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9화 : 전쟁의 신은 죽었다.
두호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그 역시 뾰족한 대책은 없었으므로 상체를 곧게 세웠다.
‘어차피 남는 게 시간이니까.’
바깥을 잘 살피려는 자세다.
“밖에 잘 봐.”
준모의 눈에 불이 켜졌다.
꽤 많은 시간이 흘렀고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었으나 두호는 면벽 정진하는 노승처럼 자세에 변함이 없다.
용병 시절 일주일이 넘게 폐건물 옥상에서 대기한 것을 생각하면 이 정도 기다림은 그에게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왜 안 오지?”
밖에 나가 돌아다니던 준모가 다시 들어왔다.
“출근하면 여기서 다 보이는데, 오늘은 안 오는 날인가.”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보고 있던 두호는 혼자 생각했다.
‘계획을 수정해야 하나.’
두호는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필린의 사무실이 있는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다급하게 자신을 부르는 준모였다.
“형님! 형님! 저기 좀 보시죠. 형님. 저 사람 아니에요?”
건너편 횡단보도 앞에 신호를 기다리며 서 있는 190이 넘는 다부진 체격의 사내가 보였다.
채호였다.
베이지색 긴 프렌치코트에 흰 와이셔츠와 검은 슬랙스 바지를 입고 있는 그는 예전의 용병 시절의 모습이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채호 주위에는 정장의 사내들이 여럿 있었는데 필린의 직원들인 듯 보였다.
다다닥!
준모는 차에서 필린 건물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준모는 비장한 얼굴로 채호가 건널목을 건너오길 기다렸다.
신호가 바뀌었다.
건널목을 건너 회사 쪽으로 방향을 꺾을 때 준모가 달려들었다.
“대표님 여기요! 저희 형님이 대표님을 뵙고 싶어 합니다.”
채호의 부하 직원들이 재빠르게 준모를 막아섰다.
“선생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대표님과 미팅을 원하시면 절차를 밟아주셔야 합니다. 연락처를 주시면 저희가 연락을 드리죠.”
준모는 버럭 성질을 냈다.
“아 뭔데. 대표님이랑 잠깐 얘기 좀 하고 싶다니까. 비켜 인마.”
순간 조금 전까지 친절하게 웃던 직원들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그 표정을 본 준모는 멈칫했고 채호는 가볍게 웃으며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채호가 들어간 것을 확인한 직원들은 다시 형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인사하곤 따라 들어갔다.
모두가 떠나고 홀로 남은 준모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혼자서 투덜거렸다.
“아 거의 됐는데.”
이어 준모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안내 데스크를 찾아 연락처를 남기며 절차를 문의했지만, 마냥 기다리라는 말 뿐이었다.
“썅.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거야?”
두호는 다가오는 준모를 보며 빙긋 웃었다.
“고생했다.”
“그런데 뭣 때문에 만나려고 하십니까?”
두호는 대답하지 않고 다시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
두호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오랜만에 찐하게 한번 봐야겠네.”
준모는 두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
채호는 퇴근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아파트 지상 주차장에 주차한 뒤, 차에서 내렸다.
쾅 소리 나게 차 문을 닫은 후 잠시 멈춰서서 주위를 둘러본다.
누군가를 찾는 시선이었는데 아파트 현관이 아닌 주차장 후문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주차장 후문을 나서면 밖이다.
그는 천천히 걸으며 코트 주머니속 휴대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오른쪽으로는 차도를 낀 상가가 있는데 주차장 후문은 상가 뒷길로 연결된다.
저벅저벅!
조용한 골목길로 채호의 구둣발 소리가 울린다.
골목이 끝나는 곳에 제법 큰 공터가 하나 나왔다.
오래전부터 재개발 공사가 들어간다는 말이 돌고 있었지만, 아직 진척이 없는 버려진 땅이다.
쓰레기들이 날리는 공터 중앙으로 걸어 들어간 채호는 천천히 뒤를 돌았다.
“누구야? 열심히 쫓아오던데?”
채호는 한곳을 바라보았다.
어둠이 짙게 드리워진 허름한 담벼락 아래서 인기척이 있다.
이어 희끄무레한 그림자가 나타났는데 두 명이다.
채호는 보며 눈을 크게 떴는데 오늘 낮에 회사 앞에서의 일을 기억한 것이다.
그러다 두호에게 시선을 옮긴 채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평범하다.
‘평범한 건 언제든 위협으로 바뀔 수 있다.’
군시절 무성 무기 훈련 교관이 했던 말이다.
위협은 화려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채호는 두호가 평범치 않다는 걸 단번에 파악했다.
“거참. 얘기 좀 하자는데 그렇게 피해 다니십니까.”
채호의 눈이 좁혀졌다.
