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6화 본편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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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다.
이걸로 된 것이다.
각오하지 않았는가.
결국 이렇게 될 운명이었던 것을.
금발을 늘어뜨린 소녀는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무거운 근심을 담아낸 유리색 눈동자가 더욱 어둡게 짙어졌다.
“폐하…!”
“미천한 소신들을 용서해주시옵소서.”
한나라 부흥군의 마지막 시도마저 좌절되면서 황실은 더욱 고립되었다. 머지않아 위나라가 황위를 강탈하여 역천(逆天)의 완수를 선포할 터였다.
환관들이 고개를 조아리며 눈물을 흘렸다.
끝자락에 다다랐다.
머지않아 한나라는 몰락의 뒤안길로 퇴장할 터.
한나라에 충성해온 궁인들은 황제의 비참한 말로를 진심으로 슬퍼했다. 결국 선양을 결정한 유협을 바라보면서 오열을 쏟아냈다.
“눈물을 거두어라. 결국… 이렇게 될 운명이었다.”
부패와 반목을 이어나가며 천하를 난세에 빠트렸던 한나라는 멸망해야 마땅하다.
수많은 백성들을 도탄에 빠트렸으니 당연히 책임을 져야만 했다. 유협은 선조들께서 범했던 대죄를 스스로 떠안고서 멸망을 받아들였다.
“조조는 천하를 평정하여 태평성대를 이룩했다. 틀림없이 백성들도 약해빠진 황제보다는… 강인한 황제를 원할 것이다.”
한나라의 부패와 폭정으로 난세가 시작되었다.
평생 떠안아야 할 원죄였다.
그렇기에 유협은 속죄하고자 겸허히 멸망을 받아들였다.
역적에게 옥좌를 팔아넘긴 한나라의 마지막 황제로서 만대로부터 지탄을 받게 되겠지. 그럼에도 유협은 오욕을 짊어지기로 결정했다.
“그렇지 않사옵니다!”
“어찌 백성들이 한나라를 외면하겠사옵니까!”
궁인들이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유협은 알고 있었다.
백성들의 마음은 위나라를 향하고 있었다. 결국 민심마저 위나라를 선택한 것이다. 끔찍한 고통과 도탄을 감내했던 백성들은 한나라를 진심으로 원망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됐다. 그만 물러나도록 하라.”
“알겠사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오열하는 궁인들의 모습을 바라볼 때마다 마음이 미어졌다. 그래서 유협은 무거운 목소리로 궁인들을 대전에서 내보냈다.
근심이 깊어졌다.
그렇기에 혼자 있고 싶었다.
궁인들이 모두 나가자 고요한 적막이 내리깔렸다.
옥좌에 걸터앉은 유협은 애처롭게 떨리는 눈빛으로 대전을 훑어보았다. 정쟁과 혼란이 매번 벌어졌던 공간을 바라보면서 과거를 떠올렸다.
“흐윽…! 흐읏, 흐으윽!”
어째서일까.
홀로 남게 되자 눈물이 차올랐다.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연약한 황제는 구슬픈 울음소리로 애처롭게 마음을 쏟아냈다.
혹시라도 울음소리가 바깥까지 들릴까 입을 틀어막으며 고개를 숙였다. 상아처럼 아름다운 뺨을 타고서 통한의 눈물이 주륵주륵 흘러내렸다.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죄송해요…!”
누구에게 하는 사과일까.
그녀 본인도 알 수 없었다.
연이어 누군가에게 사죄하면서 뜨거운 눈물을 쏟아냈다. 뺨을 닦아내던 옷소매가 축축하게 젖어버릴 정도로 눈물이 그치질 않았다.
명석하고 총명한 재녀였지만 아직 어렸다.
가녀리고 연약한 어깨가 당장이라도 무거운 중압감에 무너져버릴 것 같았다.
“오라버니…!”
보고 싶다.
그저 한 사람이 보고 싶었다.
나를 지켜주었던 사람.
수많은 흉적들로부터 황실과 조정을 수호했던 경애와 동경의 대상.
유협은 사무치는 그리움을 토해내면서 경애하는 오라버니가 슬픔을 달래주기를 바랐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어주며 눈물을 닦아주기를 기다렸다.
“예, 부르셨습니까.”
간절한 염원이 닿은 것일까.
사내가 다가왔다.
유배지에서 돌아온 이성휘였다.
