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화: 전쟁의 신은 죽었다.
거품을 물고 쓰러져 있는 호준과 케이지 한쪽 벽면으로 터벅터벅 걸어가 기대어 서는 두호였다.
두호의 얼굴은 여전히 덤덤했다.
주먹을 주고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약간은 멋쩍기도 한 모양인지 눈을 깜빡거렸다.
채수는 재빨리 뛰어가 호준의 상태를 체크 해보았지만 이미 의식을 잃었다.
입 주변에는 약간의 거품이 물려있었다.
지켜보던 모두가 당황하여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호준아! 정신 좀 차려봐!”
채수가 다급하게 고개를 들어 뺨을 툭툭 건드리니 호준이 부르르 떨며 초점이 잡혔다.
“이게 무슨 일이래. 정신이 좀 드니?”
호준은 눈을 끔뻑거렸다.
아직 충격이 회복되지 않아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어우. 어으 어떻게 된 거야.”
채수는 빠르게 뛰어가 한쪽 벽면에서 촬영하고 있던 카메라를 떼어냈다.
녹화된 화면을 찾아 거꾸로 돌렸다.
채호도 다가왔는데 그 역시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 재확인이 필요했다.
탁현이 케이지 안으로 뛰어들었고 쓰러진 호준을 챙겨 링을 벗어났다.
그 뒤로 두호가 계단을 밟고 걸어 내려온다.
채수와 채호는 녹화된 조금 전 상황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처음 파이트 선언을 한 채수가 등을 돌리자 호준은 애초에 살살할 생각이 없었는지 이를 악물고 낸 펀치가 두호를 향해 찔러 들어갔다.
두호는 그 펀치를 피하거나 하지 않았다.
자신의 앞 손으로 찔러 들어오는 펀치를 아래쪽으로 살짝 쳐내었고 뒤이어 오른손 스트레이트를 거침없이 찔러 넣었다.
다시 한 발자국을 내밀며 왼손 훅을 그림 같이 얼굴에 명중시켰다.
그것이 전부였다.
이 모든 게 눈 깜짝할 새에 일어났을 뿐.
“다시 돌려봐.”
채호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재촉했다.
채수가 다시 리와인드 하여 화면을 보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바뀐 건 없었다.
호준은 쓰러졌고 지금 꼴이 된 것이다.
호준은 웰터급에서 떠오르는 신인으로 5연승을 달리고 있는 선수였다.
프로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신인을 펀치 두 방으로 기절시킨다는 것은 일반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채수의 눈은 두호에게 돌아갔다.
표정은 덤덤하지만, 채수의 가슴속은 뜨겁게 끓어 올랐다.
‘저 사람 뭐지?’
꿀꺽 침을 삼켰다.
‘앞 손으로 펀치를 패링 해냈고 곧바로 오른손 카운터. 그 이후로 결정타를 찔러넣기 위한 전진 스텝 후 왼손 훅으로 끝. 이미 오른손 카운터에서 끝난 건데. 그냥 한 방 더 먹인 거지.’
그 사이 채호는 슬며시 두호에게 다가가 옆에 앉았다.
“이게 뭔 일이래요?”
두호는 능청스럽게 답했다.
“내가 잘못한 겁니까?”
채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전혀요.”
두호는 옅은 미소를 띠었다.
코치진들과 구경하던 갤러리들은 패닉에 빠졌다.
서로 영상을 돌려보았고 이 장면을 확인한 탁현은 크게 웃으며 손뼉을 쳤다.
“야! 땡이 부끄럽다.”
종이 울리자마자 상황이 끝난 것이다.
채수는 핸드랩을 풀고 있는 두호를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다 예상을 했던 거겠지.’
그리고 돌아선 채수가 자리에서 벗어나던 채호를 향해 다가갔다.
“형 어디가, 잠깐 얘기 좀.”
채수는 자기 말을 듣지 못하고 밖으로 걸어가는 채호의 뒤를 빠르게 쫓아갔다.
“잠시만.”
“왜?”
“형, 잠깐 얘기 좀 하자.”
채수는 채호를 데리고 회의실로 사용될 방으로 들어왔다.
“뭔데?”
“형. 쟤 처음이라며?”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돼? 호준이 걔 웰터급에서 지금 막 주목받기 시작한 애야.”
“아까 말해줬잖아.”
“두호 군보다도 평체가 한 체급이 높고.”
“알아.”
“형 내 말 진지하게 듣는 거야? 지금 보통 사태가 아니라고.”
“사태는 무슨? 보기만 좋던데.”
“미쳤다. 진짜.”
채수는 숨을 들이마셨는데 감정을 진정시키려는 것이다.
