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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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주 출신이 아니다.
또한 형주에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고립무원(孤立無援).
어디에도 도움을 구할 곳이 없었다.
황실의 종친이자 고관대작 출신이라고 하더라도 무력한 샌님에 불과했다. 난세에 편승하여 거병한 형주의 호족들을 제압할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유표는 형주의 대명문가였던 양양채씨 가문과 동맹을 맺었다. 가문의 여식과 혼인하는 조건으로 호족들을 진압할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네년이 감히, 나를 배신했단 말이냐…!”
흉신악살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크게 분개하며 소리쳤다.
양양채씨 가문이 배신했다.
분명 산하의 호족들까지 그에 가세했을 터.
유표군의 절대적인 명분이었던 양양채씨 가문의 배신은 세력의 멸망을 의미했다. 양양채씨 가문이 지금까지 호족들과의 연합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상공은 형주에 필요하지 않습니다.”
“닥쳐라! 어디서 요사스러운 혓바닥을 놀리느냐!”
쩌렁쩌렁한 외침이 떨어지기 무섭게 병장기로 무장한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양양채씨 가문의 사병이었다.
집무실을 포위했다.
또한 내성까지도 모두 점령했으리라.
채씨가 반역에 가담하자 양양채씨 가문을 추종하는 장수들마저 등을 돌렸다. 내심 투항을 바라고 있었다는 듯이 단번에 돌아섰다.
“어, 어떻게 네놈들이…!”
집무실로 쳐들어온 병사들을 노려보았다.
친위병은 어디 갔단 말인가.
충성스러운 장수들은 대체 뭘 한단 말인가!
위풍당당한 면모를 과시하면서 형주를 제패했던 군주는 무력한 늙은이로 전락했다. 계속 괄시해온 유언과 다를 바 없는 추레한 모습이었다.
“형주를 보존하기 위함입니다. 애초부터 상공과 손을 잡았던 것도 형주를 보존하기 위함이었으니까요.”
양양채씨 가문이 유표와 혼인동맹을 맺었던 이유는 호족들의 반란을 진압할 인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형주 출신은 안 된다.
세력이 한쪽으로 쏠리게 될 테니.
그래서 한나라의 종친이며 고관대작 출신의 청류파 명사였던 유표를 내세웠다. 유표는 영웅의 기질과 역량을 겸비한 인물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상공께선 이제 형주의 영웅이 아니십니다. 형주의 운명을 계속 위태롭게 만들 뿐인 패배자에 불과합니다.”
“패, 패배자…! 감히 나더러 패배자라고!!”
유표가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그에 병사들이 유표에게 병장기를 겨눴다.
“동귀어진에 가담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저희 호족들은 형주의 새로운 주인을 맞이할 뿐입니다.”
난세의 무리들을 진입하고자 유표를 군주로 추대했을 때와 마찬가지였다. 형주의 호족들을 모두 동귀어진에 가담시키려는 유표를 몰아내고자 이성휘에게 형주를 바치려 했다.
철저히 이익에 따라 움직인다.
그것이 바로 호족이다.
호족들의 지지로 형주를 제패했던 유표는 호족들의 배신으로 철저히 몰락하게 되었다.
* * *
양양채씨 가문의 장수들이 병력을 주도했다.
유표는 반란을 경계하여 유기에게 군권을 양도했지만 무의미한 안배일 뿐이다. 대부분의 장졸들이 양양채씨 가문을 추종하고 있었으니까.
이제 충성은 끝났다.
양양성의 모든 장졸들은 거병에 합류하라.
반란의 불길에 삽시간에 번져나갔다.
“계속 유표를 따를 자들은 투구를 써라! 거병에 합류할 자들은 투구를 벗어라!”
충성을 지킬 텐가.
아니면 거병에 가담할 것인가.
연병장에 집결한 장졸들에게 선택지를 내렸다.
양양성의 장졸들은 곁눈질로 눈치를 살피면서 고민했다. 뒤이어 하나둘씩 투구를 내리기 시작했다. 호족들과 마찬가지로 위험천만한 유표의 동귀어진에 가담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기 때문이다.
“성문을 열어라! 조조군에 합류한다!”
“형주자사 유표는 이제 우리들의 주인이 아니다!”
수많은 장졸들이 반역에 가담했다.
유표에게 충성하는 장졸들이 희박할 정도였다.
대세는 결정되었다.
성문을 열어 조조군을 맞이하라.
반역의 불길이 양양성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거병을 기다리던 호족들이 사병을 이끌고 가세하면서 사태가 더욱 가열되었다. 형주를 제패하며 천하를 도모했던 유표군은 결국 몰락의 기로에 직면했다.
“성문을 공격하라!”
“대장군이 기다리고 있다! 속히 성문을 열어라!!”
유표를 추종하는 장졸들이 검을 빼들면서 달려들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밀물처럼 몰려드는 반역의 불길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양양채씨 가문의 장수들은 양양성의 성문을 열어젖히며 바깥에서 매복하던 유비군을 맞이했다.
“휘하의 제장들은 성문을 접수하라!”
아름다운 흑발을 늘어뜨린 여걸이 용맹하게 질주하면서 양양성에 들어섰다.
입성에 성공한 유비군 장수들은 성문을 장악하고서 후열을 유도했다. 뒤이어 유비와 장비가 지휘하는 병력들이 양양성으로 뛰어들었다.
