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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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군이 양양성을 점령하자 이성휘는 제장들을 거느리고서 양양채씨 가문의 항복을 받아들였다.
양양성이 함락되었다.
유표가 죽고 측근들이 모두 체포되었다.
투항해온 형주의 호족들로부터 환대를 받으면서 양양성에 입성했다. 경의와 두려움이 담긴 시선들이 전쟁에서 승리한 이성휘에게 몰려들었다.
“소, 소신이… 형주자사 유표의 차남, 유종입니다.”
유약한 인상의 청년이 양양성의 호족들을 대동하고서 이성휘의 발치에 바짝 엎드렸다.
혹시라도 불호령이 떨어질까 유종은 온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식은땀을 흘렸다. 곧이어 이성휘의 시선이 향해지자 떨림은 더욱 심해졌다.
“훌륭한 결단을 내려주었다. 황실과 조정을 대표하여 감사를 전한다.”
“예, 예….”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이성휘는 유종을 너그럽게 받아들였다.
항장들은 자비로 맞이한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유종과 호족들에게 인정을 베풀었다.
유표를 추종했던 형주의 호족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양양성의 함락은 요원했을 터. 그렇기에 투항해온 이들을 형주 정벌의 공신으로 삼았다.
“대장군의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그저… 아량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대장군 어르신.”
단아한 예복을 입은 여인이 무릎을 꿇었다.
유표의 아내,
채씨였다.
채씨는 양양채씨 가문의 장수들을 거느리고서 조조군을 맞이했다. 양양성을 점거한 중원의 장졸들이 약탈이라도 벌일까 노심초사하며 눈치를 살폈다.
조조군은 결코 백성들을 수탈했던 적이 없다.
또한 투항해온 사대부와 호족들을 괄시했던 경우도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안했다.
저들은 당당히 무혈입성에 성공한 정복자였으니까.
“병사들을 투입하여 화재를 진화하라. 양양성의 백성들이 결코 동요해선 안 된다.”
“예…! 대장군.”
그런 불안을 끊어내기라도 하듯,
이성휘는 투항을 받아내자마자 양양채씨 가문의 장수들에게 수습을 명령했다.
약탈을 철저히 엄금한다.
군율을 어기는 장졸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참수하겠다.
노심초사하며 눈치를 살피던 호족들의 두려움을 덜어주고자 대장군의 이름으로 군령을 내렸다. 그에 위나라 장수들은 예를 취하면서 명령에 복종했다.
“수고했다.”
“…예, 대장군.”
조운이 낯빛을 흐리면서 대답했다.
유표가 스스로 목을 매달았다.
대체 내부에서 무슨 문답을 나눴던 걸까.
단둘이서 독대를 나눴던 유비가 내실에서 나오자마자 사고가 벌어졌다. 하지만 조운은 그것을 숨기고서 유표가 스스로 목을 매달았다는 사실만을 보고했다.
“국적의 수급을 수습해라. 나머지 시신은 양양채씨 가문에 양도하여 후하게 장례를 치르도록 해줘라.”
“알겠습니다.”
수급만 필요할 뿐이다.
국적을 참수했다는 중요한 증거물이었으니까.
장례를 치르도록 허락했다.
비록 유표는 국적으로 선포된 역도였지만 지금까지 형주를 훌륭하게 통치해온 인물이었다. 또한 그를 선망하는 호족들이 적지 않았기에 자비를 베풀었다.
“공자.”
“부, 부르셨습니까…. 대장군 어르신.”
이성휘가 불렀다.
그에 유종이 가까이 다가왔다.
낯빛이 새하얗게 질린 상태였다.
정복자를 앞에 두고서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버지를 배신하여 죽음으로 내몰았던 참혹한 패륜아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성휘는 유종과 함께 양양성의 시가지를 걸으면서 항장의 예우를 해주었다.
“어려운 결단을 내려주었다.”
“…아, 아닙니다.”
“무혈입성에 성공했으니 나도 약조를 지키겠다.”
“감읍할 따름입니다…!”
이성휘는 호족들과 함께 투항하여 무혈입성의 공신으로 등극한 유종을 열후(列侯)에 책봉했다. 투항해온 호족들에게도 벼슬을 내리는 성의를 보였다.
그리고 또한,
사대부와 호족들을 대표하는 양양채씨 가문과 양양괴씨 가문에게 형주의 내정을 임시적으로 위임했다.
대장군부의 인물에게 형주의 내정을 위임하면 혼란과 동요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터. 이성휘는 참모들과 상의하여 유종을 잠시 형주자사의 직위에 앉혔다.
“그리고 유기를 살려주겠다. 척박한 변방으로 유배를 떠나게 되겠지만 죽는 것보다는 낫겠지.”
