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쟁의 신이 케이지 안으로-8화 (8/204)

제 8화 : 전쟁의 신은 죽었다.

“이게 다 얼맙니까?”

“한 30억쯤 됩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보는 거액의 현금에 준모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준모는 삼십억이라는 말을 몇 번이나 중얼거리고 있었다.

두호는 캐리어에 손을 넣어 오만 원권 뭉치 여섯 개를 꺼내 준모에게 건네줬다.

“왜요?”

“동생만 여섯이라면서?”

“형님….”

준모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흥분과 기쁨보다는 충격에 매몰된 듯 한동안 멍한 얼굴로 바라보더니 중얼거린다.

“저 사실 동생 두 명입니다. 저까지 합쳐 삼 남매거든요.”

준모의 뜬금없는 고백에 두호와 수미의 부하들이 가볍게 웃었다.

사채업자 노릇 하며 제법 뒷골목 물을 먹었을 텐데도 솔직하다.

그건 천성이다.

준모의 천성은 순하고 솔직하다.

가방에서 한 덩이를 더 꺼내 얹어 주었다.

“앞으로 나와 일하는데 계약금이라고 생각해. 많이 바쁠 거야.”

“가문의 영광으로 알고 온 목숨을 다해 형님을 모시겠습니다!”

허리가 굽어지다 못해 아예 바닥과 수평을 이룬다.

넙죽 절을 하려는 것을 두호는 내버려 두었다.

좋아하는 것이니 좋아하는 대로 놔두는 것이다.

준모의 표정이 변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했다.

‘이분이다. 이 분이 내 인생 가장 큰 귀인이다.’

돈뭉치를 양손에 들고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수미가 다가왔다.

“이놈이랑 같이 왔길래, 저놈도 한 인물 하는 줄 알았더니만, 영 쭉정이네.”

준모는 수미를 바라보았다.

“이놈아. 사내놈이 돈 몇 푼에 절을 그렇게 넙죽 하면 어떡하냐. 더 크게 놀아야지.”

“할머니 눈 독 들이지마요. 내 꺼니까.”

준모가 돈을 꽉 끌어안고 기분 나쁘다는 듯 눈을 흘겼다.

수미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나머지 돈은 내가 조만간 세탁기 잘 돌려서, 널어놓으마. 아마 며칠 안 걸릴 거야.”

“네.”

수미는 두호에게 악수를 청했다.

“네놈 눈빛이나 말하는 게 도혁이놈 젊을 때 보는 것 같다. 잘하고. 또 연락하지.”

준모는 조심히 캐리어를 챙겨 밖으로 들고 나갔다.

무게가 상당한지 기우뚱하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이모. 가끔 도움받으러 오겠습니다.”

“너처럼 잘난 놈이 왜 날 찾아. 기회만 잘 받쳐주면 알아서 하겠구먼.”

두호는 마지막 캐리어를 직접 챙겨 들며 수미를 바라보았다.

“삼류는 기회를 기다리고. 일류는 기회를 만드는 거 아니겠어요?”

두호의 마지막 말을 들은 수미는 매우 놀란 표정이다.

자신이 아는 그 사내가 뱉었던 말이다

두호는 손을 들어 보인 후 주방을 나섰다.

수미는 한참을 서 있었다.

두호와 준모는 이미 식당에서 사라졌다.

“닮은 게 아니었네.”

“예?”

사내가 고개를 돌리자 수미는 선반에 놓인 생수를 들이마셨다.

창 밖으로 시선을 옮기니 돈 가방을 실은 차가 멀어져 간다.

자동차 라이트가 멀어지고 미등까지 가물가물해지더니 완전히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차는 사라졌지만,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오랫동안 침묵하는 수미에게 사내는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좋지 않은 일이라도?”

평소의 수미답지 않은 행동이다.

사색과는 거리가 멀다.

수미는 캄캄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더니 물결처럼 입가로 미소가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장사를 크게 해야 할 것 같다. 이 일을 접을 때가 된 건지 참.”

수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환히 떠 있는 북두칠성을 바라보았다.

‘저놈의 별이 오늘따라 밝구나.’

애먼 밤하늘을 노려본다.

17년 전.

“빨리 찾아 이 새끼들아!”

“네!”

어두운 산속에 살기가 가득했다.

수많은 사내들이 눈이 시뻘게져 누군가를 찾고 있었는데 목표물은 바로 수미였다.

몇 달을 준비하여 치밀하게 계획된 내부 반란으로 인하여 수미는 자신의 측근들과 도망치는 중이었다.

수미가 관리하는 고객들과 장부 그리고 거액의 돈은 회사(현성회) 내에서도 그녀만이 알고 있는 특급 기밀 사항이었다.

그녀를 쳐낸다면 그녀가 관리하는 모든 것이 자신들의 것이 되기에 추격하는 쪽과 도망치는 수미 모두 필사적이었다.

