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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신이 케이지 안으로-21화 (21/204)

제 21화: 전쟁의 신은 죽었다.

아침을 먹고 난 두호의 줄넘기는 네 시간째 이어지고 있었다.

뛸 때마다 드러나는 발목의 채워진 모래주머니가 보였다.

적혀있는 숫자는 3kg.

양발에 6kg의 모래주머니를 매달고 줄넘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엄청난 훈련량으로 인해 꼴이 마치 물에 빠진 사람 같았다.

황성태가 멀리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두호는 황성태를 발견하고 줄넘기를 잠시 멈췄다.

거친 숨소리가 증기기관차의 배기관 같다.

황성태는 접이식 사다리를 하나 들고 오고 있었다.

두호는 재빨리 달려가 황성태의 사다리를 받아서 들었다.

“고맙네. 들고 따라오게.”

두호는 사다리를 들고 황성태를 따라갔다.

둘은 보육원의 정문 앞에 도착했다.

황성태는 정문 앞에 우뚝 서더니 보육원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보육원의 건물은 2층이긴 했지만 지상고가 높아 3층에 맞먹는 높이를 가지고 있었다.

황성태는 사다리를 설치하라는 듯 건물을 향해 손짓했다.

타탁!

철제 접이식 사다리를 펼쳐 건물에 높게 걸쳐놓은 두호는 황성태를 바라보았다.

“이제 매일 4시간씩 이 사다리를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하게.”

두호는 이마를 찡그렸다.

샌드백에서의 상황은 대충 짐작했으나 이거야말로 감이 오지 않는다.

어떤 의도로 사다리를 오르내리라는 걸까.

“조심하게. 이 높이에서 떨어진다면 운동신경이 좋다고 하더라도 다칠 테니 말이야. 그리고….”

황성태는 주위에 모래주머니 하나를 가리켰다.

“저것도 목에 얹고.”

움찔!

두호는 놀랐다.

이 정도의 높이에 사다리는 무척 위험하다.

홀몸으로 올라도 흔들리고 자칫하면 추락할 수도 있는데 저 무거워 보이는 모래주머니를 목덜미에 얹고 오르란다.

황성태가 괜히 자신을 골탕 먹이려고 그러는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두호는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네.”

그렇게 황성태는 자리를 떠났고 두호는 곧장 모래주머니를 목뒤로 들쳐 멨다.

20kg가 조금 넘는 모래주머니를 목에 두르니 중심 잡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한 발씩 천천히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중간쯤에 도착하니 몸에 분명한 자극이 온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서부터 중심 잡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 중심을 잡기 위해 하체와 코어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고 자연스레 모래주머니는 순수하게 목 힘으로 들게 되었다.

‘이거 장난 아니네.’

높이 오를수록 사다리의 휘청거림이 심해졌다.

한순간도 방심할 틈 없이 집중해서 올라가야 했다.

결국 옥상에 올라선 두호는 모래주머니를 잠시 내려놓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면서 두호는 보육원의 풍경을 둘러보았다.

‘좋네.’

두호의 머리 위로 새 한 마리가 빠르게 지나갔다?

쌔애앵!

매였다.

송골매 한 마리가 두호의 머리를 찍을 듯하며 사라졌는데 먹잇감으로 판단하고 덮쳤다가 이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잽싸게 갈고리 같은 발톱을 거두었다.

두호는 씨익 웃으며 사다리를 내려왔다.

내려가는 길은 더 어렵다.

사다리는 기타 줄처럼 흔들리고 양손은 목뒤에 올려진 모래주머니를 받쳤다.

허벅지가 아프고 종아리에 힘이 바싹 들어간다.

덜덜덜!

사다리는 어떻게서든 두호를 떨어뜨리려는 것처럼 흔들거렸다.

사실 떨어지는 건 문제가 아니다.

위험하다 싶으면 모래 포대를 던지고 뛰어내려 버리면 된다.

뛰어내린다고 하더라도 다리가 부러질 만한 높이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식이라면 황성태가 요구하는 훈련의 효과를 전혀 얻지 못하는 것이다.

“후우!”

성공이다.

기어이 내려왔다.

고작 오르내림 한 번에 온몸이 땀으로 목욕했다.

하지만 두호의 표정은 목적지가 보이는지 굉장히 밝았다.

“공기 죽이네.”

창 문을 활짝 열며 준모는 기지개를 켰다.

어느새 해는 땅 밑으로 숨어들었고 산간 지역이다 보니 바람이 더욱더 세게 불었다.

보육원 간판만을 비추고 있는 조명이 오히려 이곳의 분위기를 을씨년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자신이 기억해낸 단서를 조합해보았다.

화천에 있는 보육원 출신.

화천 자체가 그리 큰 지역이 아니다 보니 인터넷 검색을 통해 확인해 보아도 두 곳 밖에 나오질 않았다.

이미 한 곳은 찾아갔지만 허탕이었다.

