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1화>
==============================
끼익-.
대문을 열고 들어섰다.
익숙한 정경이 펼쳐졌다.
역시나 추억 속에 새겨진 그대로였다.
그리움에 차오른 눈길로 정경을 훑어보던 이성휘는 이윽고 발걸음을 내딛었다. 뒤이어 소식을 들은 시녀들이 달려나와 저택의 가장을 맞이했다.
“대, 대장군!”
“돌아오셨사옵니까….”
모두 대경실색한 모습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반가이 웃으면서 맞이했겠지만… 시녀들은 크게 두려워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알고 있다.
속마음을 어찌 모를까.
집안 서열 1위이신 안주인의 노여움이 두렵겠지.
시녀들이 고개를 내저으면서 크게 만류했음에도 이성휘는 주저하지 않았다. 과연 용맹한 담력을 자랑하면서 아내의 노여움을 기다렸다.
담대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미련스럽다고 해야 할지….
저택의 시녀들은 위왕의 불호령을 경계하면서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곧이어 벌어질 사태를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성휘.”
“아만.”
무겁게 내리깔린 적막.
그를 관통하듯 여인의 매서운 목소리가 울렸다.
흑발을 늘어뜨린 여인과 재회한 이성휘는 두려움을 애써 억누르면서 다가섰다. 두 눈으로 사랑하는 여인의 모습을 담아내며 예를 취했다.
“천하를 정벌하고 돌아왔습니다.”
천하통일의 승전보를 알렸다.
그에 조조가 대답했다.
“아주 뻔뻔하게도 낯짝을 내비치셨군. 성휘는 정녕 후환이 두렵지 않은가? 하긴 후환을 두려워했다면 현모양처를 배신하는 후안무치한 작태를 범하지 않았을 테지.”
차갑고 냉혹한,
한에 사무친 목소리가 울렸다.
날카로운 불호령이 내려지자 시녀들은 창백한 낯빛으로 고개를 숙였다. 혹시라도 자신들에게 불똥이 튈까 노심초사하는 모습이었다.
“어떻게 감히 변명을 하겠습니까.”
“그래, 매번 변명을 하지 않았지. 나도 진심으로 성휘에게 벌을 내리지 않았고.”
까득-.
이를 갈며 말했다.
붉은 눈동자가 유황불처럼 살벌하게 번뜩였다.
적의가 확산되었다.
무거운 위압이 좌중을 압도했다.
그럼에도 이성휘는 결연한 모습으로 처분을 기다렸다. 평소와 다름없는 남편의 반응에 조조는 노여움을 불태우면서 주먹을 거머쥐었다.
“당장 꺼지게. 그 낯짝을… 보고 싶지 않으니.”
팔짱을 끼며 명령했다.
당장 찬물을 끼얹겠다.
그 경고는 결코 허언이 아니었던 걸까.
이윽고 노복들이 양동이를 가져왔다. 물을 가득 들었는지 찰랑대는 소리가 났다. 이성휘와 마주친 노복들은 황망한 표정을 지으면서 계속 머뭇거렸다.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아니, 내일도 마찬가지일세. 뻔뻔하게 거짓을 속삭였던 철면피를 당분간은 보고 싶지 않다.”
관용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
꺼져.
보기 싫으니까.
애증을 담아 축객을 명령했다.
숙연해진 남편의 모습에 와신상담하며 독기를 품었던 마음이 약해졌다. 하지만 조조는 망설임을 억누르면서 이성휘를 표독스럽게 노려보았다.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부디… 몸조리에 유념해주십시오.”
홀몸이 아니다.
아이을 품고 있는 상태였다.
혹시라도 조조에게 불상사가 벌어질까 우려한 이성휘는 불륜을 사죄하면서 돌아섰다.
겸허하게 물러서는 이성휘의 모습에 조조는 눈가를 바르르 떨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혹시라도 약한 소리를 낼까 두려웠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갈 곳이 없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한참을 망설이던 이성휘는 아내이자 처제였던 조홍과 조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녀들은 허도에서 가장 든든한 아군이었으니까.
“흥, 무슨 낯짝으로 오셨나 몰라.”
하지만,
반응이 매우 쌀쌀맞기만 했다.
흑발을 늘어뜨린 여인이 퉁명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이성휘를 노려보았다.
언니를 기만하고 처첩들과 놀아난 난봉꾼을 힐난했다. 조홍은 불만이 가득한 모습으로 이성휘를 대하면서 적개심을 내비쳤다.
“다음은 제가 되어야 마땅한데… 어째서 다른 여자들이 먼저 임신을 한 거예요? 부당하잖아요!”
선수를 빼앗겼다.
후발주자에게 추월당하고 말았다.
서방님의 아이를 먼저 임신하다니!
바닥을 쿵쿵 내리찍으면서 질투심이 가득한 불만을 터트렸다. 선머슴이나 다름없는 하후돈에게도 선수를 빼앗겼다는 사실에 원통함을 토로했다.
“죄송합니다.”
“흥, 이제 몰라요!”
“하지만… 지금 자렴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총애하는 시녀들에게 가서 도움을 받으시죠? 서방님에게 소박맞은 저한테 도움을 바라지 말고요.”
흥-!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뻔뻔한 사람.
이제 와서 도움을 요청하다니.
지금까지 사랑하는 서방님의 귀환을 간절하게 기다렸다. 무탈한 모습으로 와줘서 기뻤다. 하지만 조홍은 애써 속마음을 억누르면서 뾰족한 투정을 부렸다.
“대장군,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자효.”
흑발을 늘어뜨린 단아한 여인이 다가오면서 이성휘에게 정중히 예를 갖췄다.
툭툭대는 조홍과는 달리,
조인은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대했다.
