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쟁의 신이 케이지 안으로-19화 (19/204)

제 19화: 전쟁의 신은 죽었다.

“앉게!”

황성태는 원장실로 두호를 안내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초라한 건 여전했다.

살림살이라는 것이 벽에 걸린 밤색 수사 복과 낡은 책상, 그리고 손바닥 만 한 나무 십자가가 전부였다.

두호는 술을 마실 때처럼 찻잔을 옆으로 돌리고 한 모금 마셨는데 그 모습을 바라보는 황성태가 빙긋 웃는다.

“도혁이와는 어떤 사인가?”

두호는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황성태의 시선이 잔잔하다.

“형 됩니다.”

“형! 형이라.”

황성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형의 종류는 많다.

피를 나누는 형이 있고, 마음이 맞아 잘 따르는 형도 있다.

그런가 하면 나이로 따지는 형이 있으며 평대를 하기에는 어렵고 그렇다고 존칭을 붙이기도 어중간할 때 부르는 김형, 박형 따위도 있다.

쭈욱!

황성태는 소리를 내지 않고 차를 마신다.

느릿하게 찻잔을 내린 황성태가 물었다.

“도혁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네. 얼마 전 죽었습니다.”

충격적인 말을 들은 황성태는 움찔했다.

용병과 군인은 그 대우도 목적도 생활도 다르다.

멀쩡한 군인 일을 그만두고 험한 용병 일을 시작하겠다고 했을 때 문득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이 아이를 떠나보낼 수도 있겠구나.

하지만 이리 갑작스러울 줄은 몰랐다.

말문이 콱 막혔다.

잠시 창문 밖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보육원의 모든 아이를 정말로 아끼고 사랑했다.

그런 아이들 사이에서도 유독 아픈 손가락이 도혁이였다.

타고난 삶을 바꿔보자 그 아이는 자신이 보기에도 정말 위태롭게 살았다.

자신의 꿈이라고는 했어도 그 고운 손에 쥐게 한 것은 또래 아이들은 구경도 못할 것이었다.

매년 다른 이름으로 기부금을 보내왔지만, 자신은 도혁임을 알 수 있었다.

자신임을 밝히지 않은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니까.

그저 그 돈은 도혁이 잘 지내고 있다는 안부 같은 것이라 여기며 안심했다.

하지만 지난 3년간 아무런 소식이 들려오지 않은 것이 이런 이유였다니.

파르르!

찻잔을 들어 올리는 황성태의 손이 떨린다.

차를 마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얼굴을 숨기기 위해 잔을 들었다.

아련함과 그리움이 황성태의 얼굴을 덮더니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투툭!

황성태는 기어이 찻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두호의 가슴도 답답했다.

하지만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도혁이 형의 꿈이 제 꿈과 맞닿아 있습니다. 도와주십시오.”

두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황성태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얼굴과 생김새는 달랐지만 풍겨오는 분위기가 도혁과 닮아있었다.

저 정중함과 절대 꺾이지 않을 것 같은 눈빛까지.

“그 아이가 왜 자네를 동생 삼았는지 알 것 같구먼.”

황성태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한쪽 벽면의 키 꾸러미를 집어 들었다.

그중 키 하나를 따로 떼어내 두호에게 건네주었다.

“잘해보세.”

두호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한강이 바로 보이는 반포 시민공원.

자전거 도로를 바로 뒤로 둔 벤치에 채호가 앉아있었다.

상의 안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지만 바로 옆에 금연 표지판을 보고는 머쓱한 표정으로 다시 집어넣었다.

누구를 기다리는 듯 채호는 연신 손목의 시계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 남성이 다가오며 채호를 불렀다.

“아이고 대표님!”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은 채호는 고개를 돌리더니 반갑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 국장님 반갑습니다.”

다가온 남자는 김진석.

한국 3대 지상파 방송국인 PBS의 예능국 국장이다.

반가운 듯 보이지만 둘은 오늘 초면이다.

각자의 분야에서 인정받는 두 사람이니 이런 비즈니스 목적이 다분한 웃음은 둘에게는 아무 일도 아니었다.

“처음에 뵙자고 했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스포츠 산업의 거물이신 이 대표님이.”

“하하. 처음부터 이렇게 띄우시면 부끄러워서 일 얘기 못합니다.”

처음 만난 두 남자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은 듯싶었다.

“그런데 왜 이곳에서 보자고 하셨는지?”

사실 김진석은 이런 곳에서 만나는 미팅은 처음이었다.

미팅에 무슨 장소가 특정된 건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사무실이나 아니면 카페 같은 곳이 대부분이다.

한강 벤치라니 나쁘지는 않지만 묘한 기분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다.

“요새 답답한 일이 많으실 것 같아서, 바람이라도 쐬시라고.”

그냥 온 것이 아니다.

