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쟁의 신이 케이지 안으로-13화 (13/204)

제 13화: 전쟁의 신은 죽었다.

팟!

화면이 바뀌면서 백인 남성이 나왔다.

굉장히 각진 턱과 정리되지 않은 수염이 옛날의 바이킹을 연상케 하는 사내였다.

“마이클 테너. 1989년생으로 미국 오하이오주 출생입니다. 키는 174cm로 공식 프로필에 나와 있습니다. 스타일은….”

주민은 그렇게 한 체급씩 올라가며 챔피언들에 대한 설명을 자세하게 했다.

그들이 장단점은 물론 취미생활까지 얘기했다.

‘취미생활은 그 사람의 성격을 엿볼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자료다.’

전 헤비급 챔피언 척 노릭스가 한 말이다.

일정 수준이 넘어가면 신체적 기량은 비슷하다.

비슷한 기량을 가진 선수들의 승패를 정하는 것은 정보다.

그 정보를 토대로 만드는 전략과 전술이 성패를 가른다.

주민의 자료 수집과 준비는 빈틈이 없다.

웰터급에 대한 정보 분석이 끝나고 미들급으로 넘어가 사진이 한 장 나왔다.

순간 두호는 처음으로 먼저 의견을 제시했다.

“미들급으로 하겠습니다.”

회의장 안 모든 사람은 당황한 듯 두호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두호의 표정을 본 그들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지금까지와 달리 살기 가득한 시선으로 화면 속의 남자를 노려보았다.

“두호 씨 체급은 웰터급이 가장 잘 어울려요.”

주민이 가로막았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체급 선택에 실패하면 쉬운 성적은 불가능하다.

격투기 선수의 몸무게는 살이 아닌 골격과 근육을 바탕으로 해야 하고 평소 체중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두호는 미들급에 적절하지 않다.

“미들급이어야만 해요.”

채수의 의견 또한 주민과 같았다.

“재능 자체야 둘째치고 타고난 신체의 피지컬은 전혀 다른 문제에요. 오죽하면 모든 격투 종목이 체급을 나누어 번거롭게 계체량을 진행하겠어요.”

채호도 그의 의견에 동조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두호의 표정은 양보가 없는 듯 단호했다.

“체급이야 올리면 그만이죠. 미들급으로 출발해서 상황을 봐 체급을 낮추는 경우도 있는 걸로 압니다.”

“있죠 그런 경우. 하지만 두호씨가 만약 바라는 게 챔피언이라면 더 쉬운 방법 있어요.”

실제로도 그런 경우가 있다.

자신의 체급에서 통하지 않던 실력이 체급을 낮추고 빛을 발하는 경우.

그렇게 챔피언이 된 사람들도 있긴 했지만, 대부분이 실패했다.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가 생길지 모르는 리스크를 떠안아야 하는 문제다.

“상황 봐가면서 싸우는 사자가 사자인가요?”

“두호씨. 이제는 이 스포츠도 치열한 두뇌싸움 눈치싸움이에요.”

두호의 표정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채호는 두호에게 잠시 얘기를 하자는 듯 고갯짓을 했다.

두호와 채호는 자리를 옮겨 단둘이 대화하기로 했다.

건물 옥상에서 두 사람은 강남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형님. 무슨 일입니까?”

두호의 말은 사실 객기에 가까웠다.

하지만 항상 합리적인 선택을 해왔던 두호임을 아는 채호는 그가 다른 의중이 있나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놈이다.”

“네?”

“나 죽인 놈.”

굉장히 놀란 채호의 입은 다물어지지 않았다.

“예!?”

“정확하지는 않지만 맞는 것 같다. 흑인에 길게 찢어진 눈에 흉터. 그리고 귀 뒤부터 목까지 이어지는 해골 문신. 똑똑히 기억한다.”

조용히 상의 안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문 채호는 불을 붙이며 두호에게 말했다.

“다른 부분이야 모르겠지만, 귀 뒤부터 목까지 이어지는 문신은 요새 아프리카 쪽 출신 애들한테는 유행처럼 번진 겁니다. 그래도 확신하십니까?”