금발을 늘어뜨린 소녀는 경애하는 오라버니의 모습을 보자마자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양팔을 벌리면서 오라버니의 듬직한 품에 매달렸다.
“흐윽, 흐아아앙!!”
체면. 기품.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동년의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렸다.
지금까지 억눌러온 울분을 모두 폭발시키듯이 목청을 높이며 울었다. 분명 못난이처럼 보이겠지. 하지만 지금만큼은 모든 것들을 내던졌다.
“오라비, 오라비…!”
“예.”
“짐은…! 짐은, 정말… 옳은 결정을, 내렸는가…?”
“…….”
백성들을 위해 결단했다.
태평성대의 내일을 위해 멸망을 받아들였다.
옳은 결정일까?
과연 현명한 판단이었을까?
유협은 뇌리를 괴롭히는 두려움을 이성휘에게 그대로 털어놓았다. 당장이라도 중압감에 꺾일 것만 같았기에 전적으로 이성휘에게 의지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폐하의 결정이 현명한 판단으로 후세에 기록되도록… 반드시 태평성대를 이룩하여 만대의 번영을 쌓을 것입니다.”
후회로 남지 않도록.
원망과 죄책감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이성휘는 작은 황제를 다정하게 끌어안으면서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에 유협은 눈물을 주륵주륵 흘리면서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응, 응…! 오라비는, 오라비는 믿을 수 있다! 지금까지 쭉 믿었으니까… 오라비의 말을 믿겠다…!”
꾸욱-.
허리를 껴안았다.
오라비라면 믿을 수 있다.
경애하는 오라비에게 절대적인 믿음을 보였다.
“부디 백성들을… 무능한 황실 때문에 난세를 치렀던 백성들을… 부디 부탁하겠다, 오라버니.”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제 무거운 중압감을 내려놓으셔도 됩니다.”
한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유협이 선양을 결정하면서 4백 년 동안 이어진 역사를 닫게 되었다.
난세가 종결되었다.
천하 13주가 마침내 통일되었다.
군웅할거의 영웅들을 쓰러트리고 천하를 제패한 조조가 황위를 계승했다. 강력한 대의명분을 짊어진 위나라는 한나라의 후예임을 자처하면서 새로운 왕조가 들어섰음을 만천하에 알렸다.
* * *
위왕(魏王) 조조가 천제(天祭)를 주관했다.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
그것은 새로운 황제로 즉위했음을 뜻했다.
선양을 결정한 한나라로부터 권력을 계승받은 위나라는 새로운 후예임을 선포하면서 천명(天命)을 거머쥐게 되었다.
“교활하고 탐욕스러운 역적들이 사방에서 창궐하여 이치가 혼란에 빠지고 법도가 무너졌습니다. 이에 신이 대의명분의 기치를 치켜들고서 천하를 평정했습니다. 한나라의 황제로부터 황위를 건네받아 천명을 받들고자 하오니, 부디 하늘께서는 만백성들을 위해 위나라의 계승을 인정해주시옵소서.”
흑발을 늘어뜨린 여인이 문무백관들을 이끌고서 제단에 섰다. 뒤이어 제문을 읊으면서 위나라가 한나라를 계승하였음을 하늘에 선포했다.
한(漢)의 역사는 끝났다.
이제 위(魏)의 천하가 시작되리라.
천명을 계승함으로서 만승천자에 즉위했다.
패국조씨 가문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거머쥔 중원의 황실이 되었음을 의미했다. 조홍과 조인은 감격에 벅찬 표정으로 조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역경들을 견뎌냈다.
수많은 위기와 혼란들을 이겨냈다.
칠난팔고의 대업을 달성했다.
마침내 천하통일을 이룩한 난세의 간웅이 만승천자에 즉위하였다.
“요 임금께서 순 임금에게, 순 임금이 우 임금에게 황위를 물려주었듯이 짐은 한나라의 황제에게 황위를 양도받아 천명을 거머쥔 천자가 되었다.”
조조가 일어서며 천제에 참석한 문무백관들을 호령했다. 그에 신하들은 예를 취하면서 새로운 만승천자의 명령을 받들었다.
“한나라를 대신하여 천명을 이끌게 되었다. 만천하에 위나라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겠다.”
연호를 황초(黃初)로 바꾸었다.
휘호를 개정하고 율볍과 도량형을 통일하라는 황명을 내렸다. 뒤이어 새로운 법령들을 선포하여 엄격한 법치국가로서의 기틀을 쌓았다.
