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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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으려면 배신을 선택해야 한다.
형주의 안위를 위해서다.
가문의 후사를 위함이기도 했다.
하지만 심약한 성정이었던 유종은 엄격한 아버지를 배신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담하지 못했다.
온건파 호족들로부터 지지를 받게 되었음에도 계속 망설였다. 그에 괴량과 괴월은 조조군에 밀사를 파견하여 확약을 얻어두려 했다. 어떻게든 심약한 유종을 움직여야 했기 때문이다.
“공자, 기뻐하십시오. 대장군 이성휘가 공자의 신변을 보장해주겠다는 밀서를 보내왔습니다.”
양양성의 성문을 열어젖히며 호족들과 함께 투항한다면 형주 정벌의 일등공신으로 삼겠다.
온건파 호족들과 접선한 이성휘는 유종에게 합당한 지위와 명예를 약속했다. 또한 형주자사의 예우로 대하겠다는 조건까지 덧붙였다.
실로 파격적인 제안이다.
유종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당연했다.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불호령을 내리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불안에 떨었다. 하지만 유종은 결국 괴량과 괴월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이미 화살은 활시위를 떠났습니다. 공자, 사생결단을 내려야 할 때입니다. 위나라에 확약까지 받아냈으니 무를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 그 말이 맞소….”
어째서 나한테는 일언반구의 상의조차 없이 독단을 내렸던 말인가.
유종은 돌발적인 독단을 결정했던 괴량과 괴월에게 불만을 느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돌이킬 수 없다는 말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군사, 이제 어찌하면 좋겠소?”
“제장들을 동원하셔야 합니다.”
괴월이 유종에게 진언했다.
그에 유종은 아연실색하며 입을 열었다.
“과연 제장들이… 나를 따라주겠소?”
“장수들 또한 결사항전에 불만이 많습니다. 공자께서 늠름하게 호령하신다면 틀림없이 제장들은 충성을 바칠 것입니다.”
연이은 대패를 당했음에도 거듭하여 항전을 주장하는 유표의 독단에 수많은 장수들이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터무니없는 전쟁이다.
결국 군량이 끊어지면 모두 굶어죽을 터.
형주의 호족들은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장원이 조조군에게 짓밟힐까 공포에 떨었다. 대부분 호족 출신이었던 유표군의 장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알겠소, 군사들이 말만 믿겠소.”
유종은 군사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반역에 동참하기로 결정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중과부적이나 다름없는 전황이 아닌가.
유종은 아버지를 배신했다는 죄책감을 애써 억누르면서 주먹을 거머쥐었다. 풍요로운 형주를 지키기 위한 결정이라며 적법함을 내세웠다.
* * *
형주는 아름다운 강산으로 유명한 지역이었다.
드넓게 펼쳐진 장강.
고풍스러운 운치를 자랑하는 고을들.
과연 형주의 호족들이 자랑할 법했다.
천하통일의 대업을 완수하면 조조와 장강에서 뱃놀이를 즐겨도 좋지 않을까? 이성휘는 석양에 반사되어 황금빛으로 물든 장강을 바라보면서 문득 생각했다.
“유종이 투항을 결정했다라….”
“네, 양양괴씨 가문이 밀사가 보내왔습니다.”
괴량과 괴월이 반역을 주도하고 있다.
온건파 호족들에게 휩쓸린 유종은 반역의 정통성을 위한 바지사장 역할을 하고 있었다.
결국 그렇게 되는 건가.
이성휘가 경멸이 담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유경승의 자식들은 개돼지나 다름없군.”
본인의 안전을 구걸할 뿐인 짐승.
축생에 가까웠다.
아버지를 옹호하며 결사항전을 주장한 유기는 상찬을 받아 마땅했지만 역량이 너무 부족했다. 틀림없이 내부의 분열을 막아내지 못한 채 무너지겠지.
“병력들의 배치는?”
“유비군이 은밀히 매복하고 있습니다.”
이성휘의 물음에 제갈량이 답했다.
성문이 열리면 곧장 들이친다.
양양성을 신속하게 함락시키기 위해 숙련된 유비군을 투입했다.
상당한 위험이 동반되는 임무였음에도 유비군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황위를 찬탈하려 했던 국적을 사로잡을 절회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유비에게 대장군의 밀명을 전했습니다.”
“수고했다.”
-혼란을 틈타 유표를 죽여라.
원소에 이어 유표에게도 관용을 베푼다면 정벌군의 위엄이 바닥까지 떨어지겠지.
그래서 이성휘는 날랜 병사들을 유비군에 투입하여 유표를 암살하려 했다. 한나라의 종친이자 형주의 군주였던 유표를 대놓고 죽일 순 없었으니까.
“하지만 괜찮을까요? 유종이 아버지의 안위를 보장해달라는 부탁을 했었는데….”
“대장군의 말씀처럼 유종은 개돼지에 불과해요. 굳이 개돼지와의 약속을 지킬 이유는 없잖아요.”
양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에 제갈량은 날카로운 독설을 쏟아냈다.
유약하기 짝이 없는 놈이다.
반역을 결심한 주제에 천륜만을 지키겠다니.
호족들에게 끌려다닐 뿐인 우유부단한 작자는 지탄을 받아 마땅했다. 분명 유종은 아버지가 혈혈단신으로 이룩한 세력을 팔아넘긴 패륜아로 기록되리라.