냉철함을 머금은 눈빛과 섬세한 이목구미를 자랑하는 미녀는 언제나 침착했다. 바람둥이 남편에게 앙심을 품을 만도 했음에도 결코 내색하지 않았다.
“사실은 서방님이 돌아오셔서 기쁜 주제에…. 어린애도 아니고 응석 좀 그만 부려.”
“아, 아니거든?!”
조인이 고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에 조홍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기, 기쁘기는-!
하나도 안 기쁘거든!
잘 익은 홍당무처럼 얼굴을 붉히면서 반박했다. 그에 이성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면서 조홍과 조인을 바라보았다.
“그저 죄송할 뿐입니다. 미안합니다. 자렴, 자효.”
진심을 담아 아내들에게 사죄했다.
이유를 불문하고 아내들이 외로움을 느꼈다면 그것은 분명 남편의 책임이리라. 성심성의를 담아 보필해도 모자랄 판국에 외로움을 느끼게 만들다니….
우둔함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다.
결국 그녀들에게 인내를 강요하고 말았으니까.
“흥, 그러니까… 앞으로 잘하시라구요.”
조홍이 새침한 반응을 보였다.
“저는 괜찮습니다. 서방님께서 무사하신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니까요.”
조인은 미소로 화답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바람둥이에 파락호인 남편에게 관용을 베풀어준 아내들에게 감사를 전했다.
앞으로 패국조씨 가문의 여식들에게 최선을 다하겠노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이런 못난 남편을 끝까지 믿어줬으니까.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 언니의 노여움이 쉽게 풀릴 것 같지가 않던데…. 이번에는 서방님도 위험해질지도 모른다고요.”
조홍이 팔짱을 끼며 이성휘에게 물었다.
과연 대책이 있을까.
물론 마땅한 대책이 없겠지만.
완전히 마음을 돌려버린 언니를 설득하기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보다도 어렵겠지. 조홍과 조인은 이성휘를 위해 고민을 거듭하면서 방도를 구상했다.
“앞으로의 대업을 위해서라도… 분열이 장기화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게다가 언니께선 아이를 가지신 상태입니다. 건강에 여파를 미칠까 우려스럽군요.”
조인이 냉철한 목소리로 우려를 표시했다.
맞는 말이다.
이성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거머쥐었지만 여전히 많은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위나라를 지탱해온 위왕과 대장군이 불화에 휩싸였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불순한 무리들이 들고 일어설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앙이와 비아를 동원하는 건 어떨까? 금지옥엽처럼 아끼는 아이들이 화해를 권한다면… 언니께서도 분명 마지못해 받아들이실 텐데.”
“음. 나쁘지 않은 방법이네.”
조홍과 조인은 서로 의기투합하며 언니를 설득하고자 심혈을 기울였다. 앞으로의 대업에 크나큰 파장을 미치게 될 테니까.
여러 방법들을 마련했다.
우애가 깊은 사촌동생들답게 조조의 속마음을 훤히 꿰뚫고 있는 것 같았다.
“일단 제가 먼저 나서보겠습니다.”
“네?”
의견을 쑥덕쑥덕 나누고 있었을 때,
이성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갑자기 비책이라도 떠올랐는지-.
아내에게 쫓겨난 남편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면서 아름다운 처제들을 바라보았다.
* * *
하루 뒤.
이성휘는 다시 저택을 찾았다.
용서를 구하기 위함일까.
화사한 꽃다발을 들고 아내에게 향했다.
“푸훕!”
곧바로 물벼락이 가해졌다.
이성휘의 행동을 예측한 조조는 뻔뻔스럽게 돌아온 불청객에게 응징을 가했다.
시녀들이 양동이를 들었다.
바람둥이 남편이 대문으로 들어오자마자 찬물로 따귀를 갈겨버렸다.
강제적으로 동원된 시녀들은 흠뻑 젖어버린 이성휘를 바라보면서 황망함을 금치 못했다. 작은 목소리로 가장에게 사죄하며 뒤로 물러섰다.
“아만, 지금까지 매번 배신했습니다. 우둔하고 못난 지아비를 부디 꾸짖어주십시오.”
다음 날-.
새로운 꽃다발을 들고 저택으로 돌아왔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물벼락이 가해졌다.
곧바로 우물에서 퍼왔는지 얼음장처럼 매서운 찬물이 작렬했다. 대청마루에 앉은 조조는 초라한 몰골이 되어버린 남편의 모습에 코웃음을 쳤다.
“아만.”
하지만 이성휘는 돌아서버린 아내를 설득하고자 도전을 포기하지 않았다.
쏟아지는 물벼락.
매번 물에 빠진 생쥐가 되어 돌아갔다.
그럼에도 꿋꿋하게 화사한 꽃다발을 들고서 아내에게 사죄했다. 스스로 고행을 짊어지려는 죄인처럼 일부러 물벼락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만.”
그로부터 나흘째.
이성휘가 찾아와 용서를 구했다.
대청마루에 앉아서 한가롭게 찻잔을 기울이던 조조는 밉살스러운 남편을 노려보았다. 이윽고 조조는 찻물을 그대로 흩뿌리려 했다.
“아.”
찻물이 뜨겁다.
그대로 흩뿌리면 다치겠지.
조조는 후후 바람을 불면서 찻물을 식혔다.
이윽고 찻물이 식으면서 미지근하게 변하자 바람둥이에게 휘둘렀다. 찻잔에 담긴 찻물이 왈칵 쏟아지면서 이성휘의 얼굴을 강타했다.
“푸훕!”
얼굴을 감싸는 미지근한 온기.
찻물의 진한 향기가 얼굴 전체를 뒤덮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우물물을 뒤집어쓴 이성휘는 이윽고 미지근한 찻물까지 뒤집어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