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화: 전쟁의 신은 죽었다.
체육관에 대해 모르는 것이 아니다.
자신 또한 운동을 좋아했고 두호의 권투 선수 기억이 있으니 누구보다도 잘 안다.
두호가 운동했던 곳은 초라했다.
복싱 시장이 침체에 빠져 있다는 걸 보여주기라도 하듯 작은 링과 함께 샌드백이 전부였다.
거기에 덤벨과 바벨들은 녹이 슬어 사용할 때마다 듣기 힘든 소음이 나곤 했다.
그런데 지금 보는 체육관은 아예 다르다.
300평은 족히 넘어 보이는 넓은 공간에 한쪽 벽면은 선수들이 언제든지 자신의 자세를 살피고 교정할 수 있도록 전신 거울이 붙어있었다.
바닥은 주짓수 매트가 깔렸고, 천장은 선수들이 훈련 도중 피로감을 덜 느끼도록 하기 위해 밝은 계열의 조명을 달았다.
벽 쪽으로는 기초체력 훈련을 다지는데 필요한 덤벨과 벤치프레스, 러닝머신, 스텝터 등 많은 기구가 줄지어 있다.
또한 형형색색 온스 별로 글러브들도 가지런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채호가 설명했다.
“구기종목 분야는 우리가 앞서가지만, 격투기는 신생 후발주자죠. 그래서 코치진들의 조언을 받아 갖춘다고 갖췄는데 마음에 들지 모르겠습니다.”
채호는 천천히 체육관을 돌아다니며 각종 훈련 기구들을 설명했다.
“여긴 웨이트 공간입니다. 테크노사에 나와 있는 웨이트 기구들을 전체 사들였고요. 쓰실지는 모르겠지만 파워랙과 파워 리프팅 존도 갖춰 놓았습니다.“
옆으로 러닝머신과 사이클이 있다.
고개를 돌리던 두호의 시선이 한 곳에 멈췄다.
계속 눈이 가는 물건이 있었다.
사이클과 비슷한데 앞바퀴가 매우 컸고 안에는 선풍기처럼 날개가 달려있었다.
두호의 모습을 본 주민이 귓속말로 설명을 덧붙여주었다.
“이것은 에어 바이크라는 기구입니다. 작은 충격으로 전신 운동을 할 수 있게 고안된 바이크로 외국에서는 투기 종목에 특히 많이 쓰이는 유산소 기구죠.”
채호의 설명은 이어졌다.
“이곳은 컨디셔닝 존입니다. 스트레칭과 유산소 운동 그리고 물리치료도 가능하도록 베드 하나를 갖춰 놓았습니다.”
채호는 맞은편 닫힌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곳에 거대한 케이지가 있다.
“여기는 이곳의 정체성인 케이지입니다. 실제 XFC 정식 규격에 맞게 설치했습니다. 실전과 똑같은 훈련을 할 수 있을 겁니다.”
그 외에도 회의실, 샤워실, 운동 중 피로할 때 잠깐 쉴 수 있는 간이 휴게실까지 잘 갖춰져 있었다.
체육관을 살피고 회의실로 들어선 일행들은 모두 잠깐 이야기를 나누려 했다.
그 순간 누군가 문을 노크했다.
똑똑!
모두의 시선이 입구로 향하고 채호가 입을 열었다.
“누구시죠?”
문밖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진예수입니다!”
“예수님?”
채호가 이름을 부르는 것에 웃음이 나올 뻔한걸 억지로 참아낸 준모였다.
‘풉. 주님이네.’
채호는 재빨리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여자 한 명이 서 있었다.
“어서 오세요. 그러잖아도 기다렸습니다.”
채호는 여자와 악수하며 반갑게 맞았다.
“여러분 오늘 손님이 또 한 분 오셨습니다. 앞으로 두호 군의 일정을 담당해주실 진예수 매니저님입니다. 예수님 인사해요.”
예수는 생긋 웃었다.
“진예수입니다.”
한편 준모는 눈을 비볐다.
비비고도 모자라 이번에는 인상까지 쓰며 예수를 바라보았다.
‘틀림없다.’
준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체육관의 엄청난 시설에 시선이 뺏긴 두호는 들어오는 예수를 확인하지 못하였다.
“형님. 형님. 저분….”
두호는 왜 그러냐는 듯 예수라는 여자에게 시선을 돌리더니 준모와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어?”
며칠 전 교통사고 현장에서 본 그 여자였다.
“형님 예수님이래요. 그날 보니 이름이랑은 딴판이던데?”
두호는 준모의 말에 웃음이 나올뻔한 것을 겨우 참아내었다.
채호가 예수에 대한 설명이 보충되었다.
