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조군으로 천하통일까지-600화 (600/616)

<600화>

============================

양양성을 포위한 이성휘는 유비군을 동원하여 유표에게 충성하는 호족들의 정원을 급습했다.

저택을 불태웠다.

모내기가 끝난 농토를 짓밟아버렸다.

가문의 노복들을 강제로 끌어내어 양양성에 소식을 알리도록 만들었다. 미처 도망치지 못한 호족들의 식솔을 붙잡아 인질로 잡아두기까지 했다.

“투항하지 않는다면 농토를 모두 불태우겠다! 저택과 창고들을 무너트릴 것이다! 인질로 붙잡은 식솔들을 끄집어내어 도륙을 내버리겠다!”

양양성을 제외한 대부분의 군현들이 조조군의 지배에 놓이게 되었다. 이성휘는 유표에게 충성하는 호족들의 분노를 이끌어내고자 강제력을 동원했다.

이제 형주는 유표의 땅이 아니다.

그것을 호족과 백성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모조리 털어버려! 재물이고 곡식이고, 모두 우리들이 차지한다!”

붉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소녀가 장팔사모를 치켜들면서 소리쳤다.

신이 난 듯하다.

아름다운 얼굴에 함박웃음이 가득했다.

사실 무장보다는 행인들을 급습하여 재물을 약탈하는 도적이 훨씬 적성에 맞지 않을까? 장비는 두 눈을 번뜩이면서 병사들을 재촉했다.

“으아악!”

“사, 살려주십쇼…! 제발 살려주십쇼!”

대대적인 약탈을 벌였지만 살생만큼은 결코 일으키지 않았다. 양양성에서 항전을 주장하는 호족들의 가솔을 붙잡았음에도 관용을 베풀어주었다.

물론 그 관용은 공짜가 아니었지만.

옷 두 벌만 들고 떠나라.

양양성으로 향하여 우리들의 만행을 알려라.

조상으로부터 드넓은 저택과 농토를 물려받은 호족의 식솔들은 한순간에 알거지가 되고 말았다. 간신히 의복만을 챙긴 채 도망치듯 떠나야 했다.

“근데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번거롭게….”

어째서 저들을 순순히 보내주는 걸까.

분명 증오를 부추길 텐데.

당최 이해할 수가 없다.

물론 이성휘의 속내는 매번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빈털터리로 쫓겨난 호족의 식솔들은 양양성에 도착하자마자 증오를 퍼트릴 것이었다. 아군의 폭력과 만행을 규탄하면서 항전을 부르짖겠지.

“어서 재물들을 수레에 실어!”

“옙!”

어렵다.

그렇기에 고심을 그만두었다.

항상 성공을 거두지 않았던가.

장비는 이성휘를 전적으로 신뢰했기에 오로지 명령에만 복종했다.

* * *

장비의 예상대로 빈털터리가 되어버린 호족의 식솔들은 양양성에 도착하자마자 증오를 쏟아냈다.

재산을 모두 빼앗겼다.

고향에서 쫓겨나는 치욕마저 당했다.

조조군의 만행이 알려지자 유표군은 크게 비분강개하며 살의를 불태웠다. 모든 재산을 강탈당한 호족들은 특히 격렬하게 분노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성휘! 찢어죽일 놈이!”

“조상님에게 물려받은 저택과 농토들을…! 결코 가만두지 않겠다!!”

유표군의 호족들은 조상 대대로 형주의 지배층으로 군림해왔다. 완고한 자존심에 크나큰 상처를 입은 호족들은 격앙된 목소리로 항전을 부르짖었다.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

절망적인 박탈감이 매몰찬 증오를 불러일으켰다.

반면 조조군의 무자비한 약탈에서 제외된 호족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가문의 생사가 여전히 이성휘에게 달린 상황이었기에 결코 안도할 수 없었다.

“일단 진정하시게!”

“아직 교섭의 여지는 있지 않은가!”

결사항전이 벌어지게 된다면 빈털터리로 전락한 호족들처럼 모든 재산을 빼앗기게 될 터.

조조군과의 교섭을 주장하는 온건파 호족들은 과격하게 변해버린 여론을 진정시키려 했다. 어떻게든 가문을 지켜내기 위해서였다.

“어째서 그대들의 가문은 멀쩡하오?”

“역적의 무리들과 내통하는 것이 틀림없소이다!”

유황불처럼 타오르는 증오는 삽시간에 사방으로 확산되기 마련이다. 조조군을 향한 증오는 이윽고 약탈을 비껴간 온건파 호족들에게 이어졌다.

분열이 시작되었다.

증오와 적대감이 쌓이면서 혼란이 깊어졌다.

연이은 패전으로 위축된 유표군은 의견을 규합하지 못한 채 분열되고 말았다. 이성휘가 유비군을 동원하여 분열의 씨앗을 조성했기 때문이었다.

“결코 결사항전은 능사가 아닙니다! 소신이 이성휘를 접선하여 교섭을 해보겠습니다.”

종사중랑(從事中郞) 한숭이 유표에게 진언했다.

항전만큼은 안 된다.

분명 형주는 참혹한 쑥대밭이 될 터.

항복의 치욕을 감수하더라도 어떻게든 형주를 지켜내야 한다. 그렇기에 한숭은 죽음을 각오하고서 교섭을 입에 담았다.

“닥쳐라! 한나라의 종친인 나에게 백마지맹을 위반한 역적에게 고개를 숙이라는 말이냐!!