준모는 낮에 소동으로 인해 기억이 나지만 두호는 처음 보았다.
“얘기하지 않았어? 나랑 비즈니스 하려면 정식으로 신청하라니까.”
채호의 표정은 불쾌해 보였다.
하지만 두호는 나름대로 판단을 내린 것이었다.
지금 채호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스포츠 에이전시의 대표이다.
그에 비해 자신은 증명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흔한 스무 살의 남자일 뿐이다.
더욱이 내가 김도혁이었다고 소리쳐 봤자 웃음거리만 될 뿐이다.
대화를 최대한 끌어낸다.
그리고 보여준다.
그 과정중에 실력행사가 필요하다? 증명하면 그만이다.
두호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껄렁거렸다.
“솔직히 스무 살짜리가 비즈니스 하자면 안 하실꺼 잖습니까. 그거 기만 아니에요?”
두호의 말도 안 되는 말을 계속 듣고 있기도 귀찮은 듯 채호는 손짓했다.
“그래. 알겠으니까. 다음에 와. 피곤하다.”
이대로 대화가 끝나면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채호가 몸을 돌려 그대로 가려고 했다.
무엇인가가 생각난 두호였다.
두호의 표정은 순간 싸늘해졌다.
“지금 가려고 하면 당신 죽어요.”
순식간에 분위가 바뀐 두호.
두호의 의도대로 이 말은 채호의 신경을 확 긁어놓았다.
‘거슬리네. 저 말.’
자신이 누군가.
지금은 번듯한 정장을 입는 사업가이지만 한때는 용병 업계에서 최고라는 소리를 지겹게 듣던 사람 아닌가.
저 햇병아리 같은 놈이 자신을 내려보는 듯한 말투가 목에 탁 걸렸다.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혼쭐을 내주고 싶은 채호였다.
그 순간. 공터로 차 한 대가 들어섰다.
차는 빠른 속도로 달려와 채호의 뒤 쪽에서 멈춰섰다.
정장을 입은 건장한 남성 4명이 차에서 내렸다.
채호는 자신에게 미행이 붙었음을 일찌감치 알아챘다.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채호는 자신의 경호팀을 불렀다.
두호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두호의 표정을 본 채호는 히죽 웃었다.
“미안한데. 형이 좀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 품위가 중요하거든.”
그리고는 경호팀을 돌아보며 살짝 미소지었다.
“정리 좀 부탁합니다.”
경호팀 역시 채호에게 정중하게 인사하고 두호와 준모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어이. 아저씨 뭐야.”
“벽에 딱 붙어 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경호원 네 사람을 보며 두호는 히죽 웃었다.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큰 목소리로 채호를 향해 소리쳤다.
“잘 봐!”
심각한 상황에 왜인지 두호의 표정은 오히려 천진난만한 것 같았다.
이제 채호는 두호의 반응에 헛웃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미친놈.’
채호는 자신의 안 주머니에서 담배 하나를 꺼내 불을 붙였다.
곧 상황이 정리 될테니 편하게 기다리기로 한 것이다.
두호는 자신에게 손을 뻗은 경호원을 오히려 팔을 잡고 끌었다.
순식간에 끌려오는 상대의 얼굴을 어깨로 거칠게 받아버렸다.
“억!”
중심이 무너져 쓰러지는 사내의 얼굴에 니 킥을 강하게 한 방 꽂더니 옆으로 치우듯이 손으로 툭 밀어버렸다.
-털썩.
사내는 의식을 잃은 듯 미동도 없었고 공터에는 순간 정적이 흘렀다.
경호원 사내들 역시 긴장한 듯 얼굴에 여유가 사라졌다.
두호는 자신의 손목을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일 해야지.”
사내들은 두호의 말에 정신을 차린 듯 곧바로 두호에게 달려들었다.
두호는 맨 앞의 사내가 뻗어오는 주먹을 가볍게 고개만 뒤로 젖혀 피해냈다.
그리고는 상대의 허벅지 안 쪽을 빠르게 걷어찼다.
사내는 고통스러운 듯 했지만 굴하지 않고 다시 주먹을 뻗어 반격을 하려했다.
두호는 재빠르게 가볍게 바닥을 굴러 주위에 굴러다니던 공병 하나를 집어들어 사내의 무릎을 찍었다.
빈 병은 쨍 소리를 내며 깨졌고 상대는 무릎을 감싸쥐며 쓰러졌다.
“악!”
두호는 깨진 병의 목 부분을 잡고 상대의 목을 겨눴다.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사내를 바라보았다.
날카롭게 깨진 병이 자신의 목 앞에 들이댄 것도 모자라 히죽 웃는 두호를 보자 패닉이 온 듯 사내는 식은땀이 흘렀다.