이런 장소를 택한 것도 채호의 전략이었다.

영업은 장소 선정부터가 시작이다.

숫자놀음이 중요한 이야기라면 폐쇄적인 곳에서 하는 것이 왕도이고, 완전히 새로운 아이템의 사업제의라면 낭만적인 뷰의 장소가 좋다.

낭만적인 장소에서 야망이 가득 담긴 이야기를 한다면 분위기에 휩쓸리기 쉬우니 말이다.

채호는 조용히 서류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이걸 먼저 읽어보시고. 얘기하시죠.”

김 국장은 말없이 채호가 건넨 서류 봉투를 열었다.

서류 봉투 속 안에 종이를 꺼내 보니 기획서였다.

“PRIDE-K?”

김 국장은 흥미로운 듯 서류를 집중해서 읽기 시작했다.

채호가 PBS의 김 국장을 택한 이유가 있었다.

PBS의 간판 예능 프로의 출연자들이 대거 마약스캔들에 휘말려 시청률에 굉장한 타격이 있었다.

메인 프로그램의 시청률 타격은 곧 PBS의 매출 하락을 의미한다.

빈 공백을 메꾸기 위해 PBS는 다방면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성과는 변변치 않았다.

그리고 채호가 김 국장을 선택한 이유.

그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열린 PD이기도 했다.

자신이 만들어야 하는 격투 오디션 대회의 가장 중요한 점은 자극적이어야 했다.

일반 가요 프로그램처럼 단순히 아름다운 외모와 슬픈 사연으로만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피가 낭자하고 정말 극한까지 몰아붙여야 이 프로그램과 격투기의 매력이 더욱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앞서가는 선택을 두려워하는 피디라면 이 프로그램의 재미는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가장 적합한 방송국은 PBS라고 필린은 판단했다.

“확실히 자극적이네요.”

김 국장은 아이템에 감탄했다.

채호는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보였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필린 밖에 못 한다는 것이 핵심이죠.”

필린 밖에 못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대회 그 이후.

오디션 프로그램은 우승만이 최종 목적이 아니다.

참가자는 모든 것이 끝나고 난 뒤 그 산업의 메이저 회사들의 컨택을 받기 위해 그 오디션을 참가한다.

필린이 아니라면 그 이후의 상황들이 보장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혹시 어느 정도까지 보십니까? 단순히 오디션 프로그램 인기에 편승하려는 것은 아니실테고.”

다시 서류를 건네며 슬쩍 채호를 떠본다.

하지만 채호는 대답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류를 다시 도로 받고는 상의의 단추를 모두 채우며 옅은 미소를 띠었다.

“일 시작하기로 하면 그때 말씀드리죠.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깔끔하게 돌아섰다.

최소한의 카드를 보여주며 상대의 반응을 유도해냈다.

미끼는 훌륭하니 물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채호는 망설임 없이 자리를 떠났다.

채호가 떠난 후에도 김 국장은 한강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목말라 죽겠는데 독이 든 게 무슨 상관이야? 일단 마셔야지.”

상황, 상대, 아이템 삼박자가 완벽했다.

외통수였다.

“아니. 조 여사님. 갑자기 이렇게 일을 접는다고 하시면 우린 어찌합니까?”

수미의 파전집 지하창고에는 서늘한 기운이 맴돌았다.

기름기 번들거리는 얼굴을 한 오십 후반 가량의 개량 한복을 입은 사내가 수미를 노려본다.

흥분한 듯 볼살이 실룩거렸는데 쭉 찢어진 눈에서 냉기가 풀풀 풍겼다.

“이러다 갑자기 검찰이라도 치고 들어오면 내 여생은 감옥에서 보내야 합니다.”

사내의 이름은 모영배.

수미의 과거 현성회의 후배이자 2세대 대부업계의 큰손이다.

그는‘모로해피캐피탈’이라는 대부업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회사 이름에는 해피가 들어가지만, 그에게 돈을 빌린 그 누구도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채를 쓰는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 삶의 마지막 발버둥이다.

그 발버둥을 치는 사람들의 피와 눈물을 먹고 자란 모로 해피 캐피탈.

그가 만들어놓은 수많은 비자금과 잔혹하게 저질러온 불법적인 일들에 증거를 찾기 위해 검찰은 24시간 불을 켜고 있었다.

하지만 수미의 도움으로 인해 번번이 검찰의 수사망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살인, 살인 교사, 폭행 사주, 탈세와 횡령까지 그 모든 증거가 이곳 수미의 백평파전 지하에 숨겨져 있었다.

그렇기에 수미가 지하 은행을 그만둔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 이렇게 부리나케 달려온 것이다.

절대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것과 언젠간 닿을 수 있는 곳에 있는 것.

그 둘의 차이는 극명했다.