“투구를 쓴 장졸들을 모두 죽여라!”
관우가 단기필마로 질주하면서 앞을 가로막는 유표군 장졸들을 쓰러트렸다.
마침내 유비군이 양양성에 입성하자 유표를 추종하던 장졸들은 전의를 상실했다. 결국 병장기를 바닥에 떨어트리며 멸망을 받아들였다.
“하, 항복하겠소!”
“젠장! 이렇게 무너지다니…!”
웅대한 야망이 무너졌다.
결국 반역의 불길에 삼켜지고 말았다.
유표를 형주의 새로운 황제로 옹립하고자 분골쇄신했던 장수들은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웅대한 야망을 짓밟은 양양채씨 가문을 진심으로 증오했다.
“유비 님, 저는 기병들을 이끌고 유표의 신병을 확보하도록 하겠습니다.”
유비군에 합류하여 양양성으로 입성한 조운이 기병들을 인솔하면서 말했다.
유표를 죽여라.
이성휘에게 밀명을 받았다.
조운은 은밀하게 명령을 완수하고자 유비에게도 비밀로 한 채 움직이려 했다.
“같이 가죠.”
“예? 아뇨…. 괜찮습니다.”
“저도 대장군에게 명을 받았거든요. 괜찮아요, 절대로 방해는 안 할 테니까요.”
“…….”
새하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인이 간절한 목소리로 동행을 부탁했다.
그를 차마 거절할 수 없었기에 조운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요청을 받아들였다.
“익덕, 본대의 지휘를 맡길게. 잘할 수 있지?”
“그럼 당연하지.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부하들을 괴롭히지 말 것.
항장들을 가혹하게 대하지 말 것.
백성들에게 결코 위해를 가하지 말 것.
유비는 말괄량이 막내에게 신신당부를 하고서 조운과 함께 양양성의 시가지를 질주했다.
양양성이 함락되었다.
이제 남방의 후환을 제거할 때였다.
유표를 암살하라는 밀명을 거머쥔 조운은 뒤따르는 유비를 힐끗 쳐다보았다. 대의를 중시하는 유비가 혹시라도 저지하진 않을까 우려스러웠기 때문이다.
* * *
사방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다.
반란이다.
내부에서 분열이 시작되었다.
양양성의 방위를 위임받은 유기는 제장들을 소집하여 진압을 준비했다. 만약 성문이라도 열리게 된다면 모든 게 끝장일 테니까.
“공자.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십시오.”
장윤과 무장들이 칼자루를 뽑아들면서 반란을 진압하려던 유기를 위협했다.
양양채씨 가문의 혈족이었던 장윤은 당연히 반란에 가담한 상태였다. 거병의 유일한 변수였던 유기를 체포하고자 병력들로 하여금 주변을 포위했다.
꼼짝없이 당했다.
유기는 분기에 찬 표정으로 장윤을 노려보았다.
“부도독, 아버님을 배신한 겁니까! 세력을 대표하는 장수가 주군을 배신하다니!!”
“대세를 따르고자 함입니다.”
물귀신처럼 주변을 모두 희생시키려는 참혹한 동귀어진에 가담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형주는 호족들의 땅이다.
늙은이의 헛된 야망에서 반드시 지켜내야 했다.
그렇기에 장윤은 장졸들을 동원하여 내성을 급습하는 반역을 일으켰다. 유기를 비롯하여 수많은 인사들을 체포하면서 후환을 말끔히 짓밟았다.
“장윤! 더러운 배신자 같으니라고!!”
유기가 광분하며 소리쳤다.
장윤의 무관들이 달려들어 유기를 붙잡았다.
“다 끝났습니다, 형님.”
결국 내성이 반란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사태가 수습되자 유종이 모습을 드러냈다.
괴량과 괴월,
양양괴씨 가문의 군사들이 뒤따랐다.
뒤이어 반란에 가담했던 호족들까지 모습을 드러내면서 유종을 보필했다. 반역의 주모자와 대면한 유기는 두 눈을 부릅뜨면서 소리쳤다.
“네놈이 정녕 형주를 팔아넘겼단 말이냐! 아버님을 배신한 주구가 네놈이렷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당장 조조군에 항복하십시오. 마지막 도리로서 주청하는 겁니다.”
이대로 버티면 죽는다.
유종은 유기에게 항복을 종용했다.
후계를 두고 난립했던 원수였다.
하지만 유종은 마지막 도리마저 놓아버리진 않았는지 진심으로 형을 걱정했다.
“나를 죽여라! 끝까지 아버님을 따르겠다! 네놈과는 결코 같은 배를 타지 않을 것이다!”
철천지원수처럼 후계를 두고 경쟁했던 형제는 결국 끝까지 상반된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격앙된 모습으로 일갈하는 유기의 모습에 호족들은 부끄러움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과연 충의를 중시하는 인물답게 유기는 끝까지 결연한 모습을 보였다.
“네놈과 양양채씨 가문의 교활한 암여우를 내 손으로 척살하지 못한 것이 원통할 뿐이다…!”
이미 다 끝났다.
반란군이 양양성을 점령했다.
성곽을 포위했던 조조군이 물밀듯이 들어오고 있었다.
아버지가 한평생을 바쳐 이룩했던 세력을 적들에게 팔아넘기는 패륜을 범했다. 유종은 주먹을 바르르 움켜쥐면서 흔들리는 마음을 움켜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