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화: 전쟁의 신은 죽었다.
준모는 두호를 보며 현장을 가리켰다.
“저건 못 일어나겠죠?”
두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제대로 꽂혔으니까. 저건 못 일어나지.”
제법 운동신경이 있는 여자인 듯싶었다.
다리가 풀린 듯 맥없이 옆으로 픽 쓰러진 그에게 손가락 욕을 하며 그녀는 자신의 차로 이동하였다.
준모도 차가 빠지므로 천천히 진행했다.
그러다 여자의 차 옆으로 지나가는데 두호와 눈이 마주쳤다.
여자는 두호를 바라보더니 창문을 툭 치며 노려보았다.
“뭘 봐.”
그녀의 기세에 두호는 잠시 당황하며 시선을 피해주었다.
두호를 쳐다보지도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차에 탄 뒤 곧바로 사라졌다.
“쎄네.”
준모는 두호의 표정을 살피느라 백미러를 보았다.
다행히 두호는 그리 불쾌해 보이는 표정이 아니었다.
부우웅!
조금 뚫린 공간으로 빠져나간 차는 대로를 빠르게 달렸다.
필린의 주차장에 도착한 두호는 채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나 주차장이야.”
-23층에서 내리시면 돼요. 프런트에는 말해놓겠습니다.
“오케이“
-조심히 올라오세요.
“가자?”
준모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며 감탄하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건물도 좋고, 강남 한복판에 이 정도 규모면.”
준모는 손을 뻗어 대리석으로 된 건물 벽을 쓰다듬기까지 했다.
“임대일까요? 아니면 자가? 임대라고 해도 장난 아닐 텐데.”
강남은 독특한 지역이다.
그들만의 세상이고 돈이 최우선 가치로 통하는 지역에서 이런 건물이라면 아무나 파고들 수는 없을 것이다.
필린이 한국 최고의 스포츠 에이전시임을 확실하게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퇴근하는 직장인들이다.
“사람들 엄청 많네요.”
사람들이 모두 내리고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적정 하중이 1,500kg이라고 쓰인 엘리베이터에 단둘이 있다.
준모는 엘리베이터 벽에 자신을 비춰 보며 머리를 다듬고 있었다.
아침에 예리하게 갈라놓은 가르마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래서 머리를 손바닥으로 정리하는 그 사이 쨍하며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린다.
그으으!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두 사람은 멈칫했다.
들어가는 입구부터 일반적인 회사 사무실의 상식을 벗어났다.
필린의 사무실은 마치 스트릿 의류 브랜드 매장을 보는 듯했다.
세계적인 운동선수들이 움직이는 역동적인 사진들이 즐비했고 한쪽 벽면에는 에이전시 필린의 활동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잠시 구경하듯 사진들을 살핀 두 사람은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두 사람의 눈은 같이 커졌다.
뉴욕을 연상케 하는 그래피티들과 한정판으로 알려진 유명 브랜드의 운동화들이 탐스럽게 진열되어 있다.
꿀꺽!
두호가 고개를 돌렸는데 준모가 유리 너머 검은색 농구화 한 켤레를 바라보며 침을 흘리고 있었다.
“왜 갖고 싶어?”
그러자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 준모는 단념한 듯 고개를 저었다.
머리를 긁적이며 아쉬운 표정으로 두호의 옆으로 걸어왔다.
그때 검정 대리석으로 갖춰진 프런트에 앉아 있던 두 명의 직원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어떤 일로 방문하셨나요?”
두호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 대답했다.
“이채호 대표와 시간을 갖기로 했습니다.”
그때 안쪽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요!”
채호가 웃으며 다가왔다.
“이분은 내가 모셔갈게요. 바쁘실 텐데 미안해요.”
“아 대표님!”
직원들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채호에게 인사했다.
밝게 웃으며 직원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채호는 평소에도 직원들과 잘 지내는 듯 어색함이 없었다.
채호는 사무실의 안쪽을 손바닥으로 가리켰다.