수미와 측근 사내들은 어두운 산을 미친 듯 달리고 있었다.

‘이래서 검은 머리 짐승들은 거두는 게 아니라 했구나.’

짧게는 10년에서부터 많게는 20년까지 자신과 이 바닥에서 함께 뒹굴었던 부하들이었다.

평소에 크게 섭섭하게 만든 일도 없었으니 욕심이 사람을 이렇게 만든다는 걸 이번에 다시 깨닫는다.

수미의 바로 옆에서 뛰던 사내가 말했다.

“저희 고객 중 한 명인 옐로우 맘바 캡틴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니 여기만 벗어나시면 분명히 도우러 올 것입니다.”

하지만 희망을 채 품기도 전에 절망이 찾아왔다.

맞은편에서 자신을 쫓는 사내들이 등장했다.

양쪽은 약속이나 한 듯 걸음을 세웠다.

쫘아악!

이십여 명의 사내들이 갈라지고 누군가 앞으로 나온다.

그다지 크지 않는 체격에 목이 짧다.

다부져 보이는 인상과 짧은 머리는 모르는 사람이 봐도 그가 굉장히 거친 사람이란 걸 알게 했다.

사내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체 침을 뱉으며 말했다.

“누님 한참 찾았습니다.”

“대철아.”

수미의 측근들이 그녀 좌우로 섰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는 맞은편의 사내는 수미의 오른팔.

아니 오른팔이었었다.

오랫동안 줄기와 가지로 지내다 보니 상하관계가 무색하게 속마음을 털어놓을 정도로 가까이 지낸 사이여서 더욱더 충격이었다.

“나이가 무색하십니다.”

“왜 이러는 거냐?”

사내 대철은 바지에 찔러 넣은 오른손을 꺼내 귀를 후볐다.

“식구는 늘어가고 사업은 점점 커지는데 어째 제 주머니는 커지질 않더라고요.”

“네놈 욕심이야.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만, 이 정도로 눈이 돌 줄은 몰랐구나.”

대철은 귓구멍을 후비던 오른손으로 부하의 손에 쥐어진 회칼을 가로채듯 빼앗았다.

“우리 인제 그만 합시다.”

수미 측근들이 앞을 막아섰다.

측근 중 가장 연장자인 우석은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희가 막겠습니다. 조금만 더 산 위쪽으로 올라가면 산죽 숲입니다. 워낙 산죽이 우거져 저놈들도 찾기 힘들 것입니다. 나머지는 하늘에 맡기시죠.”

“쓸데없는 소리. 같이 가자.”

수미가 우석의 팔을 끌었지만 꼼짝하지 않았다.

우석은 수미의 손을 가볍게 뿌리치며 미소를 지었다.

“이럴 때 밥값 해야죠. 거렁뱅이들 거둬 먹여주신 덕분에 팔자에도 없는 호사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은혜 갚겠습니다. 가십시오. 여긴 저희가 어떻게든 막겠습니다.”

우석은 비장한 표정으로 대철에게 말했다.

“대철아. 개가 주인을 물면 안되지.”

그 말을 들은 대철은 비웃었다.

“너나 개 해. 난 늑대 할라니까.”

싸늘한 비웃음을 뚫으며 우석의 측근들이 대철과 부하들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자 대철 쪽 사내들도 망설임 없이 마주 뛰어왔다.

안타까운 표정으로 싸움을 지켜보던 수미는 이를 깨물더니 산 위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수미의 거친 숨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다.

처참한 몰골이었다.

옷은 찢어지고 땀 때문에 머리는 헝클어져 도저히 수미임을 알아볼 수 없는 행색이었다.

자신을 위해 누군가 목숨을 던진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주는 것이 보답이고 은혜를 갚는 일이다.

하지만 수미의 간절한 바람은 이뤄지지 못할 것 같았다.

또다시 멀리서 네 명의 사내들이 전속력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늙고 약해진 자신의 다리는 더 이상 뛰지를 못하고 있었다.

손만 뻗으면 머리채를 낚아챌 정도로 사내들과 수미의 거리가 가까워졌을 때 누군가 옆에서 튀어나왔다.

픽!

수미는 마른 웃음을 지었다.

화려한 삶에 비해 마지막은 너무 싱겁다.

끝났다고 생각할 때 돌연 시커먼 그림자가 뒤에서 날아오더니 달려오는 첫 번째 사내의 가슴팍에 무릎을 꽂았다.

퍽!

사내는 한 방에 고꾸라졌고 일어서질 못했다.

방금까지 같이 뛰던 동료가 한 방에 나가떨어져 버리자 당황한 듯 세 명 모두가 멈춰 섰다.

학학!

수미는 헐떡거리며 몸을 돌렸다.

사내는 수미를 향해 비스듬히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였다.

“옐로우 맘바 캡틴 명령으로 온 김도혁입니다. 조금 늦었습니다.”