“황제 폐하 만세.”
중신들의 선두에서 조조를 보필하던 이성휘가 양손을 들어올리며 외쳤다.
뒤이어 중신들도 일어섰다.
새로운 황제에게 만세삼창을 부르면서 즉위를 진심으로 환영했다.
“만세! 만세!”
“황제 폐하 만만세!!”
우렁찬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리면서 천명을 거머쥔 주인을 받들었다. 이성휘 또한 조조를 응시하면서 만세삼창을 이어나갔다.
대업을 완수했다.
드디어 오랜 야망이 이루어졌다.
이성휘는 오랜 추억들을 회상하면서 나지막한 미소를 지었다. 수많은 역경들을 이겨내며 권력의 정점까지 도달한 여걸에게 찬사를 보냈다.
“모두… 성휘 덕분일세.”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영광입니다, 폐하.”
손을 내밀었다.
그에 조조가 웃으면서 맞잡았다.
천하를 통일했다.
그리고 천명을 받드는 황제가 되었다.
이성휘와 조조는 찬연한 영광을 나누면서 서로에게 미소를 지었다. 역경과 고난들을 함께 돌파했던 반려와 함께 군웅할거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 * *
만약 이성휘가 없었다면….
과연 짐이 천하를 거머쥘 수 있었을까?
아니,
결코 불가능했겠지.
조조에게 있어 이성휘는 사랑하는 반려이자 천하통일의 일등공신이었다. 그에 조조는 어떤 포상들로 사랑스러운 천하제일검을 예우할까 고민했다.
‘우선은 왕에 책봉해야지. 자렴과 자효보다 먼저 왕에 책봉하여 공적에 보답해야겠어. 성휘는 천하를 대표하는 최고의 명장이니까.’
모두 남편 덕분이다.
그렇기에 오늘은 현모양처로서 마음껏 남편의 응석을 받아주려 했다.
목욕을 재계했다.
또한 밤일을 위한 야한 속옷도 입었다.
준비는 매우 완벽했다. 이제 남편의 집무실에 뛰어들어 야한 도발을 하는 일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성휘, 정말 축하해요. 천하통일도 이뤄냈으니 우리들의 혼례도 머지않았네요.”
“크흠! 조금만 더 크면…, 짐도 오라비의 처첩이 될 거다! 무, 물론 짐은 지금도 괜찮지만….”
농염한 매력을 발산하는 미녀와 풋사과처럼 생기발랄한 미소를 머금은 소녀가 옆을 꿰차고 있었다.
도둑년들,
언제 숨어들었단 말인가.
천명을 거머쥔 황제는 사랑스러운 남편을 유혹하는 계집들을 보며 적의를 드러냈다. 야릇하게 교태를 부리는 모습이 음란한 가희(歌姬)들을 보는 듯했다.
“당장 짐의 반려에게서 떨어져라!”
매서운 불호령을 내렸다.
하지만 통용되지 않았다.
이성휘에게 달라붙은 여인들은 합법적인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성휘와 혼례를 치르게 될 텐데, 대체 무엇이 그렇게 불만인가요? 하북까지 내어줬는데.”
하북의 패권을 양도하는 조건으로 이성휘의 처첩이 되었다. 원소는 업성에서 나눈 약조를 내세우면서 조조의 불호령을 받아쳤다.
“짐도 이하동문이다. 그대에게 황위를 물려주는 조건으로 오라비의 처첩이 되기로 했다, 벌써 천지신명의 이름을 걸고 맹세했던 약조를 잊었는가?”
만승천자의 옥좌를 위나라에 넘겨주는 조건으로 이성휘의 처첩이 되었다. 유협은 당당한 목소리로 불륜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저,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조조의 날카로운 눈빛이 황제처럼 경국지색의 미녀들을 양측에 꿰차고 있는 이성휘를 향했다.
이성휘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질투의 화신으로 돌변한 아내를 외면했다.
이번만큼은 억울하다.
애초에 불륜을 허락한 쪽은 본인이 아닌가.
천하를 통일하고 황제에 즉위하는 영광을 거머쥐었음에도 남편을 독점하지 못했다. 남편을 공유하는 것을 조건으로 옥좌에 올랐기 때문이었다.
자가당착(自家撞着).
지금의 조조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사자성어였다.
“당장 나가! 당장 나가아아아아!!!”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질투가 응축된 사자후가 궁궐을 가득 메웠다.
조조군으로 천하통일까지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