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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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성이 함락되었다.
유표와 유기가 붙잡혔고 결사항전을 주장했던 장수들 또한 양양채씨 가문이 제압했다.
결국 형주가 떨어졌다.
사방에서 솟구치는 매캐한 연기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호족들의 반란으로 인해 유표군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국적을 추포하러 왔습니다.”
회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인이 대장군부의 친위기병들을 대동하고서 내성을 장악했다.
사태를 수습하던 양양채씨 가문의 장졸들과 마주한 조운이 무거운 목소리로 유표의 신병을 물었다. 이성휘에게 받은 밀명을 완수하기 위해서였다.
두 눈이 위험하게 빛났다.
조운의 날카로운 눈빛에 양양채씨 가문의 장수들은 두려워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일단 내실에 가둬두었소만….”
반역을 지휘했던 장윤이 입을 열었다.
실로 불쾌하다.
자신들을 괄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다짜고짜 쳐들어오다니. 기병들을 동원하여 겁박하려는 듯한 모습으로 보였다. 그에 장윤은 목소리에 불쾌감을 담았다.
“잠시 형주자사와 독대를 나눌 수 있을까요.”
새하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인이 살포시 웃으면서 장윤과 휘하 장수들에게 다가왔다.
부드러운 선의를 내비치는 여인의 반응에 경계심이 순간 걷히게 되었다. 장윤은 헛기침을 흘리면서 여인에게 물었다.
“가능은 하오…. 그런데 귀관은 누구시오?”
고귀한 기품이 느껴진다.
지위가 높은 여인임이 틀림없었다.
대장군부의 친위기병들을 지휘하는 여걸이 계속 존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기에 장윤은 정중하게 예를 갖추면서 여인을 대했다.
“제후 유비입니다.”
장윤이 경악을 토해냈다.
그를 호위하던 형주의 장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제후(齊侯) 유비.
유표와 마찬가지로 한나라의 종친이자 황실과 조정으로부터 제후에 책봉된 여걸이다.
위나라의 동맹으로 참전하여 수많은 군벌들을 제패했던 유비군. 천하의 효웅으로 평가받는 여걸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한나라의 종친이 아닌가!’
‘어르신께서 은밀히 동맹을 맺으려고 했었던…!’
형주의 장수들이 아연실색하며 물러섰다.
제나라의 제후.
감히 대적할 수 있는 신분이 아니다.
후환이 두려웠던 양양채씨 가문의 장수들은 신속하게 유비를 유표를 구금해둔 내실로 안내했다. 그리고 조운과 친위기병들이 유비를 뒤따랐다.
“유비 님….”
“저는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내실에 당도했다.
의복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허리에 찬 쌍검을 동여맸다.
지금은 국적으로 전락했지만 유표는 황실의 웃어른으로 칭송받은 인물이었다. 또한 수많은 명사들의 존경을 받은 선비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유비는 들어서기 전에 옷매무새를 정돈하면서 가다듬으며 예우를 갖췄다.
* * *
검게 치솟는 연기.
멀리서 들려오는 병사들의 함성.
틀림없다.
결국 반란군이 양양성을 점령한 것일 터.
양양채씨 가문의 사병들에게 붙잡힌 유표는 한숨을 토해내면서 주저앉았다. 결국 조조군마저 가세했다면 희망 따위는 없을 테니까.
‘대체 누가 반란을 주도했단 말이냐…!’
부인 채씨?
아니다.
그녀가 반란을 계획했다면 이렇게 저돌적으로 군세를 동원하진 않았겠지.
양양채씨 가문과 양양괴씨 가문이 끝까지 의심스러웠지만 결코 주동자는 아니다. 유표는 역적에게 형주를 팔아넘긴 간신을 용서치 않겠다며 이를 빠득 갈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형주자사.”
덜컥-.
자물쇠로 굳게 닫혔던 문이 열렸다.
유표의 경계 섞인 시선이 불청객을 향했다.
“그대는… 누구인가? 분명 조조군일 테지.”
백학처럼 새하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인과 마주하게 되었다. 고아한 용모를 자랑하는 아름다운 미녀였지만 유표는 오로지 적의만을 보낼 뿐이었다.