만약 이곳에서도 없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마음속으로 이번 길에는 제발 어떤 소득이라도 있길 기대하면서 차는 빠르게 달려갔다.

시골길은 조용했고 불빛도 보이지 않는다.

고개 하나를 넘어서자 불빛들이 깜빡인다.

덕현면 소재지다.

꾸불꾸불 이어지는 고갯길을 내려간 승용차가 면 소재지로 들어섰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찾던 준모의 눈이 빛났다.

백여 미터 멀리 어슴푸레 건물 하나가 보였는데 대충의 형태가 성당 같다.

준모는 속도를 높여 다가갔다.

파팟!

자신이 찾던 성당이 맞다.

십자가도 보이고 입구에 이정표가 세워졌는데 강원도 교구 덕현 성당 덕현 보육원이란 글씨가 쓰여 있었다.

덜컹!

준모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내렸다.

성당을 들어가려다 멈칫하면서 핸드폰 시계를 보았다.

밤 10시가 넘었다.

그래서인지 불도 꺼졌다.

잠시 고민하더니 조심스러운 걸음걸이로 들어선 준모는 보육원 길을 안내해주는 화살표를 따라 올라갔다.

보육원으로 들어가는 대문이랄 수도 없는 철제문은 열려 있다.

준모는 다시 한번 계단 앞에서 길게 숨을 내쉬고 한 계단씩 걸어 올라갔다.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조용한 이곳에는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맴돌았다.

보육원 건물이 한눈에 들어온다.

모두가 잠든 듯 보육원은 조용했고 준모는 현관문 쪽으로 다가갔다.

현관문 오른쪽으로 낯익은 여자가 보인다.

준모는 성당 교인들처럼 슬쩍 성모상을 향해 합장하고 고개를 숙였다.

어디서 누가 보고 있을지 모르므로 최대한 아름다운 청년의 그림을 그려야 한다.

스윽!

현관문을 열기 위해 손을 뻗었는데 누군가 어깨를 잡아당겼다.

준모는 본능적으로 돌아서며 왼 주먹을 뻗었다.

뒷골목 생활에서 은퇴를 한 지 제법 됐지만 아직 반사신경은 살아 있다.

그런데 주먹 끝에 걸린 건 아무것도 없고 하마터면 자기 주먹에 맞을 뻔했다.

“어어!”

준모의 눈이 커졌다.

두호가 서너 걸음 뒤에 서 있다.

“어이씨, 형님. 연락도 없으시고 진짜 무슨 일 있는 줄 알았잖아요.”

극적 상봉, 아니면 감격의 만남이라고 해야 할까.

갑자기 눈동자가 뜨거워지더니 막 뭔가 흘러내릴 것 같았다.

준모는 이를 악물고 폭발할 것 같은 감정을 삼켰다.

“혀...형님! 두호 형님!”

와락!

준모는 끝내 두호를 끌어안고 흐느꼈다.

“정말 너무 재미없었습니다.”

두호는 준모의 등을 토닥이며 슬며시 밀어냈다.

준모는 슬쩍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닦으며 두호의 몸 상태를 살폈다.

편안한 훈련복 반 바지에 검은색 민소매를 입고 있었다.

복장은 특별할 만한 부분이 없으나 몸이 달라졌다.

어깨가 떠억 벌어졌고 목의 두께는 전보다 훨씬 두꺼워져 있었다.

하체를 보던 준모는 입을 벌렸다.

차라리 통나무였다.

탄탄한 허벅지와 새끼줄을 감아 놓은 것 같은 종아리의 뚜렷한 데피니션은 걸작이다.

탁!

두호가 넋을 놓고 자기 몸을 살피는 준모의 어깨를 툭 쳤다.

“들어가서 얘기하자.”

두 사람은 나란히 보육원 안으로 들어갔다.

준모는 보육원 안 소강당에서 긴 탁자에 앉아있었다.

조금 전까지 환히 웃던 준모의 표정은 무겁게 변해 있었는데 두호가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 두 잔을 받아왔는데 커피 믹스였다.

커피 봉지로 휘휘 젓더니 한잔은 준모 앞으로 내밀었다.

“마셔 얼른.”

“예!”

준모는 후루룩 소리를 내며 한 모금 마시는 듯하더니 잔을 내려놓는다.

“근데. 여길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준모는 곧바로 손뼉을 짝 치더니 검은 비닐봉지를 들었다.

검은 비닐봉지에는 흰 글씨로 ‘소복 상회’라고 적혀있었다.

“하하. 형님이 안 보이셔서 어머님께 잠깐 들렸었습니다.”

비닐봉지에서 자신이 산 건어물들을 책상에 올려놓았다.

“어머님도 행방을 모르신다길래, 제가 근처를 돌아다니다가 형님이 예전 화천 보육원 출신이라고 하신 게 기억나길래 와봤는데 다행이네요.”

두호는 오 하는 입 모양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로 감이 좋네?”

“이 정도는 뭐 기본이죠.”