조금 차분해진 채수는 문 쪽을 가리켰다.
“형은 저런 애를 어디서 데려온 거야?”
“좋냐?”
“형도 눈 있잖아.”
채호야 싸움이라면 전문가 수준이지만 스포츠는 다르다.
격투 스포츠에 대한 실력을 묻는 것이다.
채수는 자신이 직접 자세를 잡았다.
“잘 봐!”
채수는 채호를 뒤로 밀었다.
“형 나랑 마주 보고 서봐.”
“이렇게!”
채호가 마주 섰다.
“상체를 약간 틀어서. 좋아 그 상태에서 형이 나를 향해 잽을 내봐.”
채호가 주먹을 느리게 뻗었고 채수는 설명을 이어 나갔다.
“보통 여기서는 판단은 두 가지야. 서로의 전력을 모르는 상태니, 탐색전을 시도하는 거지. 자신보다 높은 체급의 사람이 내는 잽이니 커버링을 바싹 올리던가 스텝을 뒤로 물린다고.”
“그…. 그렇겠지.”
“근데 쟤는. 그 펀치에 반응해서 끊고 빈틈을 만들었어. 직접. 그것도 부족해서 마무리까지 지었다고. 운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프로를 상대로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확실히 채수의 설명을 들으니 두호의 움직임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었다.
채수의 표정은 흥분되어 있었다.
“킥을 못 본 게 아쉽긴 하지만 쟤는 진짜야. 미쳤다. 심지어 한 체급 위를 실신시켜버리네.”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채호는 대답 없이 방문을 열고 나갔다.
채수가 형이라고 비위 맞추기 위해 말을 만들어 내는 아이는 아니다.
거대한 금맥을 발견한 광부의 얼굴이다.
채호의 가슴에 남아 있던 일말의 염려는 사라졌다.
채호는 가볍게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있는 두호를 보며 한쪽 눈을 찡그렸다.
이어 사람들에게 말했다.
“자자. 다음 테스트 바로 진행합시다. 채수야 넌 호준씨 치우고. 탁현님. 두호군 한 번 더 준비하세요.”
탁현은 망설임 없이 그 자리에서 바로 윗옷을 벗었다.
한쪽에서 뒷짐 지고 구경하던 주민이 고개를 돌리며 미소 지었다.
“이야. 탁현이가 나서는 거야? 직접?”
아시안게임 은메달리스트 레슬러.
이 한 줄만으로도 탁현의 가치는 입증될 것이다.
그는 중량급 탑 티어 레슬러다.
조금 전 상황으로 인해 탁현 역시 두호에게 굉장한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재능 있다더니. 제법이네. 그래플링은 어떨지 한 번 볼까?’
두호는 스트레칭을 멈추고 탁현을 보았다.
처음 봤을 때도 다부진 체격이었는데 옷을 벗으니 더욱 화려하다.
유명 조각상처럼 다듬어진 그의 몸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기가 죽을 정도였다.
탁현은 격려하듯이 두호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자 올라오시죠. 두호 군.”
글러브를 벗은 두호는 말없이 케이지 안으로 재입장했다.
탁현이 직접 두호에게 규칙에 관하여 설명했다.
“저의 기술들을 방어하시거나 틈이 보이시면 공격을 해주시면 됩니다.
타격 없이 그래플링으로만 할게요. 힘드시거나 기술에 걸리셔서 아프시면 탭을 치시면 됩니다. 점수 없이 딱 한 라운드만 진행할게요.”
탁현의 설명에 두호는 옅은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틈이 보이면 공격을 해달라니. 메달리스트 상대로 버티기만 해도 미친 거지. 진짜 너무하네.’
두호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조용히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다시 라운드 종이 크게 울렸고 둘은 2미터 정도의 거리를 두고 대치했다.
조금 전과는 다르게 두호는 자세를 낮춰 무게 중심을 아래로 이동했다.
그 모습을 본 탁현은 마음속으로 의아해했다.
‘아예 모르진 않는가 보네.’
가벼운 대치 상황을 먼저 깬 것은 탁현이었다.
그는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두호의 왼 다리를 잡아채며 싱글 레그 태클 (레슬링에서 한쪽 다리를 잡아챈 상태로 거는 하단 태클)을 시도했다.
두호는 자신의 왼 다리를 잡아챈 탁현의 어깨와 목덜미를 강하게 눌렀다.
탁현은 역시 탑 그래플러답게 자신의 어깨를 누르는 힘도 무시한 채 밀어붙였지만, 두호는 신중히 뒷걸음질을 치며 나름 잘 방어해내고 있었다.
‘태클 방어는 조금만 손 보면 될 것 같고. 그럼 이거는.’