수미의 표정은 순간 밝아졌지만 이내 다시 어두워졌다.

옐로우 맘바들이 괴물인 것은 알고 있지만 겨우 혼자다.

캡틴 본인이 오더라도 암담한 상황에 부하를 보내다니.

수미의 어두운 표정에서 걱정을 눈치챈 도혁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얘기했다.

“제가 주먹질은 박래진 캡틴보다 조금 낫습니다.”

그리고는 사내들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슈욱!

가까이 있던 사내가 주먹을 뻗었다.

“넌 뭐야 이 새끼야!”

도혁은 주먹을 흘리며 순식간에 자신의 뒤쪽으로 업어 쳐버렸다.

맨바닥에 꽂힌 사내는 억 소리를 내며 쓰러졌고, 뒤따라 달려오는 사내도 주먹을 뻗어봤지만, 도혁은 그대로 팔을 낚아채 팔꿈치채로 꺾었다.

팔이 부러진 사내는 괴성을 지르며 바닥을 기었다.

“으어어!”

너무 간단하게 두 명을 제압한 도혁을 보고는 남은 한 명은 자신의 상대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

수미는 자신의 바로 옆에 큰 바위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틀린 것 같다. 자네라도 얼른 빠져나가게. 혼자선 갈 수 있지?”

잠깐 사이에 십 년은 늙어 버린 것 같았다.

도저히 방법이 없는 것 같다.

수 백의 사람들이 자신을 노리고 있었다.

계속되는 위기상황에 결국 수미는 의욕을 잃고 말았다.

‘그래. 이만하면 잘 살았다.’

도혁은 풀이 죽은 수미를 일으켜 세웠다.

“삼류들이 기회를 기다리지, 일류는 기회를 만드는 거죠. 제가 기회 한번 만들어보겠습니다.”

싱긋 웃어 보인 도혁은 수미를 일으켜 세워 함께 짙은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몇 시간 뒤 수미는 완전히 추적을 벗어났다.

수미 옆에 서 있던 사내는 매우 놀란 얼굴이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여전히 수미는 밤하늘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네가 입사하기 3년 전쯤 이야기다.”

수미는 사내의 어깨를 툭 쳤다.

“얼른 세탁기 돌려야겠다. 그놈한테는 내가 빚이 많아.”

두 사람은 다시 가게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

오늘따라 준모의 꺾이는 허리가 부드럽다.

“형님. 좋은 아침입니다!”

두호는 빙긋 웃으며 준모의 차에 올랐다.

깔끔한 체크무늬 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있는 모습을 보니 확실히 덜 익은 청년의 얼굴이다.

“형님 그렇게 입으시니까 태가 납니다.”

“알아봤어? 어제 알아보라는 것?”

준모는 차를 출발시키며 어제 두호의 부탁한 것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네. 필린의 회사 위치는 강남 논현역입니다. 그런데 워낙 거물이어서 만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준모는 여성지나 언론사 기자들 모두 채호와 인터뷰하려면 오래전에 약속을 잡아야 한다고 했다.

오늘 채호를 만나기 위해 필린으로 가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만나기가 어렵다면 허탕을 칠 수도 있다.

‘하긴’

일반 중소기업 회사도 아니고 아시아에서 가장 큰 스포츠 에이전시이다.

더욱이 자신은 도혁이 아닌 두호다.

“이 방법 어떨까요?”

준모가 눈을 빛냈다.

“텐트 치는 것까지는 아니어도 온종일 필린 앞에서 진을 치고 있는 겁니다. 그것도 아니면 확성기를 준비해 큰소리로 만나달라고 외치는 거죠? 시끄러우면 만나 줄지도 모르잖아요?”

의욕 넘치는 준모의 말에 두호는 그저 웃었다.

“일단은 가보자.”

준모는 기어를 바꾸며 비탈길을 내려갔다.

차는 동네를 벗어나 대로에 진입했다.

일단 찾아가기는 하지만 마음은 복잡했다.

‘괜히 잘살고 있는 애 삶에 또 내가 끼어드는 거 아닌가?’

삶이 바뀌면 인생관도 바뀔 수 있다.

전장의 전우가 사회에서도 전우가 된다는 보장은 없다.

채호와 가까운 사이지만 여러 가지로 걸리는 것이 많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용병 생활에서 부하인 채호가 사회에서는 인정받는 회사의 대표가 되었다.

그에 반해 자신은 가진 것 없는 스무 살 짜리 청년이다.

쉬지 않고 흘러나오는 두호의 한숨에 준모의 눈빛이 가라앉는다.

화려해 보이는 듯해도 어쩔 땐 짙은 그림자를 의복처럼 걸치고 있다.

자신이 모시는 사람은 일반적인 윗사람과 다르다는 게 조금 느껴졌다.

차는 한 시간가량을 달려 필린의 사무실이 있는 건물 앞에 도착했다.

“이대로 가요?”

기다리냐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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