두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정확하지 않다고 하지만 사실 거의 확신에 가까웠다.

그 어떤 위험한 작전에서도 냉철함을 잊지 않는 그였지만, 자신을 죽인 상대에게 보이는 반응은 숨길 수가 없는 듯 보였다.

한숨을 작게 내뱉은 채호는 결심을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평균 체중도 거의 90까지는 끌어 올려야 하고요. 그 체급에서는 메리트가 없는. 아니 굉장히 불리한 신체 사이즈가 될 겁니다.”

“상관없다. 그놈 면상 으깨버려야 내가 맘이 편하겠다.”

채호는 두호의 말을 듣고는 식은땀이 흘렀다.

오랜만에 보는 전투적인 표정의 두호였다.

‘그놈. 긴장 좀 해야겠네.’

수많은 암살 작전에서도 상대를 놓친 적이 없는 두호였다.

그의 전설적인 성과 뒤에는 지금 같은 확실한 목표 의식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담배를 재떨이에 툭 털어 넣은 채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수미는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어느 누구를 입히기 위해서란 목적은 없다.

물론 가끔 자기 직원들에게 선물처럼 하나씩 건네긴 하지만 별 의미는 없다.

그냥 하는 것이다.

뜨개질을 처음 시작하게 된 건 아주 우연이었다.

배신의 칼날 위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수미는 한동안 두문불출했다.

화(禍).

아무리 삭히며 가라앉히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분노는 더욱 끓어 올랐다.

급기야 피를 토하며 쓰러졌고 병원으로 실려 갔다.

화병.

의사의 진단은 냉정했다.

‘마음을 풀지 않으면 어떤 처방도 소용없습니다.

이런 병에는 약도 없어요.

마음을 스스로 풀어헤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어요.’

그리고 한 알의 약도 처방해주지 않고 퇴원시켰다.

다른 병원들도 여러 곳 전전해 보았지만 별다른 이견은 없었다.

그렇게 별다른 방법 없이 점점 악화되어가는 그때 걸려 온 전화 한 통이 있었다.

김도혁이었다.

‘뜨개질을 해보세요. 마음 안정에 의외로 좋다는군요. 저 목도리라도 하나 만들어 주세요.’

인연을 맺은 이후 가끔 이렇게 안부 전화가 오는 그였다.

흔하디흔한 뜨개질이 무슨 치료가 될까 하다 속는 셈 치고 잡았고 지금까지 이어온다.

정말 효과가 있었다.

뜨개질 자체보다는 그 놈이 자신에게 보여준 온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무 대가 없는 온정.

암투와 계략 속에서 콩고물 하나도 의심했던 그녀에게는 새로운 위로였다.

‘정 많은 놈.’

수미는 혼자 웃었다.

그런 놈이 죽었다.

그리고 두호가 나타났다.

보지 않아도 보이는 게 있는 나이다.

수미는 다시 뜨개질을 멈추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

두호가 마련한 회식 자리였다.

강남에서 제일 비싸다는 한우집.

한풍명월.

필린의 직원들은 백두호를 외치며 흥분했다. 30분 전까지만 해도 아니었지만.

회의가 끝나자 두호가 갑자기 제안했다.

“이렇게 만난 것도 기념으로 회식이나 한번 하시죠? 제가 쏘겠습니다.”

“예? 두호씨가 무슨 돈이 있으시다고...”

“저 돈 많아요.”

“용돈 여유있게 받으시나봐요? 하하하.”

모두가 두호의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정리할 때 채호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형님. 진짜 돈 있으세요? 그냥 제가 낼게요.”

“너 나 캡틴 때 연봉 기억안나?”

“아.”

기억난다.

자신보다 다섯 배는 넘게 벌던 도혁이었으니까.

지금이야 자신이 더 벌겠지만 그 시절의 도혁의 연봉은 팀원들의 부러움에 대상이었다.

그리고 지금 강남에서 가장 비싸다는 한풍명월이란 집에서 배를 채우고 있다.

채호와 코치진들 뿐만이 아니라 다른 직원들도 여럿 있었다.