준모가 꺼내놓은 건어물들을 두호는 손으로 매만졌다.

두호는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렸다.

“잘 계시지?”

“형님 걱정 많이 하시더군요. 내가 잘 계시니까 마음 푹 놓으라고 했죠.”

이제는 부모다.

절대로 변하지 않는 것이 생겼다.

내일쯤 전화 한 통 드려야겠다라는 생각을 하며 준모를 바라보았다.

“뭔 일 있어?”

준모는 움찔했다.

말도 꺼내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속마음을 간파하자 눈을 크게 떴다.

두호는 토끼 눈을 한 준모를 보며 피식 웃었다.

“형님! 사실은.”

준모는 한숨을 훅 내쉬었다.

“이채호 대표께서 이번 대회는 필린의 도움 없이 진행해야 한다는 말을 전하러 왔습니다.”

“도움 없이?”

“네! 그게 말이 되느냐고 제가 따졌는데 일이 그렇게 됐다면서.”

준모는 이채호가 눈앞에 있으면 가만 안 둘 것처럼 인상을 썼다.

사실 준모는 그저 이채호를 묵묵하게 쳐다본 것이 끝이었다.

“또?”

“네에?”

“그게 끝이야?”

준모는 더듬거리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필린의 계획인데 자신조차 혜택을 누릴 수 없게 생겼다.

촬영을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드라마의 주연이 오디션부터 다시 봐야 하는 꼴이다.

후루룩!

두호는 소리내지 않고 커피를 마셨다.

“준모야.”

“네.”

자신이 어필한다고 회사 방침이 바뀔 수는 없지만, 두호를 위해서라면 뭔가 더 공격적인 행동을 하고 싶었다.

난 무조건 두호 형님 편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다.

“죄송합니다.”

준모는 고개를 숙였다.

이 모든 건 자기 탓이다.

“채호가 잘한 거야.”

“정말입니까?”

두호는 컵을 한쪽으로 살짝 옆으로 밀어내었다.

“필린이 여는 대회니, 여타 다른 대회들과는 달리 어마어마한 큰 판이겠지.”

“그렇죠.”

“우승 상금 또한 엄청날 테고. 성적이 좋으면 대회 이후의 플랜도 필린에서 보장할 것이 뻔하지. 한국에서 난다 긴다 하는 놈들이 다 참가할 거야.”

일반적인 회사도 아니고 모든 스포츠 산업이 집중하는 필린이었다.

그런 필린은 자신의 입지를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흉내조차 못 낼 판을 만들려 할 것이다.

대회의 크기는 상금이 정한다.

그리고 상금이 크면 그제서야 은둔의 실력자들이 나온다.

돈이 아쉬운 사람부터, 유명해지고 싶은 사람 그리고 자존심 때문에 참가하지 못하던 진짜 실력자들.

누군가 그랬다.

돈으로 못 하는 일은 없다.

만약 안 됐다면 액수가 적은 것이라고.

메이저 격투기 대회라는 말로 포장되어 있지만 사실은 돈을 노리는 사연 있는 사람들의 처절한 싸움판이 될 것이다.

이기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다 하는.

그 처절한 모습은 흥행이 안 되려야 안 될 수가 없다.

하지만 이렇게 판이 큰데 필린에서 미리 그려둔 그림이 있다는 이야기가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치명타를 입는다.

이채호는 물론 필린은 더 이상 두호를 위해 움직이지 못한다.

“아무런 잡음 없이 준비된 모든 것을 가져가려면 필린은 빠져야 해. 필린이 자기 선수를 띄우기 위한 프로젝트였다는 말이 나오면 게임 끝이야.”

“그렇군요.”

준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이 대회에선 필린이 밀어주는 격투기 유망주가 아니라. 교도소를 다녀온 범죄자지만 꿈을 포기하지 않은 가난한 청년 백두호의 모습이어야 하는 거지.”

“아아!”

준모는 감탄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뜨거워진다.

사실 두호는 필린의 입장에선 아주 흥행성 높은 마케팅의 소재였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돈이 없어 교도소까지 다녀온 복싱 유망주.

그가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도전을 꿈꾼다.

이 얼마나 돈 되는 캐릭터인가.

“완전히는 아니고 필린의 계획에 무리가 있을 수 있다는 걸 알았지. 결국 나만의 준비가 필요하다는 걸 깨닫고 여길 온 거야.”

꿀꺽!

준모는 이제야 마음을 놓았다는 듯 커피를 소리내지 않고 마셨다.

하지만 이번에 두호의 표정에 날카로움이 묻어났다.

이제 자신의 차례라는 듯.

그 모습에 덩달아 준모 역시 긴장했다.

“준모야, 너 온 김에.”

“네?”

이 엄청난 계획에 자신도 포함되어있다.

무슨 일이든 한다.

이미 두호 형님에게 모든 것을 건 자신 아닌가.

표정에 각오가 들어선 준모.

“애들 밥이나 좀 하다 가라.”

“형님?”

준모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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