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6화: 전쟁의 신은 죽었다.
“로...로…. 로드 매니저,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준모는 힘차게 외치며 허리를 구부렸다.
명함은 지나칠 만큼 단출했다.
흰색 바탕에 덩그러니 쓰인 필린 대표 이채호가 전부였다.
하지만 준모의 눈에는 어떤 명함보다 찬란하고 품위가 있었다.
‘내가 필린 취직이라니.’
필린은 스포츠 관련 구직자라면 취업 희망 일 순위인 회사였다.
‘그 말이 진짜 맞네.’
언젠가 집에서 나오자마자 만났던 허름한 흰 옷을 입은 흰 머리에 노숙자 할머니.
‘귀인이 찾아올 테니 그놈 따라가서 살아. 떳떳하게 살게 해줄 거니까.’
그 말에 기어이 천 원짜리 한 장을 내놓고 말았다.
그런데 할머니의 말처럼 두호를 만나고 나서 정신없이 삶이 바뀌고 있었다.
음지에서 양지로, 악에서 선으로, 불성실에서 성실로.
준모는 샤워장으로 들어가는 두호를 바라보았다.
‘저 귀인을 놓칠 수 없지.’
준모의 눈이 불타고 있었다.
샤워를 끝내고 나온 두호는 곧장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통화 연결음이 지나고 걸쭉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십니까?
두호는 헛기침을 하여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YMC 2012입니다. 물건 준비가 되었는지요?
상대방은 말이 없다.
아마 두호가 말한 코드를 입력하여 진위를 확인하고 있을 것이다.
-아, 준비되었습니다. 오늘 오십니까?
“네. 지금 가겠습니다. 한두 시간 걸릴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저희도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전화기를 주머니에 넣는데 채호가 다가왔다.
예수는 채호에게 인사를 하고 뒤이어 두호에게도 가볍게 눈인사를 한 뒤 그대로 밖으로 빠져나갔다.
아마도 퇴근하려는 듯 짐이 꽤 많아 보였다.
채호는 곧장 두호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힘들죠?”
두호는 가볍게 웃었다.
“조금.”
재기를 꿈꿨던 만큼 두호 나름대로 교도소에서 놀고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곳에서 쌓는 체력은 크게 성장하지 않는다.
지금 두호의 체력이란 나이가 주는 것 말고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젊은 체력과 운동선수의 체력은 분명히 틀리다.
“사무실로 들어갈 거니?”
“아뇨. 집으로 갈 겁니다?”
어디 갈 곳 있냐는 시선이다.
“나 좀 따라갈래.”
“어디요?”
“타세요!”
준모가 차 문을 열어놓고 외쳤다.
두 사람은 나란히 뒷좌석에 올라탔다.
어둠이 깔리는 국도를 승용차 한 대가 달리고 있었다.
채호는 옆 좌석의 두호를 흘긋거렸다.
출발한 이후 지금까지 한마디 얘기가 없었다.
“형님!”
직장인에게 칼퇴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비록 회사의 대표인 채호였지만 그 역시 일보다는 집이 더욱 좋지 않겠는가.
그런 자신을 끌고 대체 어디로 가는지 말도 해주지 않는다.
“거의 다 왔다.”
채호는 앞을 보고 옆을 봤지만, 목적지로 보일 만한 것이 없었다.
“너한테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이 하나 있어.”
“그래요? 누군데요?”
“파전집 주인.”
“파전이라면? 철판에 부쳐 먹는 그 파전 말입니까?”
“후회하지 않을 거야.”
파전을 좋아하긴 하지만 정말 느닷없다.
급기야 채호는 피식 웃고 말았다.
가끔 엉뚱한 일을 저지르곤 한다는 걸 알고는 있는데 오늘도 그런 날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십여 분을 더 달려 파전집에 도착했는데 오늘도 손님은 없었다.
일행은 저번에 앉은 자리 그대로 앉기로 했다.
외투를 벗어 빈 의자에 널어놓으며 채호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얼마나 맛있으면.”
조금은 지저분하게까지 느껴지는 가게 안이었다.
기름의 잔향이 남아있어 예민한 사람은 불쾌함을 느낄 것 같은 수준이었다.
하긴 진정한 맛집들은 오랜 역사를 증명하듯 대체로 이렇지,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해 시켜.”
두호의 말에 채호가 큰 소리로 말했다.
“저기요!”
그러자 주방 안에서 수미의 부하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두호는 피식 고개를 돌리며 웃었다.
얼굴에 붓기는 많이 빠졌지만, 여전히 완쾌되지는 않은 듯한 얼굴이었다.
“아이고. 오셨습니까?”
사내는 호들갑을 떨며 탁자 위에 물 잔을 놓았다.
두호는 사내에게 물었다.
“이모는요?”
“아래 계십니다. 같이 가실까요?”
“빨리 왔구나.”
그때 수미가 주방에 나타났다.
오늘은 뿔테 안경을 쓰고 앞 전과 달리 화사한 얼굴이다.
선반에 놓인 막걸릿잔 몇 개를 쥐고 냉장고에서 막걸리 두 병을 꺼내 온다.
