어붙이는 게 맞다고 보네. 아 그리고.”
수미는 의자에 등을 붙였다.
피곤해 보인다.
“부탁이 하나 있어 왔다네.”
이번 대회를 준비하는데 수미의 도움이 적지 않았다.
관공서 문제, 즉 문화체육부로부터 대회 개최에 대한 여러 가지 신고서류를 준비하는데 수미가 앞장 섰다.
그리고 대회의 굵직한 스폰서들은 모두 수미의 입김으로 간단하게 해결되었다.
자신들이 진행했어도 가능했겠지만, 거래와 협상이라는 것은 빠르게 끝낼 수가 없는 일이었다.
서로가 원하는 요구조건을 조율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었다.
시간이 촉박한 필린에게 그녀는 날개를 달아준 것이었다.
“말씀하세요.”
부탁이 아닌 지시를 내려도 들어줘야 할 만큼 수미의 노고가 크다.
수미는 태건을 가리키며 말을 이어 나갔다.
“이 친구도 대회에 내보낼 생각이야.”
“네?”
채호는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
“저번에 내 직원들이 두호 놈한테 혼 좀 났었는데, 이 친구가 그 자리에 없었거든. 그랬더니 상당히 호승심이 생긴 모양이야.”
태건은 꼿꼿하게 고개를 들어 채호를 바라보았다.
채호는 살짝 이마를 찌푸렸다.
수미의 말뜻은 태건이란 사내가 두호와 한판 붙어 보고 싶어 한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왜 이마가 찌푸려지는 것일까.
말 그대로 단순히 동료들이 당한 것에 대한 빚 갚는 차원에서 출전하는 걸까.
채호가 겪어본 수미는 결코 편한 상대가 아니었다.
아무나 거물들을 상대하는 지하 은행을 운영하지 못한다.
미처 간파하지 못한 뭔가 있을 것이다.
한 마디로 촌스러운 복수 차원이 아닌 분명히 이 대회에 태건이라는 사내를 내보내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네. 알겠습니다. 그러시죠.”
“체면을 세워주어 고맙군.”
수미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을 향해 걸어갔다.
채호가 따라 일어났다.
“벌써 가시려고요?”
“가야지. 또 연락하겠네.”
태건이 문을 열었고 수미는 그대로 밖으로 빠져나갔다.
탁!
문이 닫히고 두 사람의 모습이 사무실에서 사라졌다.
채호는 말없이 닫힌 문을 쳐다보았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자리로 돌아온 채호는 서류 봉투의 단추를 풀어 종이를 살펴보았다.
채호의 헛웃음이 나왔다.
“이런 복잡한 상황에 이런 것까지 생각했다니...”
채호는 서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황석희가 수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시려던 일은 잘되셨습니까?”
수미는 황석희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말없이 따라오는 태건을 돌아보았다.
“자신 있나?”
두호와의 싸움을 말 하는 것이다.
태건은 여전히 무덤덤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네.”
수미는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잘 해봐.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고.”
두호 앞에 또 하나의 장애물이 만들어졌다.
장애물은 삶의 골칫거리들이자 피할 수 없는 절벽이다.
* * *
바람에 온기가 담겼다.
정면으로 맞아도 어깨를 움츠리거나 양쪽 귀가 얼얼한 겨울바람이 아니다.
장충체육관 앞에는 많은 인원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상당한 규모의 행사가 벌어지는 듯 촬영 장비들이 수북했고 스텝들의 발걸음이 분주했다.
메인 PD가 헤드셋을 잠깐 귀에서 떼며 누군가를 크게 불렀다.
“미주 씨! 이제 시작해도 괜찮을까요?”
전적으로 미주를 신뢰하는 듯 충분한 준비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한 PD였다.
미주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은 PD의 목소리를 듣고 급하게 자신들의 짐을 챙겨 자리를 비켜주었다.
“네! 준비됐습니다.”
수많은 카메라 앞에 선 여자의 이름은 오미주.
PBS의 연예가 소식을 전하는 <오! 데일리나잇> 에 간판 리포터이다.
누구에게나 편한 대답을 끌어내는 그녀의 진행 능력과 건강미 넘치는 웃음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에게 사랑받는다.
그녀는 혼잣말을 계속해서 중얼거리며 입과 목을 푸는 듯 헛기침을 계속했다.
“아브르르! 아브르르, 안녕하십니까. 아아 안녕하십니까.”
리포터의 중요한 능력 중 하나를 꼽으라면 분명한 발음이다.
입술과 혀를 연달아 풀고 감독이 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손을 번쩍 들었다.
미주는 마지막으로 심호흡을 크게 하였다.
“자! 시작하겠습니다. 셋. 둘. 하나. 큐!”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곧바로 미주는 모두가 사랑하는 화사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데일리 나잇에 리포터 오미주입니다. 오늘 저희는 대한민국 최초 격투기 오디션 프로그램 PRIDE-K의 첫 지원 현장에 나와 있습니다!”
카메라맨이 미주의 얼굴을 바짝 당긴다.
“격투기는 우리에게 한 번도 주연으로 다가오지 못했습니다. 한국은 물론 많은 아시아 선수들이 국제무대에 도전했지만, 무참히 무너진 결과 그들에 대한 관심은 싸늘히 식어가고 있습니다. 역도산과 김일 선수가 호령했던 6.70년대 레슬링, 홍수환과 박종팔이 흔들었던 80년대 프로복싱 이후 21세기 대한민국 격투기를 이끌어갈 새로운 라이징 스타를 찾기 위해 저희는 이 자리에 왔습니다. 총 상금 10억과 고급 세단의 주인은 누구일까요?”
그녀의 진행은 막힘이 없었다.
문장을 끊고 맺는 기교와 목소리의 높낮이를 자유자재로 조절해가며 듣는이의 가슴을 뛰게 했다.
이어 그녀는 지원하기 위해 장충체육관을 찾아오는 사람들 사이를 누비기 시작했다.
“이곳은 대회 지원자들이 참가 서류를 제출하는 곳인데요. 참가 자격에 대해 직접 찾아온 선수에게 한 마디 물어보겠습니다.”
미주의 앞으로 많은 지원자가 대회의 참가를 위하여 줄을 지어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모자를 쓴 사내에게 멈췄다.
“잠깐 인터뷰할 수 있을까요?”
방송에 송출된다라는 것에 사내는 멈칫했지만 피하지 않았다.
“이번 대회 참가자인가 보죠?”
“그렇습니다.”
“대회 참가 자격에 대해 잠깐 말해주실 수 있나요?”
“꿈이 있다면 누구라도 지원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격투기 선수인가 봐요?”
사내는 가볍게 웃었다.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이번 대회에 임하는 각오 한 말씀 짧게 해주시죠.”
“한국을 넘어 세계에서 싸우고 싶습니다. 지켜봐 주세요.”
“각오가 대단하군요. 부디 좋은 결과 있기를 바랍니다.”
미주는 사람들 사이를 천천히 거닐며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그러던 중 카메라는 자연스럽게 체육관 외벽에 걸린 현수막으로 옮겨간다.
이어 필린의 로고 위 PRIDE-K의 슬로건을 줌인하였다.
<이 모든 것을 딛고 일어났기에 우리는 그를 챔피언이라 부른다.>
모든 여정을 설명하는 단 한 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