처음에는 나이 어린 두호가 산다고 하자 난처한 얼굴을 했다.

자신들보다 어린 사람이 계산한다는 것이 어색하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하다.

하지만 채호가 흔쾌히 얻어먹자고 자리에 앉자 믿는 구석이 생김으로 부담 없이 나선 것이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두호는 몸을 관리한다는 핑계로 콜라를 마셨다.

그 말을 들은 직원들은 함께하는 마음으로 모두 술을 안 먹기로 하였다.

식사 중에도 그들의 회의는 계속되었다.

“그래플링 파트에서 따로 신경 써야 할 부분이 있을까요?”

탁현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테스트를 해봐야 알 것 같긴 합니다.”

그때 주민 옆에 앉은 채호가 고개를 돌렸다.

“채수는?”

조금 떨어져 앉아 직원들과 얘길 나누던 채수가 고개를 돌렸다.

들고 있던 젓가락을 살짝 놓은 그는 고민하는 듯 턱을 쓰다듬었다.

“배움의 속도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으니 확답은 못 하겠지만 복싱 베이스라면 킥 정도만 장착하고 종합의 맞춰 주먹만 바꿔주면 될 것 같아. 일단 테스트는 해봐야지.”

공통으로 나오는 의견이 테스트임을 확인한 채호가 두호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테스트 괜찮겠죠?”

두호는 살짝 웃어 보였다.

“물론입니다.”

채호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자자. 그럼 데뷔 일정은 테스트와 훈련 경과를 지켜보고 내 달 안에는 정해보는 걸로 하죠.”

새로운 도전은 언제나 즐겁다.

역사의 시작을 앞둔 직원들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두호의 표정은 다시 차갑게 식었다.

*

두호는 집에서 주민에게 건네받은 자료를 읽어보고 있었다.

‘이름 알도프 코와르키. 닉네임 RKO로 미국 유명 프로레슬러의 화끈한 피니쉬를 연상케 하여 XFC에서 붙여준 닉네임입니다.’

‘알도프 코와르키.’

자신을 죽였던 놈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되었다.

이 사람이 맞는지 아닌지를 확인해 본 적은 없었지만 확신할 수가 있었다.

사진을 보자마자 느낀 그 섬뜩한 느낌.

어둠 속에서 걸어오던 그놈의 기세와 똑같았다.

두호는 계속해서 자료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나이는 93년생으로 올해 한국 나이로는 32살입니다. 전형적인 스트라이커(타격가)로, 일명 대 그래플링 시대에서 수많은 선수들을 압도적으로 제압하고 살아남은 챔피언입니다.’

종합격투기에서는 스타일의 오르내림이 있다.

한때는 스트라이커가 강세를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그래플러들이 강세를 보이는 시기가 있다.

지난 2년간은 대 그래플러 시대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그래플러들이 강세를 보이고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코와르키는 타격으로 수많은 그래플러들 사이에서 당당히 챔피언으로 등극했다.

“하지만 챔피언이 된 그는 성장을 멈추지 않았고 어느덧 웰라운드한(타격과 그래플링이 모두 가능한 선수) 파이터가 되었습니다. 세간의 평가는 그가 가장 완벽에 가깝다고 하죠.”

전반적인 여론은 미들급의 장기 집권을 예상하였다.

그 여론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3번의 챔피언 방어전에서 2회의 KO와 한 번의 서브미션 승리를 보여줄 정도로 압도적인 기량을 보여주고 있었다.

어느덧 자료를 다 읽은 두호는 툭 하고 자료를 덮었다.

고개를 뒤로 젖혀 천장을 향했다.

두호는 옅은 미소를 띠었다.

‘제발. 내가 갈 때까지 그 자리에서 내려오지 마라.’

그는 자신이 어디로 가야할지 정확히 바라보았다.

*

채호 역시 막 퇴근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샤워를 마치고 아침에 내려놓고 간 커피를 잔에 따라 마셨다.

스르륵!

커텐을 열고 캄캄한 창밖을 바라보았다.

자기 얼굴이 유리창에 분명하게 보인다.