다른 경호원 역시 나서려 하자 누군가가 제지했다.
채호였다.
두호의 실력이 보통이 아님을 눈치챘다.
그리고 더군다나 상대는 연장으로 상해를 입히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다.
제압은커녕 큰 부상만 입을 것 같으니 자신이 나서기로 한 것이다.
비록 현역에서 손 뗀지 3년은 지났지만 상관은 없었다.
실력은 몸이 기억하니까.
외투를 벗어 사내에게 맡긴 채호는 뒤이어 손목의 시계까지 풀었다.
“다른분들 챙기고 주위에 사람들 좀 못 들어오게 부탁합니다.”
“아닙니다. 저희가 하겠습니다.”
“괜찮아요. 별 책임 안 물을 테니까.”
두호는 손에 쥔 병을 한쪽으로 툭 던져 놓았다.
잠시 정리를 할 시간을 기다려주듯 주머니에 손까지 넣었다.
채호는 그런 두호의 모습에서 한 순간도 눈을 떼지 않았다.
경호원 사내들은 서로를 챙겨 일어나며 주위로 흩어졌다.
“애들 더 불러.”
그리고 한 쪽에 우두커니 서 있던 준모를 발견했다.
자신들의 고용주 앞에서 망신을 당한 것이 분한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당신은 뭐야!”
준모는 잔뜩 겁먹은 모습이었다.
“준몬데요...?”
사내는 거칠게 준모의 어깨를 잡아 끌었다.
“이 새끼 넌 이리와. 너희는 주위에 누구 오는지. 뭐 없는지 잘 찾아봐.”
그러자 두호는 사내들에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걔 한테 손도 대지마. 뒤지기 싫으면.”
두호의 싸늘하게 식은 말 한마디에 모두 얼음이 되었다.
방금전 두호의 싸움 실력을 보아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은 정말 죽이려면 죽일 것 같은 그런 사람이었다.
사내들이 어찌할 줄 모르는 동안 두호는 채호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몰래 찍는 카메라도 없다. 우리 둘이 다야.”
채호는 사내들에게 고갯짓 했다.
사내들은 분한 표정으로 조용히 모두 공터를 빠져나갔다.
준모는 두호에게 감동한 듯 올망졸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형님...”
하지만 그런 준모를 뒤로 하고 두호는 다시 채호에게 시선이 꽂혔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적막이 있었다.
‘뭔가 의욕이 안나네.’
방금 전과는 달리 얼굴의 긴장이 사라진 두호였다.
“채호야. 지금은 한 마흔쯤 됐겠네.”
“뭐? 어린놈의 새끼가.”
채호의 반응은 아까와 달리 매우 거칠어졌다.
어차피 싸울 것까지 각오한 이상 감정을 숨길 필요가 없다고 느낀 것이다.
두호의 말은 계속 되었다.
“햇병아리 언제 이렇게 컸어?”
“하 참.”
채호는 못 참아주겠다는 듯 천천히 두호에게 걸어갔다.
하지만 두호의 입에서 나온 말 한마디가 채호를 당황시켰다.
“옐로우 맘바 말이야.”
“뭐?”
채호의 표정은 당황한 듯 했다.
순식간에 머리로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뭐지. 누가 보낸건가?‘
살면서 빚 없이 어찌 사는가.
더욱이 이름을 날리면 그 자리까지 오느라 밟히고 다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예전 용병 생활 중 자신과 원한을 맺은 사람이거나, 극히 낮은 확률이지만 옐로우 맘바가 회사 차원에서 자신을 제거하려 들 수도 있다.
소속일 때는 하등에 상관없지만 떠나면 비밀까지 갖고 나간다.
비밀을 회수하려니 당연히 죽일 수밖에 없다.
‘원치 않는 상황이지만 여기서 이놈을 죽여야 할 수도 있다.’
채호의 눈빛엔 살기가 가득해졌다.
이 모습을 본 두호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너 이 새끼 누가 보냈어?”
두호는 물끄러미 채호를 바라보았다.
분노로 거칠게 일어나고 있는 채호의 눈빛을 보며 툭 던졌다.
“그날 저녁밥은 병원에서 먹었냐?”
채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때 총 맞은 옆구리는 어때?”
지금의 말은 그날 자신이 도혁과의 마지막 상황이였다.
그 순간을 낯선 청년이 알고 있다.
“오랜만이야. 성공한 모습 보기 좋다.”
“뭐…?”
두호는 몇 걸음 다가왔다.
채호는 두호가 다가온 만큼 물러났는데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았다는 동작이다.
“무슨?”
“인터뷰에서 번듯하게 성공해 찾고 싶은 사람 있다 하지 않았어?”
두호는 자신의 입으로 말하기도 민망한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
“김도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