역도들을 이끄는 수괴.
반역을 일으킨 반란군과 손을 잡았을 터.
불구대천의 원수나 다름없다.
권력과 지위를 모두 빼앗겨버린 무력한 처지였음에도 유표는 조조군을 향한 살심을 이어나갔다.
“제후, 유비라고 합니다.”
“유비…? 제후 유비! 네년이 유비란 말이냐!”
경악의 감정이 퍼져나갔다.
이윽고 경악의 감정이 적의로 돌변했다.
두 눈에 불길이 치솟았다.
한나라의 종친임에도 왕위를 찬탈한 조조군에게 가담했던 희대의 배신자를 목도했다.
“빌어먹을 년! 네년은 대체 무슨 낯짝으로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느냐! 날 비웃으려는 목적이렷다!!”
“아뇨, 설마요.”
유표가 광분하며 소리쳤다.
그에 유비는 태연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감히 어떻게 웃어른을 비웃겠어요. 어르신께 예우를 표하고자 했을 뿐이에요.”
“예우? 집어치워라! 네년은 한나라 종친의 수치다!”
공손한 대답에도 유표는 억척스러운 매도를 이어나갔다.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면서 욕설을 반복했다.
저주하겠다.
죽어서도 저주할 것이다.
눈앞의 배신자에게 살의를 토해냈다.
청렴한 성품으로 수많은 사대부와 호족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강하팔준(江夏八俊)은 단숨에 나락으로 떨어지면서 추악한 괴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조조는 백마지맹을 위반한 역적이다! 종친들이 모두 단결하여 조조를 주살했어야 했다! 그럼에도 네년은 조조에게 머리를 숙였지! 한나라의 혈통을 이어받은 황족으로서 부끄럽지도 않단 말이냐!”
이길 수 있었다.
역적을 쓰러트릴 기회가 충분히 있었다.
그럼에도 비겁한 종친들은 조조의 위세를 두려워하며 움직이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며 역적에게 자비와 동정을 구걸했을 뿐이다.
원통할 따름이다.
억하심정이 담긴 목소리로 소리쳤다.
“과연 이길 수 있었을까요?”
기이할 정도로 태연자약한 모습으로 유표를 응시하던 유비가 입을 열었다.
물음을 던졌다.
현재 상황에 어울리는 근본적인 물음이었다.
-과연 조조를 이길 수 있었을까.
냉정함이 느껴지는 물음에 유표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잠시 뒷걸음질 쳤다.
“반역을 주도했던 장본인이 작은 공자입니다.”
“뭐…?”
“작은 공자께서 저희들에게 양양성을 넘기셨어요.”
“그, 그럴 리 없다! 그럴 리 없어! 후계자로 내정한 아이가 어째서 반란을 일으킨단 말이냐!”
외가와 호족들의 배신으로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었지만 아들만큼은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유종이 주모자라니,
터무니없는 궤변이 틀림없었다.
마음을 뒤흔들려는 기만책일 터.
유표는 어두운 의심암귀가 마음을 먹어치우고 있음을 느끼면서도 애써 반박했다. 총애했던 둘째 아들이 반역의 주모자임을 인정하게 된다면 제아무리 견고한 마음이라도 도자기처럼 산산조각이 나버릴 테니.
“공자께서 보낸 서한들이에요.”
유비가 품속에서 몇 통의 서한들을 꺼냈다.
귀의를 받아달라는 내용의 밀서들이다. 조조군으로 보낸 유종의 친필서한이었다.
틀림없이 둘째 아들의 글씨체였다.
아버지인 유표가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성문을 열어 투항하겠습니다.
-부디 목숨과 지위를 보장해주십시오.
-결코 위나라에 저항할 생각은 없습니다. 받아주신다면 충성을 다해 봉행할 것입니다.
치욕적이다.
가히 구걸에 가까운 말들이었다.
조조군에 보낸 아들의 친필서한을 읽어가던 유표는 오장육부가 뒤집어지는 듯한 격노를 느꼈다.
“아들의 배신과 호족들의 반란으로 반평생에 걸쳐 이룩해온 것들을 빼앗긴 어르신께서… 과연 조맹덕의 적수가 될 수 있었을까요?”
