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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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江陵)과 강하(江夏)가 함락되었다.
유표군의 거점들을 함락시킨 조조군과 손견군은 곧바로 북상을 개시했다.
독 안에 든 쥐다.
양양(襄陽)만 함락되면 지리멸렬하게 무너질 터.
천하제일검과 강동의 호랑이가 군세들을 이끌고 쳐들어온다는 소식이 강타하자 유표군은 혼란의 도가니에 접어들었다.
“이성휘, 손견…!”
“사나운 짐승들이 몰려오고 있소!”
강하가 손견군의 맹공에 무너졌다.
강릉은 싸우지도 않고 이성휘에게 항복해버렸다.
사태를 수습할 겨를도 없었다.
전선을 돌파한 적들의 진격이 너무도 기민했다.
“하, 항복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군사들의 생각은 어떠하시오?”
유표의 차남, 유종이 괴량과 괴월을 불러 말했다.
함선들을 모두 잃었다.
그리고 강하태수 황조마저 전사했다.
형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도 같았기에 유종은 항복을 입에 담았다. 적들에게 결코 이길 수 없음을 느꼈는지 아연실색한 낯빛으로 의견을 물어보았다.
“하지만 어르신께선 항전을 명령하실 겁니다.”
유표는 누구보다 완고한 성격이다.
굽힐 줄 모르는 순철(純鐵).
그것이 바로 노공왕(魯恭王)의 후예가 아니던가.
설령 부러질지언정 결코 타협하지 않으리라.
유표를 오랫동안 보필했던 괴량과 괴월은 외골수처럼 완고한 성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에 무거운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오? 적들이 양양성을 불바다로 만들 터인데…! 풍요로운 형주가 탐욕스러운 짐승들에게 유린당하게 될 거요!”
특히 손견은 총공세를 벌이면서 형주를 쑥대밭으로 만든 전적이 있었다.
살인과 약탈을 일삼았다.
형주 백성들을 붙잡아 양주로 압송하기까지 했다.
수많은 패악질을 일삼았던 강동의 호랑이는 끔찍한 악몽과도 같았다. 그렇기에 불운한 비보를 들은 백성들은 혼비백산하며 두려워했다.
“손견이 양양성을 침범하면 끝장이오…! 차라리 이성휘에게 항복하는 게 어떻겠소? 이성휘는 그래도 패자들에겐 자비롭다고 들었소만.”
온몸을 벌벌 떨면서 물었다.
손견은 도살자다.
결코 잔인무도한 살육을 멈추지 않을 터.
전임 형주자사를 살해하고 수많은 호족들마저 참살했던 손견은 관용을 모르는 짐승이다. 유종은 손견이 양양성을 도모하기 전에 위나라에 항복하자며 괴월과 괴량을 설득했다.
“소신들도 공자와 같은 생각입니다. 형주의 번영과 평화를 위해서라도 지금은 굽힐 때입니다…!”
유종의 주장이 매우 완고했다.
그에 괴월과 괴량도 속내를 내비쳤다.
투항해야 한다.
오직 투항만이 형주를 구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강릉과 강하마저 빼앗기면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했다. 이제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형주의 백성들을 위해서라도 과감한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형님께선 아버님에게 굽실거릴 목적으로 결사항전을 주장했지만 나는 다르오! 형주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항복해야 하지 않겠소…. 그러니 군사들께서 나를 도와주시오.”
형주의 공자들이 상반된 입장에 섰다.
유기는 항전을 주장했다.
유종이 투항을 염두에 두었다.
침묵을 이어나가던 괴월과 괴량은 투항을 주장하는 유종을 지지했다. 그들도 내심 투항을 고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아버님의 설득인데….”
“소신들이 방략을 마련해보겠습니다.”
괴량의 진언에 유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양양괴씨 가문의 군사들은 지혜로운 현인으로 명성이 높았다. 그렇기에 유종은 괴월과 괴량을 신임하면서 일을 맡겼다.
* * *
기적적인 완승을 거둔 조조군과 손견군은 거침없이 진격하여 양양성에 당도했다.
뒤이어 번성을 사수하던 장합과 고람이 합류하면서 유표군을 엄중하게 에워쌌다.
도망칠 곳은 없다.
사대부와 호족들은 성문을 열고 투항하라.
손견을 동원하여 무력을 과시하면서도 순순히 투항하면 관용을 베풀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그에 사대부와 호족들은 반신반의하며 동태를 살폈다.
“드디어 양양성에 도달했다.”
백금발을 기른 남성이 유표군의 군기들이 나부끼는 양양성을 노려보면서 중얼거렸다.
유표,
놈의 본진을 마주하게 되었다.
손견은 날카로운 적의를 드러내면서 양양성을 노려보았다.
치욕적인 대패를 당했음에도 양양성의 방위는 육안으로 보기에도 매우 견고했다. 반란과 배신이 난무했던 형주를 제패한 세력다운 전력이었다.
“숭산에서 함께 동탁의 무리들과 싸웠던 시절이 떠오르는군. 온몸에 피비린내가 진동하도록 싸웠지.”
“…숭산이라.”
숭산에서 벌였던 혈전.
이성휘 또한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찌 잊겠는가.
가장 지독했던 피투성이의 싸움이었는데.
동탁의 무리들과 싸웠을 때처럼 어깨를 마주하고서 적을 대적하게 되었다. 손견은 과거를 회상하면서 이성휘에게 선의를 드러냈다.