“또한 우리 필린 격투기 사업을 총괄하는 매니저 일도 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는 웃었다.
“미국 일리노이에서 스포츠 산업 관련 공부했고 그쪽 MMA 일을 조금 보았죠. 오늘부터 여러분과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인사를 마친 예수는 한 사람씩 눈을 마추며 악수를 했다.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 한 분야의 전문가다웠다.
그런 모습에 모두가 빙긋 웃으며 환대했다.
그리고 예수는 두호와 손을 잡았다.
“반갑습니다.”
어딘가 기억이 남는 사람의 얼굴이기에 예수가 흠칫했다.
잠시 후 정체가 기억이 났다.
차 안에서 뭘 보냐고 쏘아붙였던 그 남자다.
“아, 안녕하세요. 그때 제가 조금…. 하하.”
예수는 쑥스러운 듯 어색하게 웃었다.
두꺼운 입술에 눈이 부실 만큼의 하얀 피부, 특히 동양계인데도 파란 눈동자는 굉장히 이국적이었다.
거기에 검은색 정장 바지와 하얀 블라우스는 그녀의 독립적인 이미지의 매력을 한층 끌어올렸다.
겉모습만 봐서는 격투기 관계 사업에 발을 담글 여자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두호의 머릿속에는 그날 아침 건장한 사내를 자유자재로 요리하던 모습이 생생했다.
마지막으로 악수를 나누는 준모가 하도 웃자 사람들이 눈을 크게 떴다.
“아저씨 그만 웃어요.”
참다못한 예수가 인상을 썼다.
“아, 예!”
준모는 머리를 꾸벅하면서도 여전히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킥킥 거린다.
결국 궁금한 듯 채호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준모는 기다렸다는 듯 목소리를 높이고 양손을 지휘하듯 흔들어가며 그날의 일을 설명했다.
사무실은 삽시간에 웃음바다가 되었고 예수는 조금 어색한 듯 손가락으로 뺨을 긁었다.
*
예수가 나타나면서 체육관 공기는 밝아졌다.
안쪽 탈의실 문이 열리고 운동복 차림의 예수가 걸어 나왔다.
“두호씨, 테스트에 앞서 간단한 신체검사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는 두호의 몸을 대충 훑는다.
“인바디부터 재보도록 할게요. 저희가 훈련을 시작하기 전 두호 씨의 정확한 신체 정보를 알아야 해서요”
두호는 알겠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 윗옷 벗고 이쪽에 서 보세요.”
두호는 망설임 없이 웃옷를 벗고 측정기 위에 올라섰다.
모든 코치진이 진지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몸을 알아야 계획할 수 있다.
드르르르!
잠시 후 소리가 울리며 종이 한 장이 뽑혀 나왔다.
주민은 종이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코치들과 예수는 주민의 뒤로 다가가 어깨너머로 측정지를 흘긋거린다.
“체지방이랑 근육량 자체는 괜찮네요.”
근육량에 대한 정보를 듣고 난 후 탁현과 채수는 조용히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의 반응은 나쁘지 않은 듯 했다.
예상외로 잘 관리 된 몸에 그들은 오히려 놀란 것 같았다.
운동을 거의 그만둔 상태라고 들었었다.
하지만 이 정도면 자기관리에 제법 철저한 사람에게서 볼 법한 수치였다.
“평소에도 운동을 열심히 하셨나 봅니다.”
일제히 두호를 돌아본다.
다시 한번 몸을 보려는 것인데 그때까지 두호는 상의를 걸치지 않고 있었다.
완벽한 몸은 아니었지만 잘 붙은 근육에 탄력 있어 보이고 부드러운 몸이었다.
주민에게 종이를 건네받아 제대로 확인하게 된 예수는 싱긋 웃어 보였다.
“관리를 잘하셨어요!”
두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 몸은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었다.
과거 두호가 교도소에서 어떤 심정으로 운동을 했는지를 알기에 그저 침묵했다.
칠흑 같은 바닥에서 밝은 태양을 바라보려 했던 두호였다.
“키 183.4 에 몸무게 74, 확실히 미들급 지향 선수치고는 프레임이 작긴 해요. 훈련 진행 경과를 지켜봐야 알겠지만 조금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두호 또한 인정하는 반응이었다.
“자 그럼 저는 식단과 운동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있을 테니 테스트를 시작하시죠.”
주민은 그대로 결과표를 들고 직원 두 명과 함께 회의실로 들어갔다.
이제 코치들이 나설 차례였다.
채수가 크게 박수를 몇 번 치고는 두호의 시선을 끌었다.
“자 이제. 테스트 준비하겠습니다. 두호 군 입식 격투기 룰은 아세요?”
두호는 고개를 저었다.