“평생 대장군의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모르쇠로 일관할 만도 하건만,
이성휘는 투항에 붙은 조건들을 모두 이행했다.
약조는 반드시 지킨다.
행동에서 확고한 신념이 느껴졌다.
임시로나마 부친을 계승하여 형주자사에 임명된 유종은 감읍한 목소리로 감사를 표시했다. 충성을 다하겠노라며 진심으로 맹세했을 정도였다.
“모친께서 정말 미인이더군.”
“예?”
“그냥 해본 말이다.”
“예에….”
유부녀에 환장하는 정사의 조조였다면 당연히 아름다운 미망인에게 눈독을 들였겠지.
하지만 자신은 달랐다.
유부녀보단 처녀를 선호했으니까.
농밀하고 요염한 눈웃음을 흘리는 유부녀의 매력이 대단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정벌을 나서면서 답답한 주박으로부터 해방된 이성휘는 자유를 만끽했다. 후폭풍이 두려워 다른 여자들을 건들진 않았지만 여색을 탐하고 싶다는 본능이 스멀스멀 모습을 드러냈다.
“위나라의 봉신으로서 형주를 다스려라. 만약 위험에 처한다면 언제든지 도와주겠다.”
한나라의 영토가 아니다.
형주는 이제 위나라의 영토가 되었다.
더욱이 형주자사도 위나라의 봉신으로서 형주를 다스리게 되리라. 복종과 지배를 조건으로 평화와 안전을 약속해주었다.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위나라를 중원의 왕조로 옹립하고자 형주 정벌을 시작했다. 유표의 차남인 유종을 위나라의 봉신으로 임명하여 천하통일의 완수를 위한 발판으로 삼았다.
* * *
장강에서 대패했던 채모는 무관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돌아왔지만 이미 전쟁은 종결된 뒤였다.
세력이 멸망했다.
양양성의 성루에서 휘날리는 위나라의 군기들이 냉혹한 현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겨, 결국… 조조군에게 멸망했단 말인가! 매형께서 무너지다니…!”
툴썩-.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웅대한 꿈이 꺾였다.
대업을 완수하지 못하고 반란군으로 남게 되었다.
충성을 다해 유표를 보필했던 채모는 대경실색하며 패배를 한탄했다. 한나라를 떠받칠 새로운 황제를 옹립하겠다는 대의가 무너졌음에 통한을 쏟아냈다.
“누님께서 항복하셨습니다.”
“형님…! 이제 모두 끝났습니다, 우리들도 위나라에 투항해야 합니다!”
양양채씨 가문의 함선들을 지휘했던 채중과 채화가 격앙된 목소리로 종형(從兄)에게 진언했다.
둘째 공자가 형주자사에 임명되었다.
주군을 배신하고 투항했던 호족들도 위나라에게 지위를 인정받았다.
양양성을 정복한 이성휘가 모든 항장들에게 자비를 베풀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에 채중과 채화는 위나라에 투항할 것을 간언했다.
“큭! 나더러 패배를 받아들이란 말이냐!”
매형이 스스로 목을 매달고 죽었다.
그런데 원수나 다름없는 놈들에게 머리를 조아려야 한단 말인가.
끝까지 싸우다가 죽겠다.
채모는 칼자루를 뽑아들 기세로 전의를 내비쳤다.
“어리석은 짓은 그만두어라. 이미 끝났다. 양양채씨 가문의 장수가 무의미한 개죽음을 당할 셈이냐.”
동생이 무사히 양양군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서 달려온 채씨가 엄중한 목소리로 힐난했다.
만용이다.
무력한 용기에 불과하다.
충성으로 포장한 혈기에 지나지 않았다.
끝까지 결사항전을 벌인다면 유표를 추종했던 심복들처럼 처절히 몰락하게 되겠지. 결코 그것을 좌시할 수 없었던 채씨는 전력으로 동생을 막아섰다.
“양양채씨 가문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우리들은 이제 위나라의 봉신이 되기로 결정했다. 그러니 경거망동을 그만두고 대장군의 발치에 무릎을 꿇어라. 그것이 유일한 살길이다.”
끝났다.
모두 끝났단 말이다.
누이의 날카로운 단언이 마음을 찢어발겼다.
유표군은 멸망했다.
이제 형주는 위나라의 통치를 받게 되리라.
“알겠습니다. 위나라에… 항복하겠습니다.”
성루에서 펄럭이는 위나라의 군기들을 사납게 노려보던 채모는 결국 현실을 마주했다. 형주를 오랫동안 통치해온 대명문가의 지위를 위해서였다.
* * *
구사일생으로 전선을 탈출했던 채모는 패배를 결국 인정하며 위나라에 투항했다.