탁현은 미끄러지듯 자신의 어깨를 누른 두호의 팔 바깥쪽으로 빠져나가더니 어느새 등 뒤로 돌아 끌어안았다.
탁현은 허리를 튕겨 두호를 가슴 위치까지 높게 들었다.
빠르게 상체를 비틀어 두호를 그대로 땅에 내려다 꽂았다.
교과서 같은 안아 던지기였다.
쾅 소리가 나며 두호는 바닥에 떨어졌고 탁현은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엇!’
생각과는 달리 몸이 실전처럼 반응해 버린 것이다.
아무리 완충재가 깔린 바닥이라고는 해도 이 정도의 슬램(바닥으로 내려쳐지는 것)은 위험하다.
태클과 등을 안았을 때 두호가 주는 느낌은 굉장히 낯설었다.
그러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더욱 공격적인 동작이 나오게 되었다.
하지만 절대로 시원하게 잡아챈 느낌이 아니었다.
탁현은 흘긋 링밖에 채호의 눈치를 살폈다.
채호의 표정은 뜻밖에 담담했는데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
“안 끝났어. 아직.”
탁현은 무슨 말인지 몰라 채호의 손가락을 따라가 시선을 옮겼다.
두호는 어느새 무릎을 꿇은 채 탁현을 쳐다보며 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시 하시죠?”
탁현의 염려와 달리 두호는 전혀 다치거나 충격받아 보이지 않았다,
탁현 역시 두호의 표정을 보더니 달아오른 듯 했다.
서로가 잠시 재정비를 마친 후 테스트는 다시 재개 되었다.
여전히 두호는 탁현의 공격을 방어해내기 급급했다.
하지만 탁현 또한 확실한 공격포인트가 없었다.
레슬링이나 주짓수의 움직임을 알고서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자기 몸에 대한 이해도가 좋은 느낌.
서로의 목을 붙잡은 상태에서 잠시 고착되었다.
“그래플링 해본 적 없는 거 맞아요?”
“네.”
탁현은 아닌 것 같은데 하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많이 해본 솜씨 같아요. 하하.”
정말로 두호는 정식으로 그래플링을 배워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용병 시절 수도 없는 근접전투를 겪으며 자신만의 기술이 생긴 것이다.
정석적인 대처는 아니어도 실전적으로 사용이 가능한 움직임이었다.
‘레슬링은 몸을 잘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하지.’
자기 상체를 비틀며 공간을 만들어 빠져나오고 목이 잡혔을 때는 상대의 손목을 움켜쥔 채 버텨내었다.
어느새 두 사람의 이마에서는 땀이 뚝뚝 떨어졌다.
엄청난 공방이 이어지던 중 곧 라운드가 끝나는 종이 울렸다.
땡!
두호는 탁현을 향해 정중하게 잘 배웠다는 인사를 했다.
탁현이 그에게 다가와 말했다.
“괜찮아요?”
“죽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땀으로 범벅이 된 두호의 얼굴은 그다지 위기 상황을 넘긴 표정이 아니었다.
탁현은 케이지를 내려가는 두호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덜컹!
체육관 문이 열리더니 준모가 들어섰다.
한 손에는 검정 봉지를 들고 있었다.
“여러분 목 좀 축이면서 하시죠.”
준모는 봉지에서 음료를 꺼내 한 개씩 나눠주었다.
“땡큐!”
“감사요!”
여기저기서 고맙다는 인사들이 터져 나왔다.
“우리 대표님도 하나 받으시고!”
준모가 음료를 내밀자 채호는 음료를 건네받으며 빙긋 웃었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준모는 생긋 웃으며 지나갔다.
채호는 무엇인가 생각이 난 듯 준모를 불러세웠다.
“잠깐, 준모씨.”
“네?”
준모가 고개를 돌렸다.
“원래 다른 일을 하셨다면서요? 얘기 들었습니다.”
준모는 쑥스러운 듯 웃었다.
그 모습을 본 채호는 빙그레 웃었다.
“다른 일이라고 하기엔 과거가 좀 부끄럽다고나 할까요.”
“요새 두호 형님께서 신세 많이 진다더군요?”
“전혀 아닙니다. 제가 좋아서 하는 일입니다. 제 은인이나 마찬가지거든요.”
준모의 엄숙한 태도에 한쪽에 있던 예수가 풉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슥!
채호가 명함을 내밀었다.
“앞으로는 필린 식구로서 일하시죠. 지금처럼 책임감을 느끼고 두호 님 로드 매니저로 일해주세요. 계약서랑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사무실에서 하고.”
준모의 눈이 커지며 입은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