“자 입식 룰은 킥복싱 룰로 진행이 될 겁니다. 복싱룰과는 좀 다르니 잘 들으셔야 해요.”
두호의 옆으로 다가온 채수는 자연스럽게 케이지 쪽으로 안내하였고 걸어가며 규칙에 대해 말해주었다,
단체별로 국가별로 킥복싱룰은 천차만별이다.
하지만 테스트를 위한 것이니 위험성은 최대한 배제한 룰을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지금 룰은 팔꿈치를 제외한 잽, 원 투, 어퍼컷, 스트레이트 등 복싱의 룰을 그대로 따라요. 하지만 킥은 모든 게 허용되죠. 다운되어 10초 이상 일어나지 못할 경우 KO로 판정되고요. 심판의 재량으로 10초 안에 못 일어날 것 같으면 KO 선언합니다. 아시겠죠? 자 여기서 핸드랩 감고 진행하겠습니다.”
이어 채수는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자신이 섭외한 선수를 데리러 간 것이다.
그 사이 채호는 핸드랩을 감고 있는 두호 옆에 털썩 앉았다.
“괜찮겠어요?”
두호는 왜 그러냐는 듯 채호를 쳐다보았다.
“스포츠룰로 해보시는 건 처음이잖아요.”
“테스트인데 뭐.”
전혀 긴장한 표정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는지 채호는 두호의 어깨를 주무르고 있었다.
잠시 후 채수는 한 사내와 함께 등장했다.
“자 소개하겠습니다. 일본단체에서 활동 중인 제 후배입니다. 인사드려.”
“박호준이요.”
불량한 고등학생을 보는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떡하니 벌어진 어깨는 그가 운동에 관해선 상당히 진지한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지켜보던 사람들의 눈살은 찌푸려졌다.
박호준은 목을 좌우로 소리 나게 돌리며 건들거렸다.
두호 기를 꺾겠다는 의도적 행동이다.
짝짝!
박호준은 껌까지 씹으며 두호를 바라본다.
“진짜 이런 얼치기랑 붙으라고요?”
“호준. 말조심!”
호준은 끊임없이 두호를 무시하는 시선을 보냈다.
“웰터급으로 활동하고 있는 친구입니다, 평균 체중은 미들급 정도 되니 어느 정도 맞을 겁니다. 호준 너도 준비하고 올라와.”
채수가 호준의 등을 밀었다.
“아 밀지 마요.”
호준은 여전히 건들거리며 탈의실로 들어갔는데 그 틈을 이용해 채호는 채수에게 다가왔다.
채호는 이해가 되지 않는듯한 표정이었다.
“야 인마. 라이트급 사람을 데려오라니까 웰터를 데리고 오면 어떻게 해?”
채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체급 차 알려주려고. 이렇게 체급 차가 극복하기 힘들다는 거 알려줘야지 그래야 미들급 접을 거 아니야.”
채수의 의도를 들은 채호는 눈을 빛냈다.
자신의 속마음을 훤히 읽고 있는 듯 보인다.
사실 지금 두호의 체구에서 미들급은 너무 위험하고 힘든 길이었다.
부상 위험뿐만 아니라 자신보다 훨씬 크고 무거운 상대들을 상대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바지만 갈아입고 나온 호준은 두호를 슬쩍 쳐다보고는 비웃기 시작했다.
“얼씨구. 눈빛은 챔피언이네.”
도발에도 두호가 말없이 바라보자 잡아먹을 듯한 눈빛을 보였다.
“조용히 해. 인마. 핸드랩 감고 링이나 올라가.”
채수 또한 호준의 태도에 인상을 찡그리며 등을 떠밀었다.
“네에네에.”
두호는 말로 도발하는 호준을 덤덤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자 셋업!”
링 위로 올라선 두호와 호준 그리고 심판을 맡게 된 채수였다.
호준은 링에서도 입을 가만 놔두지 않았다.
“형 뭔 일 생기면 내 책임 아냐?”
“뭔 일?”
“아니 내가 실수로 죽이면 어떡해.”
“그런 일 없을 테니 걱정 말고.”
두 선수의 한쪽씩 팔을 잡은 채수는 번갈아 보며 주의사항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버팅, 로블로, 엘보우 금지야. 테스트니까 너무 진지하게 하지 말고.”
호준은 채수의 말엔 관심도 없는 듯 두호를 보며 계속 약을 올렸다.
반면 두호는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자 1라운드 파이트!”
땡땡땡!
채수는 재빨리 링 사이드에 있는 채호를 돌아보았다.
“형 촬영하고 있지?”
“오케이!”
탕!
그런데 글러브가 무언갈 때리는 소리가 총성처럼 들려왔다.
-탕탕
깜짝 놀란 채수는 뒤를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