“이쪽으로 가시죠.“
두호가 빙긋 웃었다.
“이 대표님 대단하십니다.”
“하하. 부끄럽습니다.”
채호는 사무실 가운데 통로를 걸어가며 말했다.
“우린 에이전시지만 단순히 중계자의 역할뿐만 아니라 매니지먼트의 역할도 겸임하고 있습니다. 형님이 진행하시려는 계획에 큰 도움 될 겁니다. 저희는 이 바닥에서 제법 자리를 잡았거든요.”
확실히 한 기업을 반열에 올려세운 그의 자부심은 대단해 보였다.
필린에 대한 그의 설명은 이어졌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때 가장 확실한 방법은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지녔는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상대는 그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될 테니까.
두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채호의 설명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스륵!
채호는 회의장이라고 쓰인 문을 밀고 들어섰다.
회의실 안에는 세 명의 사람들이 이미 와 앉아 있었다.
내부로 들어서는 채호를 발견하고는 그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채호는 그들을 향해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 보였다.
“여기 앉으시죠.”
두호를 그들의 맞은편 자리에 안내했고 그가 자리에 앉자 모두가 자리에 착석했다.
채호는 손바닥을 비비며 헛기침했다.
“자. 이분들을 소개하겠습니다.”
채호는 한 사내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이분은 NBA 밀워키 벅스에서 근무하셨던 저명한 컨디셔닝 트레이너 백주민씨 입니다.”
주민은 두호를 향해 가벼운 목례를 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앞으로 백두호씨 컨디셔닝 코칭을 맡게 된 백주민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채호가 주민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들은 이미 채호와 친분이 있는 듯 스스럼이 없었다.
“대학교 때까지 유도를 전공했고 격투기에 대한 이해도가 굉장히 높은 코치죠. 앞으로 컨디셔닝뿐만 아니라 식단과 몸 관리도 담당해줄 친구입니다.”
두호는 일어나 가볍게 목례를 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주민의 소개를 마친 채호는 자리를 한 칸 옮겨 덩치가 큰 사내 옆으로 섰다.
깨끗한 주민의 인상과는 판이하다.
돌덩이 같은 체구에 구레나룻와 이어진 짙은 수염의 사내는 묵묵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만 특이한 점이 있다면 귀 모양이 굉장히 특이했다.
두호는 속으로 생각했다.
‘만두귀네.’
만두귀.
정식 명칭은 의학용어로 이개혈종.
주로 레슬링이나 유도 등등 그래플링을 오래 수련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증상이다.
옷과 바닥에 귀가 지속적으로 압박과 마찰이 가해지면 연골과 연골막 사이에 혈액이 찬다.
그 결과 귀가 두툼해지고 일그러지는데. 그 모습이 마치 만두 같다고 하여 만두귀라는 속칭이 생긴 것이다.
그래플링을 수련한 사람에겐 훈장같은 것.
그리고 이런 속설이 있다.
길 바닥에서 만두귀를 가진 사람과 절대 싸우지마라.
“이 친구의 이름은 탁현입니다. 아시안 게임 은메달리스트 레슬러 출신입니다. 앞으로의 종합 격투기의 발맞춰 그래플링 파트를 코치해줄 친구죠.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른 격투단체 자문위원이기도 했고요.”
탁현은 한 발자국 옆으로 나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의 태도와 분위기로 보아 평소에도 과묵한 성격인 것 같았다.
얼굴과 체구 그리고 목소리까지 그는 남자답다는 말이 정말 잘 어울렸다.
“탁현 입니다. 부족한 실력이지만 도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채호는 탁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레슬링 자유형 출신이라 더욱더 실전적인 코칭이 가능할 것입니다. 자 마지막으로….”
이번엔 왼손으로 마지막 사내의 등을 쳤다.
“얘는.”
채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채수라고 제 친동생이죠.”
“으으!”
채호가 동생이 있다는 건 예전 용병 생활 중 들었었지만 직접 대면하기는 처음이다.