스포츠는 감정이 아니다.

더욱 싸움은 아니다.

설혹 싸움으로 보일지라도 선수 스스로는 스포츠라고 생각할 때 제대로 기량이 나온다.

링 안에서의 싸움은 두호 본인의 몫이었다.

하지만 그 링 바깥에서의 모든 싸움은 자신의 몫이었다.

에이전트는 다른 사람의 업무를 중개하거나 대행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자신은 단순한 에이전트가 아닌 그의 참모 역할까지 수행해야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녀석과 두호를 링 안에서 만나게 한다.

돈 아니면 죽음밖에 없던 세상에서 자신을 위해 몸을 던진 사람.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그가 지켜준 것들이다.

“누구는 나를 위해 목숨을 걸었는데. 돈으로 때울 순 없지.”

소파에 완전히 등을 기대고 손을 올려 머리를 쓸어올렸다.

“내가 책임지고 거기까지는 올려다 줄테니까. 이기는 건 형님이 하십시오.”

밝게 빛나는 전등에 무언가가 떠오른다.

문득 지금은 만날 수 없는 팀원들이 생각난 채호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

*

첫 회의 이후 며칠이 지났다.

두호와 준모는 채호가 전화로 알려준 곳으로 이동 중이었다.

테스트를 위하여 한 곳을 섭외했는지 서울에서는 조금 벗어난 곳이었다.

그곳을 향해 한참 운전하던 준모가 깜짝 놀란 표정을 했다.

“하마터면 잊을 뻔했네.”

준모는 조수석에 놓여있던 종이 상자 두 개를 뒷자리로 건네주었다.

“형님 이거 받으세요.”

두호는 이게 뭐냐는 듯 상자 하나를 살짝 들어 올렸다.

“저 별것 아니고요. 형님 운동하는 데 필요한 것 좀.”

두호는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어보았다.

그러다 또 하나의 박스가 나온다.

“여기 칼.”

준모는 조수석 콘솔박스를 열어 커터 칼을 꺼내 주었다.

찌이익!

두호는 커터 칼로 테이프를 자르고 상자를 열었다.

두호의 눈썹이 모였다.

한눈에 무엇인지 아는 눈치다.

운동선수들이 즐겨 복용하는 영양제와 보충제가 가득 들어있었다.

점점 사람들이 스포츠에 많은 관심을 보이니 시중에는 다양한 운동 관련 제품들이 많이 출시 되었다.

“제 친구 중에 운동 쪽으로 일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 자문을 구해서 몇 개 챙겼습니다.”

준모는 룸미러를 통해 두호가 들고 살피는 약병들을 보며 말했다.

“그건 단백질 보충제고요, 아, 그건 아미노산이고요. 비타민이랑 그건 유산균입니다. 나도 오늘 처음 들었는데 유산균이 운동하는 데 아주 중요하다 하더라구요.“

두호가 환한 얼굴로 말했다.

“고맙다.”

“이것저것 들으면서 메모하는데 재밌네요. 이럴거면 공부해서 서울대나 갈걸... 집이 너무 멀어서 안가긴 했는데.”

두호는 약병을 다시 상자에 넣고 포장지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포장지를 왜 쌉니까? 그냥 버리고 약만 가져가세요.”

두호는 대꾸하지 않는다.

포장지도 선물이다.

자신에게 선물한 준모의 마음이 담긴 것이다.

그 이후 한참을 달려 채호가 알려준 곳으로 도착했다.

막상 도착하고 나니 주변에는 별다른 것이 없었고 공장 같은 큰 건물이 하나 있었다.

입구에는 이미 채호와 코치진 그리고 직원 몇 명이 서 있었다.

차에서 내린 두호와 준모는 반갑게 기다리던 사람들과 인사를 하였다.

“빨리 오셨네요?”

두호가 여긴 어디냐는 듯 둘러보자 채호가 다가왔다.

“예전에 큰 인쇄소였는데 지금은 비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임대했죠.”

쿠쿠쿵!

채호가 공장문을 열었다.

“운동하실 공간을 만들어봤습니다.”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선 두호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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