“다, 닥쳐라…!”
“분명 천하의 명사들이 어르신을 비웃겠죠. 가족조차 단속하지 못하고 형주를 빼앗겼다고.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송두리째로 다 잃었으니까요.”
“그아아! 그아아아아아!!”
피를 토하는 듯한 심정으로 괴성을 내질렀다.
아내와 아들에게,
총애했던 부하와 호족들에게 모두 배신당했다.
교활한 속삭임이 억하심정을 부추기면서 깊은 절망으로 떨어트렸다. 가슴을 움켜쥔 유표는 그대로 주저앉으며 통한의 심연을 경험했다.
“그렇다면 첫째 공자는 어떻게 될까요?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았으면서도… 끝까지 아버지를 지키고자 결사항전을 주장했던 공자님 말이에요.”
“내, 내 아들…! 내 아들을 어쩔 셈이냐!!”
유표는 장남인 유기를 총애했지만 유종을 지지하는 양양채씨 가문의 압력 때문에 마음을 돌렸다.
유기를 방치했다.
그 대신 유종을 후계자로 내정했다.
하지만 후계자로 내정된 차남은 역적들에게 양양성을 팔아넘겼다. 오히려 배척당한 장남이 아버지를 지키고자 끝까지 분전했다.
마지막까지 효성을 관철했던 장남은 적들에게 결국 비참하게 살해당할 터…. 유표는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으로 온몸을 벌벌 떨었다.
“공자를 구할 방법을 알려드릴까요? 특별히 어르신에게 기회를 드릴게요. 한나라 황실의 종친들을 대표하는 웃어른이시니까 마땅히 기회를 드려야죠.”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온화하면서 따스한,
그러면서 등골이 송연해지는 오싹함이 느껴졌다.
간악한 속삭임에 완전히 세뇌당한 유표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성과 자존심이 완전히 무너진 유표는 눈앞의 여인을 마치 은인처럼 여기면서 철저히 복종했다.
* * *
바깥에서 대기하던 조운은 초조한 기색을 드러내면서 제자리를 맴돌았다.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괴성.
형주자사 유표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무슨 말을 나누고 계신 걸까.
중년 사내의 괴성만이 처절하게 들릴 뿐이었다.
‘목소리가… 멈췄다.’
산짐승처럼 꽥꽥 질러대던 고함소리가 갑자기 끊어졌다. 기분 나쁜 정적이었다.
이윽고-.
굳게 닫혔던 문이 열렸다.
“끝났어요, 자룡.”
“유비 님….”
새하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인이 살포시 웃으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 일도 없었다.
온화한 미소가 그것을 말해주었다.
조운은 태연자약한 유비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라도 변고가 생겼을까 계속 노심초사했기에 더욱 그러했다.
“내실이 어질러졌을 테니까 치워주세요.”
“네?”
승패에 불복한 유표가 패악질을 부리면서 집기들을 부수기라도 했던 걸까. 유비의 지시에 조운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뒤이어 병사들이 내실로 들어섰다.
포로로 붙잡힌 패주(敗主)를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어억!”
“으, 으아악!”
비명이 울렸다.
내실로 들어간 병사들의 소리였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단 말인가.
불길함을 직감한 조운이 발걸음을 움직였다.
“유표…!”
형주자사 유표로 추정되는 사내를 목격했다.
죽어있었다.
스스로 목을 매단 채로.
찢은 이불을 밧줄처럼 엮은 유표는 스스로 목을 매달았다. 죽는 순간까지 고통과 괴로움을 느꼈음을 알려주듯 처참하게 일그러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혀를 축 내밀었다.
두 눈을 까뒤집은 상태였다.
호족들을 규합하여 형주를 제패했던 효웅의 말로가 너무도 끔찍했다. 앞서 들어갔던 병사들이 크게 대경실색하며 두려워했을 정도였다.
“자룡.”
“네, 네…! 유비 님.”
“어서 돌아가죠. 대장군에게 보고해야 하잖아요.”
“…알겠습니다.”
유비가 뒷짐을 지며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섬뜩하면서 잔혹한,
하지만 무척이나 아름다운 자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