이렇게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채수는 약간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뭐 제 동생이긴 하지만 일본 입식에서 짧게나마 챔피언도 해본 놈이죠. 부상만 아니었어도 꽤 장기 집권할 만한 애인데. 어찌어찌 지금은 제 밑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인사드려, 크게 인마.”
채호가 강제로 머리를 눌렀다.
“알았어.”
채수는 채호의 손길을 뿌리치며 말했다.
“이채수 입니다. 하늘에서 떨어진 낙하산이죠. 더욱 열심히 하겠습니다.”
“자! 다들 앉죠.”
세 사내 모두 자리에 앉았다.
채호는 가장 상석에 앉았다.
“대한민국에서 이 정도 코치진을 꾸린 팀은 없다고 자부합니다.”
모두를 돌아보며 하는 말이다.
확실히 이 정도의 코치진들은 돈으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커리어가 탄탄할수록 경력에 어울리지 않는 일을 하기 싫어한다.
소위 말해 급.
자신의 경력을 더욱 빛내줄 선수를 원하는 그들에게 도움도 되지 않는 일을 부탁하는 것은 오히려 실례다.
어떻게 이들을 설득했는지 오히려 궁금할 정도였다.
이어 채호의 시선이 두호에게 멎는다.
“여러분에게 소개하죠. 여기 이분은 앞으로 우리 필린에서 격투기 파트의 선봉 주자가 되어 주실 백두호씨.”
두호는 다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이제 막 첫 발걸음을 뗀 자신에게 과분한 최고의 코치진들이다.
코치진은 준모를 가리키며 채호를 쳐다보았다.
“저분은?”
“전 양준모입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이마가 책상에 닿을 만큼 허리를 숙였다.
하지만 준모는 자신이 누구인지 설명하기를 망설였다.
두호에게 자신은 무엇인가.
그 순간 두호가 대신 준모를 소개했다.
“제 동료입니다.”
자신을 동료라고 소개한 두호를 잠시 말없이 쳐다보았다.
부하라고 할 수도 있었고 그냥 운전하는 애라고 소개할 수도 있었지만, 두호는 그러지 않았다.
자신을 동료라고 설명하여 이 프로젝트에 함께할 수 있는 이유를 만들어준 것이다.
‘형님.’
준모의 시선이 감격으로 차오른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준모는 크게 인사하고 앉았다.
채호는 준모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2년 전 아시안 게임 복싱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준우승까지 한 친구입니다. 실력은 우승도 가벼울 테지만 협회 측의 비리로 인하여 아쉽게 놓치고 말았죠.”
그 말을 들은 코치친 들은 모두 안타깝다는 반응을 하였다.
갓 스무 살이라고 들었다.
고등학생의 나이로 난다 긴다 하는 아마추어 복서들 속에서 준우승까지 할 수 있는 실력이라면 정말 빛나는 원석일 것이다.
인생이라는 게 참 신기하다.
이런 축복받은 재능을 가진 사람에게조차 삶은 좀체 화려한 길을 열어주지 않는다.
“그래서 제가 홧김에 종합 격투기로 넘어오라 제안해서 시작한 겁니다. 재능은 뭐…”
채호가 말꼬리를 흐린다.
코치진들이 제일 궁금해할 말이었다.
“장담합니다. 대한민국에서 이만큼 싹수 좋은 재목은 찾기 힘들 겁니다.”
일제히 박수가 터졌다.
짝짝짝!
그중 준모의 박수 소리가 제일 컸는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인재를 알아보는 눈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소문이 자자한 채호다.
지금의 필린을 만드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원석을 알아보는 그의 눈.
그런 채호가 두호를 대한민국에서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소개했다.
두호는 빙긋 웃을 뿐이다.
이 일은 채호에게도 큰 도전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스포츠 에이전시를 만들어낸 채호.
아직은 구기 종목 관련 에이전시와 매니지먼트를 주력 사업으로 삼고 있지만, 필린은 또 한 번의 새로운 도약을 준비했다.
“재료 좋고 연장 좋으니 완성품 또한 좋겠죠?”