도독(都督) 채모가 무릎을 꿇었다.
유표의 처남이자 측근이었던 채모의 항복으로 끝까지 중립을 고수하던 사대부와 호족들이 술렁였다. 결국 유표군이 완전히 멸망했음을 통감하면서 위나라에 종속의 뜻을 밝혀왔다.
“국적을 보필하여 천하를 어지럽힌 행위를 크게 힐책해야 마땅하나… 일찍 투항하여 양양성을 해방시킨 양양채씨 가문의 공적을 참작해서 평남장군에 임명하겠다.”
이성휘는 장강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적장에게 아량을 베풀었다. 형주를 원활하게 통치하기 위해서였다.
채모를 평남장군(平南將軍)에 임명했다.
또한 장윤을 평로장군(平虜將軍)으로 임명했다.
형주의 군권을 맡겼다.
유표군에서 봉행했던 것처럼 앞으로 위나라에 충성하라는 의미였다.
채모와 투항했던 채중과 채화까지 위나라의 무관으로 임명한 이성휘는 즉석에서 명령을 내렸다.
“전군을 동원하여 형남 4군을 복속하라.”
형남 4군(荊南 四郡).
이성휘가 남형주(南荊州)의 복속을 명령했다.
영릉군(零陵郡). 계양군(桂陽郡).
무릉군(武陵郡). 장사군(長沙郡).
남형주는 매우 불안정한 변방이다.
유표가 관료들을 파견하여 통치를 시도했음에도 결국 실패했다. 척박하고 험준한 산세와 사나운 오랑캐들로 인해 점령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채모와 장윤은 형주를 대표하는 명장이었기에 그들을 기용하여 남형주 정벌에 내세웠다. 그에 항장들은 기꺼이 받들겠다며 예를 취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기필코 승전보를 가져올 것입니다.”
비록 유표군은 양양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게 되었지만 군사력은 여전히 막강했다.
사대부와 호족들의 병력을 모두 동원한다면 수만에 육박하는 정벌군을 편성할 수 있겠지. 채모와 장윤이라면 틀림없이 성공해내리라.
“…조금 피곤하군.”
제아무리 철인이라고 하더라도 완전히 피로를 느끼지 않는 무통은 아니었다.
항장들을 내려보낸 뒤,
이성휘는 무거운 눈꺼풀을 짓누르면서 피로를 호소했다.
유표군을 멸망시키고 잔존세력을 온전히 흡수했다.
강행군을 거듭하면서 형주를 정벌한 이성휘는 무거운 피로감을 느꼈다. 하지만 업무들이 산더미처럼 쌓인 상태였기에 결코 태만을 범할 순 없었다.
피로에 지친 참모들에게 휴식을 명령했던 이성휘는 묵묵히 군중에서 업무를 처리해나갔다.
“대장군, 익주에서 낭보가 도착했습니다!”
잠깐의 선잠을 고민하고 있었을 때,
해이해진 긴장감을 재촉하듯 익주에서 급보가 도착했다.
“반란군에게 축출당한 유장이… 백제성에서 관료들과 함께 투항을 요청해왔습니다!”
백제성(白帝城).
형주와 매우 근접한 익주의 성채였다.
반란군에게 축출당한 것이 틀림없는 듯했다.
유언군의 잔당들이 전역에서 거병한 반란군에게 성도(成都)를 빼앗겼다. 세력과 영토들을 모조리 강탈당한 유장은 결국 이성휘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결국… 익주까지 손에 들어오는군.”
이제 끝났다.
천하통일이 눈앞에 다가왔다.
형주가 무너졌다.
뒤이어 익주 또한 흔들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분골쇄신하며 노력을 거듭해온 정성을 인정받은 것처럼 천운이 뒤따라왔다. 그에 이성휘는 강한 희열을 느끼면서 주먹을 거머쥐었다.
“어르신! 허도에서 서한이 도착했습니다.”
과연 부부는 이심전심이라는 걸까.
조조가 이성휘에게 친필서한을 보내왔다.
승리를 축하하는 내용일 터.
이성휘는 기쁜 마음으로 편지를 열어보았다.
그러나-.
『돌아오면 넌 진짜 죽었어.』
“…….”
편지에 담긴 내용은 최종통첩이었다.
들켰다.
발각당한 게 틀림없었다.
마침내 아내에게 들켜버리고 말았다.
천하통일의 완수가 머지않았다는 뜨거운 희열이 차갑게 식어버렸다. 이를 빠득 갈면서 유황불처럼 사나운 질투를 불태울 아내의 모습을 상상하자 모골이 송연해졌다.
죽었다.
이번에야말로 진짜 죽는다.
눈앞이 점점 캄캄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