수미는 아무 말 없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뭐라고 말이라도 좀 해주시죠.”

수미는 찻잔을 내려놓고는 헛기침을 한번 하더니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보았다.

“이제라도 이런 일을 그만하려고 하니. 이해를 해주세요.”

그러자 모영배는 책상을 강하게 내리치며 수미에게 화를 내었다.

쾅!

“이 노망난 늙은이가. 비싼 돈 받아 처먹었으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할 것 아니야!”

책상이 흔들리면서 영배의 자리에 있던 찻잔이 바닥으로 떨어져 깨졌다.

수미의 은퇴 소식이 소문이라도 난다면 검찰은 순식간에 밀어닥칠 것이다.

벌려놓은 일들의 수습은 고사하고 당장 죽을 때까지 감옥에서 보낼 수도 있었다.

수미는 눈썹을 찡그렸다.

영배는 핏대를 올리며 소리쳤다.

“이러다 잡히면 내 입에서 누구 이름이 먼저 나올 것 같아? 내가 아니라도 당신 고객 중 누구라도 불게 되어있어!”

그렇게 된다면 이 모든 것을 보관했던 수미 역시 심판을 피해 갈 수는 없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수미는 여유롭게 찻잔을 들어 올렸다.

모영배와 자신의 차이는 한 가지다.

능력의 차이.

돈 없는 자들이 고객인 모영배와 돈이 있는 자들이 고객인 수미.

어쩔 수 없이 찾아온 자들과 자신이 필요해 찾아온 자들의 능력 차이.

수미는 한숨을 내쉬며 찻잔을 들어 올린다.

화를 삭이려는 듯 보였는데 영배는 시퍼런 눈을 번들거리며 말했다.

“난 건달이야. 당신 잡아서 고개라도 들고 다니겠어.”

그러더니 영배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수미는 그러든지 말든지 관심 없다는 듯 차를 마시고 있었다.

한 잔의 차는 영혼의 혼미함을 씻고 평정한 마음으로 사물을 본다.

영배는 전화 통화를 끝나고는 만족스러운 얼굴이다.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군.”

금방이라도 수미를 향해 큰 재앙을 내릴 듯 노려보았다.

그렇게 일 분여 지났을까 입구에서 우당탕하며 뭔가 부딪치고 넘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간간이 비명소리도 들려왔다.

“자네. 내기할까?”

수미의 말에 영배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쏘아보았다.

“아이들을 부른 모양인데 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게 당신 아이들일지. 내 아이일지.”

영배는 히죽 웃었다.

처음 들어올 때 수미의 부하들은 많아야 예닐곱 정도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만약을 대비해 대기하고 있는 자신의 수족들은 서른 명이 넘는다.

상식적으로 상대가 될 수 없다.

“큭!”

“아악!”

더욱 큰 비명이 들린다.

“당신 아이라면 오늘 내 목이 날아가겠지. 근데 내 아이라면.”

갑자기 시끄럽던 밖이 조용해졌다.

그리고 계단을 걸어 내려오는 소리가 들려온다.

누굴까.

발걸음 소리가 복잡하지 않은 걸 보면 많은 사람이 내려오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들어선 사람은 얼굴과 옷에 피가 조금 묻은 태건이였다.

태건은 조용히 몇 걸음 나오더니 수미에게 머리 숙여 인사하였다.

“정리 끝났습니다. 어쩔까요?”

충격에 빠진 영배는 조금씩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에는 당혹과 공포가 보였고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수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죽이진 않겠네. 그 아이가 싫어할 테니.”

천천히 걸음을 옮겨 계단 쪽으로 향하였다.

“다 돌려보내고 마무리해.”

태건은 다시 한번 머리를 숙여 대답했다.

“네.”

영배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수미는 계단을 올라 밖으로 나갔다.

사내 한 명이 재빨리 차 문을 열었다.

부우웅!

수미가 탄 차가 가게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두호의 일과는 무척 단순했다.

새벽에 일어나 보육원 뒤에 있는 광덕산 월계봉을 향해 달린다.

산행을 마치고 일곱 시 반쯤 되면 아침 식사를 한다.

식사가 끝나고 간단한 정비 이후 곧바로 줄넘기를 한다.

줄넘기는 쉬지 않고 점심 전까지 이어진다.

점심이 지난 후에는 샌드백을 친다.

줄넘기처럼 샌드백도 저녁 식사 전까지 치는 것이었다.

일과는 거기서 마치지 않는다.

고무 튜브를 이용한 근력 운동이 11시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황성태는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제도, 그리고 오늘도 변함없이 두호의 훈련 모습을 안 보는 듯 하면서도 보고 있다.

어딘가가 불만족스러운지 가끔 눈을 찡그리기도 하였다.

그러는 중 누군가가 황성태를 큰 목소리로 불렀다.

“원장님!”

황성태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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