“유표의 장남은 어찌할까요? 양양성의 군권을 거머쥐었다고 하던데….”
“일단 살려둘 생각이다.”
유기는 유종과 양양채씨 가문의 모략으로 후계구도에서 탈락했지만 형주 백성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굳이 죽일 이유는 없다.
아버지를 존경하는 효성이 지극하지만 역량과 담력을 갖추지 못한 도련님에 불과했으니.
한적한 지역에 유배를 보내버리면 족할 테지.
‘유표, 네놈의 최후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이윽고 유언을 뒤따르게 될 테지.
패주(敗主)에게 내일은 없다.
만승천자의 옥좌를 거머쥐겠다는 웅대한 야심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하게 되리라.
형주의 드넓은 강산들이 손아귀에 들어온다.
천하통일이 머지않았음을 직감했다.
* * *
장윤과 유기에게 결사항전을 명령한 유표는 답답한 예복을 벗어던진 채 옥좌에 앉았다.
벌컥벌컥-!
호쾌하게 술을 들이켰다.
얼큰한 취기가 온몸으로 퍼졌다.
마지막으로 술을 마셨던 게 언제였을까.
완고한 성정의 사대부들이 그러하듯이 유표는 색정과 음주를 항상 경계해왔다. 청렴한 학자들에게 있어 주색(酒色)은 가장 위험한 적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때도 지금처럼 술을 마셨지.”
술병을 호쾌하게 유표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중얼거렸다.
오랜 기억을 더듬었다.
아니,
기억을 더듬을 것도 없었다.
술에 얼큰하게 취할 때마다 떠오르는 기억이었으니까.
-유표, 네 이놈!
-네놈은 황실의 종친이 아니더냐!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죽어서도 저주하겠다!!
혈혈단신으로 형주에 입성했던 유표는 권력을 거머쥐고자 수많은 정적들을 숙청했다.
사대부와 호족들,
형주의 군벌과 두령들에 이르기까지.
시산혈해로 권력을 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난세를 평정하여 새로운 황제로 등극하겠다는 야망을 이루고자 패도(覇道)를 선택했다. 인의를 잠시 접어둔 채 이익만을 추구하면서 권력을 거머쥐었다.
“빌어먹을…!”
망령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 환청이다.
정신이 무뎌질 때마다 환청이 들리고는 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기 때문일까.
망령들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더욱 격렬하게 들리는 듯했다. 유표는 더욱 거칠게 술을 들이켰다.
“어찌하여 백주대낮부터 술을 드십니까.”
요염한 자태의 미녀가 고혹적인 발걸음을 내딛으면서 홀로 자작(自酌)하던 유표에게 다가왔다.
후처(後妻) 채씨였다.
그에 유표는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망가진 내 꼴을 비웃으려 오셨소?”
“그럴 리가요.”
술잔을 내려놓은 유표가 쏘아붙이자 채씨는 어깨를 으쓱이면서 대답했다.
어찌 사람이 완벽할 수 있을까.
완전무결을 추구했던 원소도 결국 사면초가의 위기에 무너지지 않았던가.
얼큰하게 취해버린 유표의 모습을 응시하던 채씨가 옆에 앉았다. 유표는 꿍꿍이를 모를 암여우를 경계하면서 다시 술잔을 들어올렸다.
“분명 그때도 마찬가지였지요. 상공께선 조정의 정적들에게 배척당하여 형주로 오시자마자 매일 음주로 허송세월을 보내시지 않았습니까?”
“그때의 일을 왜 꺼내는 게요.”
“상공을 보고 있으니 옛일이 떠올랐습니다.”
“…흐음.”
간신들이 불러온 난세에 절망하여 음주가무로 세월을 보냈다. 도저히 희망이 보이질 않았으니.
부끄러운 과거였다.
멋쩍은 헛기침을 흘리면서 고개를 돌렸다.
어째서 갑자기 부끄러운 과거를 들춘단 말인가.
“저희 양양채씨 가문이 상공을 도와드렸지요. 형주를 장악할 힘을… 천하를 향해 도약할 힘을 상공에게 드렸습니다.”
“…….”
양양채씨 가문의 적극적인 조력이 없었더라면 결코 대업을 이루지 못했으리라.
귀양살이를 하듯 조정에서 쫓겨났던 무력한 백면서생을 누가 따르겠는가? 양양채씨 가문과 양양괴씨 가문, 그리고 형주 호족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비참한 객사(客死)를 면치 못했겠지.
인정한다.
모두 호족들의 도움 덕분이었다.
유표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순순히 인정했다.
“그러니… 저희 양양채씨 가문이 형주 호족들을 대표하여 지위를 박탈하겠습니다.”
“뭐, 뭐요?”
채씨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선언했다.
대취한 상태였던 유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되물었다.
환청이다.
분명 환청이 틀림없을 터였다.
뇌리에서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망령들의 저주와 마찬가지로 터무니없는 환청이리라. 불안감을 토로하면서 아내의 얼굴을 응시했다.
“바, 반란이다!”
“양양채씨 가문이 반란을 일으켰다!!”
뒤이어 장졸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반란을 일으켰다.
양양채씨 가문이 조조군에 가세했다.
그제야 유표는 결코 환청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