유표가 대노하며 책상을 뒤엎었다.

상대는 역적이다.

왕위를 빼앗은 대역무도한 무리였다.

그깟 놈들에게 무릎을 꿇어야 한다니?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절망적인 상황에 봉착한 유표는 사면초가의 위기를 애써 외면하고자 분노를 내비쳤다. 감히 자신에게 교섭을 주장한 한숭을 노려보면서 이를 빠득 갈았다.

“당장 한숭을 참수하라! 한나라의 역적에게 머리를 조아리라는 망발을 지껄인 간신이다!!”

날벼락처럼 매서운 불호령이 떨어졌다.

온건파 호족들이 경악했다.

그리고 항전을 주장하던 강경파 호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종사중랑 한숭은 강건한 절개와 지혜로운 성품으로 명망을 떨친 형주의 명사였다. 한숭을 당장 참수하라는 유표의 명령에 아연실색하는 것은 당연했다.

“주군, 명을 거둬주십시오!”

“종사중랑은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명사입니다! 결코 안 됩니다!”

호족들이 강경하게 반대했다.

그럼에도 유표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굽힐 줄 모르는 순철(純鐵).

과연 괴량과 괴월의 비유가 적절했다.

한숭의 주장에 충분히 일리가 있었음에도 외골수였던 유표는 완고하게 고집을 고수했다. 그리고 자신의 허울과 잘못을 숨기고자 부손을 죽이려 했다.

“고정하시지요, 상공.”

들끓는 살의가 요동치고 있었을 때,

여인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좌중을 뒤덮었다.

또각-. 또각-.

뒤이어 기품이 느껴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종사중랑은 충언을 올렸을 뿐입니다. 그를 처벌한다면 필시 천하의 규탄을 피하실 수 없을 테죠.”

“부인이 나설 일이 아니오!”

극적으로 등장하여 유표를 제지한 여인은 양양채씨 가문의 장녀이며 유표의 아내였던 채씨였다.

채씨는 여유로운 기품과 자태를 뽐내면서 비분강개하는 남편을 막아섰다. 날카롭게 빛나는 눈빛을 마주한 유표는 침음을 삼키면서 고개를 돌렸다.

“당장 한숭을 하옥하라!”

참수를 취소했다.

그 대신 한숭을 감옥에 집어넣었다.

사방이 온통 적들로 가득하다.

친위세력인 양양채씨 가문마저 돌아선다면 결국 고립무원에 직면할 터.

결국 고집불통 같은 성정을 꺾어야 했다.

“현명하신 처결이십니다.”

채씨가 고개를 숙이면서 예를 갖췄다.

그에 유표는 얼굴을 처참하게 일그러뜨리면서 고개를 돌렸다.

“장남에게 양양성의 방위를 맡기겠소.”

아내를 향한 반발심의 표현일까.

유표는 채씨가 총애하는 유종을 배척하고 유기에게 군권을 양도했다.

장남 유기. 차남 유종.

둘 다 한참 모자란 그릇이다.

하지만 유기는 거듭하여 항전을 주장하였기에 양양성의 방위를 맡겼다. 고립무원의 처지에 직면한 유표는 애물단지로 여기던 장남에게 의지하려 했다.

* * *

양양성의 온건파 호족들은 유표가 결사항전을 천명했음에도 투항을 포기하지 않았다.

조조가 천하를 통일할 터.

결사항전은 무의미한 유혈에 불과했다.

승자에게 항복하여 풍요로운 형주를 어떻게든 보존해야 한다. 지금이라도 개심하여 조조군에 종속을 요청한다면 분명 자비를 베풀어줄 터였다.

“아버님께선 제정신이 아니시오! 분명 연이은 패전으로 사리분별을 잃으신 겁니다!”

함선들을 모두 잃었다.

강릉성이 함락되어 보급이 끊어졌다.

아군을 구원할 지원군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었다.

대체 왜,

대체 어째서…!

시일을 계속 늦추면서 지체하면 조조군의 노여움만 커질 뿐이다. 양양성에 비축된 물자들이 넉넉한 것도 아니었기에 더욱 위험했다.

심지어 결사항전을 주장하던 형님에게 양양성의 군권을 양도했다는 소식까지 듣게 되었다. 그에 유종은 괴량과 괴월을 호출하여 대책을 의논했다.

“업성의 성문을 열고 투항했던 원소군 장수들이 모두 관내후에 책봉되었다고 합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요…? 나더러 양양성을 적들에게 내어주라는 말이오?”

괴량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에 유종이 크게 놀라며 되물었다.

천인공노할 일이 아닌가.

경애하는 아버지를 배신하라니….

결사항전을 주장할 담력은 없었지만 천인공노할 패륜을 범할 담력은 더더욱 없었다. 유종은 두 눈을 바르르 떨면서 마른침을 삼켰다.

“공자께선 가문과 후사를 보존해야 합니다. 오로지 공자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수많은 호족들이 결단을 기다리고 있다.

괴량과 괴월이 유종을 부추겼다.

“유기 공자께서 군권을 가지셨습니다. 그것이 대관절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

양양괴씨 가문이 협력을 약속했다.

틀림없이 양양채씨 가문도 협력해줄 터였다.

고집불통 늙은이가 되어버린 형주의 효웅에게 실망한 호족들이 유종을 지지했다.

더 이상 희망이 없다.

오로지 투항만이 유일한 살길이었다.

하지만 살아남기 위해선 존경하는 아버지를 배신하는 패륜을 범해야만 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