수미 뒤를 사내들이 줄줄이 따라 들어온다.
채호는 수미가 오자 벌떡 일어났다.
어른을 맞는 아래 사람의 예의로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채호가 일어선 건 예의를 차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가게 안 공기가 급격히 달라진 걸 감지한 행동이다.
분명히 위험한 사내들이었다.
수미를 따라 들어온 사내들도 매한가지였다.
처음 본 채호의 얼굴이 어딘가 거슬리는지 시선을 모았다.
“형님?”
채호는 조심스럽게 손목의 시계를 풀어 책상 위에 천천히 올려놓았다.
“앉아도 돼.”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담보였다.
“앉아.”
재차 말하자 채호는 못 이긴 채 앉았고 사내들도 자리를 잡았다.
그렇다고 공기까지 부드러울 수는 없었다.
금방이라도 서로에게 달려들 듯 아슬아슬한 분위기가 지속 되었다.
위험한 사내들을 경계하는 채호.
자신의 보스가 처음 보는 사람과 만나게 된 부하들.
두 이해관계가 충돌하며 긴장감은 굉장히 팽팽해졌다.
수미는 그 상황을 정리하려 괜스레 준모를 쳐다보았다.
“이놈은 여전히 쭉정인데, 저 친구는 한 인물 하네.”
밑반찬을 주섬주섬 주워 먹던 준모의 이마가 찡그려졌다.
“아이씨, 쭉정이라뇨.”
“이 상황에서 어묵이나 주워 먹는 놈이 너밖에 더 있냐?”
멍청한 놈아 눈에 보이지 않지만 지금 서늘한 대치가 이뤄지고 있다는 걸 알기나 하느냐는 눈빛이다.
하지만 그런 뜻을 전혀 모르는 준모는 오히려 눈을 흘겼다.
“음식이 있으면 먹어야죠. 이상한 할머니네.”
딱!
수미가 준모의 이마를 때린다.
“왜 때려요!”
준모는 금방이라도 수미를 팰 것처럼 노려보았다.
“눈에 힘 풀어라.”
수미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정말 식은땀을 흘릴만큼 삭막한 표정이었다.
사내들의 시선이 채호에게서 준모로 옮겨갔다.
부하 중 한 명이 자신의 옆에 있던 의자를 살짝 들어올렸다.
그 모습을 본 준모는 잠시 멍해졌다.
그리고는 어이없다는 듯 웃어 보였다.
“하. 진짜.”
쨍그랑.
“차키를 언제 떨어트렸지? 내 정신 좀 봐. 이 멍청이!”
준모는 소리나게 자신의 머리를 쳐대며 책상 아래로 고개를 숙였다.
“이모 처음 보죠?”
두호는 채호를 돌아보았다.
“이름은 이채호. 이 친구도 옐로우 맘바 출신이에요.”
채호가 깜짝 놀란다.
“잠시만요!”
과거는 덮어져야 한다.
과거는 채호의 미래에 결코 도움으로 작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회사 대표가 과거 누군갈 죽이는 것을 업으로 살았단 것이 들통나면 좋을 것이 없다.
“무슨 국정원도 아니고, 어때서?”
두호의 말에 채호는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듯 반쯤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그런 얘기를 굳이 이런 자리에서 해야 하느냐고 하려다 생각 없는 두호가 아니라는 걸 떠올렸다.
“옐로우 맘바? 반갑네. 나도 거길 좀 알아.”
주르륵!
수미는 자신의 잔에 막걸리를 채웠다.
채호는 수미의 말에 놀란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
“실례지만 옐로우 맘바랑 어떤 관계신지?”
“래진 아저씨 쩐주야.”
두호가 말했다.
수미는 막걸리를 단숨에 비웠다.
그리고는 부하들 쪽을 한 번 돌아보며 눈짓을 주었다.
“뭣 들해, 다들 한 잔씩 하고,”
그제야 사내들은 서로 술잔도 주고받고, 채호 또한 완전히 긴장을 푼 기색이 보였다.
“받아.”
두호가 재빨리 두 손으로 잔을 내밀었다.
콸콸콸!
수미는 막걸리를 따르며 말했다.
“격투긴지 뭐시기는 잘 돼가고?”
멈칫!
막걸리를 마시려던 채호가 고개를 돌렸는데 두호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어디까지 얘기했느냐는 항변이다.
굳이 비밀로 할 건 아니지만 떠들고 다닐 일도 아니다.
프로스포츠에서의 비밀은 판돈의 한 부분.
그래서 거물 에이전트들은 일부러 자기 회사 소속의 선수에 대해 철저히 함구한다.
“채호라고 했나. 너무 비밀이 많은 것도 신뢰를 주지 못하는 법이야.”
잔을 비운 수미가 자신의 술잔으로 준모의 머리를 때렸다.
“아 진짜?”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려던 준모가 눈을 부라렸다.
“할머니 자꾸 이러시면 확 그냥.”
준모가 외투를 벗는 시늉을 하였다.
“네놈이 처마시면 운전은 누가 하냐?”
번쩍!
준모의 눈이 커졌다.
“앗! 내가 지금.”