채호는 의자에 앉아 다이어리를 펼쳤다.
시간 낭비 말자는 듯 그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우리의 계획은 아주 간단합니다. XFC 진출 후 챔피언입니다.”
XFC. (X FIGHTING CONTENDER).
초창기에는 불법 파이트 클럽 같은 이미지를 연상케 했지만 거액의 자본 투자를 받은 후 격투기 시장의 정점으로 도약한 곳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종합 격투기 브랜드이자 모든 격투가들의 꿈의 링.
이곳의 각 체급 챔피언들은 동 체급의 인간 중 가장 강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종합 격투기의 트렌드를 이끌어나가며 최강이라는 타이틀을 부여할 수 있는 곳.
타 단체는 흉내도 내지 못할 거액의 자본으로 항상 믿을 수 없는 경기 매칭을 만드는 곳이기에 모든 격투기 팬들의 이목이 집중된다.
그의 목표를 들은 코치진들은 예상했단 듯 고개를 끄덕였다.
채호가 소개한 대로 정말 두호의 재능이 그 정도라면 당연히 목표는 그래야 했다.
다만 조금 더 세부적이고 탄탄한 계획이 필요했다.
“데뷔 시기는 언제쯤으로 보십니까?”
채호는 의자를 뒤로 젖히며 다리를 꼬았다.
동네 형 같은 분위기를 풍기던 방금과는 달리 냉철한 얼굴로 바뀌었다.
필린의 대표이사로써 일을 시작한 것이다.
“뭐 끌 거 있습니까? 물론 자세한 경과는 지켜봐야 알겠지만 1년이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탁현이 손을 들었다.
“복싱 베이스 스타일이면 그래플링을 장착하는 데 시간이 들 것입니다. 또 레슬링을 배운다고 하더라도 전형적인 올드스쿨 스타일인데, 요새 이 스타일은 승률이 별로라서요.”
그 말을 들은 두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베이스는 제가 가르친다고는 하지만 종합에서 주짓수는 필수적이죠. 주짓수 코치도 한 분 모셔 오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 들의 회의는 뜨거웠다.
거침없는 그들의 논쟁을 두호는 그저 듣는 데 전념했다.
이 분야의 베테랑들이다.
훨씬 더 깊고 훨씬 더 넓게 보고 있었다.
그런 그들 사이에서 자신이 할 일은 한 가지뿐이다.
그들의 코칭을 스펀지처럼 빨아드리는 것이다.
주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큰 프로젝트 화면에 무언가를 띄웠다.
‘XFC 체급별 챔피언’이라는 제목의 PPT가 보였다.
체급은 격투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다.
조금의 몸무게 차이라고 가볍게 생각할 수 있지만 전혀 아니다.
타고난 체중에서 나오는 힘은 훈련의 강도와 방식까지 영향을 준다.
자신보다 더 높은 강도의 훈련을 하고 온 사람과의 싸움?
이것은 무조건적으로 불리하다.
그래서 수많은 선수들이 자신의 키에 맞는 체급을 가기 위해 죽어라 감량을 하는 이유도 이것이다.
체급이 깡패.
거친 표현이지만 정답이다.
“체급별 챔피언을 살펴보는 이유는 가볍게 생각하면 체급별 가장 특징적인 파이팅 스타일을 엿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체급은 크게 이렇게 나누어져 있죠”
주민은 화면을 가리켰다.
플라이급
밴텀급
페더급
라이트급
웰터급
미들급
라이트 헤비급
헤비급
“두호씨의 신체정보는 키 183의 몸무게 73으로 들었는데 맞으십니까?”
의자에 앉은 두호는 대답했다.
“맞아요.”
“그럼 통상적으로 이 정도 신체 사이즈의 사람들이 들어가는 체급은 웰터급. 조금 무리한다면 라이트급이지만 저희는 위아래로 한 체급씩 더 살펴보겠습니다. 일단 페더급 챔피언.”
잠시 후.
두호의 표정은 싸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