준모는 재빨리 잔을 내렸다.
“죄송합니다. 술잔만 보면 서둘러 비우려는 버릇이 있어서.”
“받아!”
두호가 준모의 손에 든 병을 빼앗았다.
“운전해야 합니다.”
병을 준모의 앞에서 살짝 흔들며 준모가 잔을 들길 기다렸다.
“대리 부르지 뭐.”
“오오! 대리.”
준모는 가득 채워준 잔을 단숨에 비웠다.
“형님 잔 받으세요.”
큰 소리로 말하며 일어나 술을 따른다.
두호는 말없이 잔을 받고 나서 수미를 바라보았다.
“잔금은 맞춰졌습니까?”
“그럭저럭.”
수미는 하얀 중지와 엄지 손가락으로 안경을 밀어 올렸다.
“너를 마지막으로 이 장사 접을까 한다.”
음지 은행 일에서 손 턴다는 뜻이다.
타탁!
“도혁이 놈에게 빚을 갚는다는 마음으로 널 도와줄 거야.”
수미는 사뭇 진지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고민하였다.
평소에도 다 늙어서 무슨 욕심을 더 내겠는가라고 생각한 그녀였지만 두호의 등장으로 달라졌다.
마지막 불꽃을 태울 때가 온 것이라고 느꼈다.
“잘해봐.”
두호는 아까부터 계속 궁금해하는 채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 이분은.”
두호는 수미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두호에게 얘기를 듣고 난 후 채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단정하게 허리를 구부린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이채호입니다.”
그제야 자신의 명함을 꺼내 준다.
수미는 명함을 받아 보며 말했다.
“요새 잘 나간다는 이 대표구먼. 여긴 어쩐 일인가?”
채호에게 묻는다.
채호는 두호를 바라보았는데 형님이 말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눈치다.
“여기 이모가 계산이 빨라.”
사업 수완이 좋다는 힌트였다.
그러니 네가 설명해라.
기다렸다는 듯 채호는 자신의 격투기 사업 계획을 말하기 시작했다.
두호라는 캐릭터와 실력을 무기로 세계무대로 나가려고 함을 알려주었다.
채호의 이야기를 듣고 난 수미는 채호에게 술을 권했다.
“나쁘지 않아.”
“감사합니다.”
하지만 수미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그렇다고 좋지도 않네. 평범해.”
채호는 조금 더 설명을 바라는 시선을 던졌다.
“흥행이 성공하려면 제일 중요한 것이 뭐던가? 대중의 시선을 끌어모아야지.”
채호는 눈을 빛냈다.
“프로는 마케팅이야.”
안다.
문제는 마케팅도 전략이 필요하다.
“굳이 한마디 거든다면 대회를 만드는 게 어떤가.”
채호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수미는 채호의 잔을 가득 따라주었다.
“사람 한 명 띄우는 것보다는 대회에서 배출된 우승자를 띄우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않겠나? 경험 만들기도 편하고.”
명쾌한 수미의 말이었지만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자본적으로도 상당히 부담되는 일이기도 했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이쪽에서 우승자를 배출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짜고 친 고스톱을 만들다 자칫 비밀이 빠져나가기라도 한다면 필린은 격투기 사업뿐만 아니라 다른 업종까지 셔터 내려야 한다.
“어쨌든 한국에 다른 에이전시는 힘들겠지만 필린이라면 될 것 같은데?”
수미의 칭찬이다.
자신은 있다.
메이저 스포츠 대회를 개최하는 것은 여러모로 부담이 있으나 못할 것도 없다.
단지 격투기 대회만큼은 경험이 일천하다는 것이었다.
“근데 말이야. 이런 계획도 자네가 우승해야 좋은 계획 아닌가?”
수미는 채호의 마음을 아는 듯 두호를 보며 싱긋 웃었다.
두호는 가득 채워져 있는 자신의 잔을 한입에 비워냈다.
“그때 보여준 게 부족했었나 보네요.”
그 정도면 우승 후보 자격으로 넘치지는 않아도 모자랄 만큼은 아니지 않느냐는 뜻이다.
그러면서 두호는 수미의 부하들을 훑었다.
움찔!
두호와 눈이 마주친 사내들이 감전된 듯 놀란다.
주먹을 아는 사람일수록 자신을 이긴 사람에 대한 두려움은 크다.
사내들은 재빨리 두호의 눈길을 외면하며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다.
“흠. 조금 덥나 여기가?”
“맞아. 더운 것 같아. 잠깐 바람이나 쐬고 올까?”
두호가 웃었다.
딸랑!
그때였다. 입구에 달린 풍경이 흔들리는 소리에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건장한 사내 한 명과 진한 인상의 사내가 들어온다.
앞서 걸어들어오는 사내는 젊은 나이었지만 멋지게 기른 콧수염과 단정한 정장 차림으로 세련되어 보였다.
하지만 뒤에 따라온 남자도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데 얼굴에 표정이 없다.
그래서 인지 분을 바른 듯 약간은 창백하게도 보였다.
어딘가 위험해 보이는 두 사람이 가게 안으로 들어오자 순간 실내 분위기가 다시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