호전적인 성격이지만 함께 공투했던 전우에게는 한없이 친절했다. 팽성 전투에서 조조군과 치열하게 싸웠던 전례가 있었음에도 말이다.
“내 딸일세! 참으로 미인이지 않은가? 다행히 아내를 쏙 빼닮았다네. 괄괄한 성정은 나를 닮았지만.”
격앙된 목소리로 아름다운 백금발을 늘어뜨린 묘령의 소녀를 소개했다.
손견의 장녀,
손책.
양주에서 소패왕(小覇王)이라 불리는 여걸이었다.
“소, 손책이라 합니다. 대장군.”
아버지의 소개로 이성휘와 마주한 손책은 정중하게 예를 취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를 빼닮아 드세고 괄괄한 여걸이었지만 매우 조신한 모습으로 이성휘를 대했다. 긴장이 역력한 눈빛으로 이성휘를 힐끗 곁눈질하기 바빴다.
“오랜만이네요, 그동안 강녕하셨나요?”
“하핫! 당연히 강녕했소!”
뒤이어 유비가 손견에게 인사했다.
동탁을 대적했던 군벌들이 다시금 국적을 척결하고자 모여들었다.
감회가 새로웠다.
설마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양양성을 마주한 영웅들은 군세를 결집시키며 늙은 역적을 때려잡기 위한 작전을 모색했다.
“유표군은 호족들의 연합이다. 형주 호족들의 동요를 이용하여 분열을 일으켜야 한다.”
형주의 호족들을 대표하는 명문가가 바로 양양채씨가문과 양양괴씨 가문이었다.
혈혈단신으로 형주에 입성했던 유표는 세력을 확보하고자 채모와 괴량을 영입했다. 그리고 다른 호족들까지 모두 영입하여 지금의 세력을 만들었다.
호족들의 영향력이 강했다.
사실상 유표군은 호족들의 연합인 셈이었다.
머지않아 분열이 가속될 터.
유표가 형주의 효웅에서 우유부단한 군주로 전락하게 된다면 호족들의 충성심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흠, 내부에서 무너트리자는 말이로군.”
“성공한다면 무혈입성도 가능하겠죠.”
제아무리 유표가 결사항전을 계속 주장하더라도 호족들이 반기를 일으키면 사상누각처럼 무너질 수밖에 없을 터였다.
손견과 유비가 동의했다.
“좋은 방법이 있으신가요?”
“있다.”
양양성을 무너트릴 책략.
유비의 물음에 이성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명확하진 않았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책략을 보좌해줄 훌륭한 참모들이 있었기에 성공을 확신했다.
“이번 공세의 주력을 맡아주겠나?”
“하명만 내려주세요. 훌륭하게 완수할 테니까요.”
손견군의 조력으로 형주의 함대들을 대파했던 이성휘는 유비군에게 전공을 세울 기회를 양도했다.
유비군. 손견군.
둘 다 소중한 동맹이다.
그렇기에 이성휘는 천하통일의 대업에 유비군과 손견군이 결정적인 공헌을 세우기를 바랐다. 그래서 양양성 공략의 주력으로 유비군을 내세웠다.
* * *
천하를 제패하여 위나라의 건국에 결정적인 공헌을 세운 이성휘는 무(武)의 상징과도 같았다.
드디어 만났다,
아버지께서 입이 닳도록 칭찬했던 영웅을.
위대한 호걸들의 영웅담을 읽으면서 낭만을 키워나갔던 소녀가 두 눈을 반짝이면서 들뜬 기대감을 품는 것은 매우 당연했다.
“어때? 어땠어, 공근?! 너무 떨려서 아무런 말도 못했는데…! 그래도 이상하진 않았지?”
“…….”
야생마처럼 난폭하고 괄괄한 여자가 얼굴을 붉히면서 쑥스러워하다니.
세상에 맙소사.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오랜 죽마고우는 부끄러움 많은 요조숙녀가 되어버린 그녀의 모습에 경악과 한탄을 금치 못했다.
“백부, 혹시 무엇을 잘못 먹은 것이냐?”
“난 멀쩡하거든!”
양주의 군벌들을 일방적으로 때려잡았던 늠름한 여걸이 입술을 달싹이면서 옷소매를 꽉 쥐었다.
오랫동안 동경해온 대상을 드디어 만났다는 사실에 고양감이 차올랐다. 두 발로 침상을 팡팡 걷어차면서 부끄러움에 젖은 비명을 토해냈다.
주유는 그 모습을 안타깝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정말 늠름하신 분이셨어! 역시 검 한 자루로 천하를 제패하신 영웅이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뭐, 그렇긴 하다만….”
천하제일검.
검 한 자루로 13주를 제패한 영웅.
압도적인 무위와 변칙적인 책략으로 천하를 요동치게 만들었던 인물이다. 주유 또한 손책과 마찬가지로 이성휘를 매우 존경하고 있었다.
“후우! 빨리 선봉에 나서고 싶어. 그리고 유표군 놈들의 수급을 모조리 베어버릴 거야! 틀림없이 천하제일검께서 공훈을 상찬해주겠지!”
유표군 장졸들의 수급을 진상하여 관심을 받겠다는 저돌적인 방법을 제시했다. 과연 호랑이의 딸이라 불리는 손책다운 생각이 아닐 수 없었다.
농담이지?
주유가 손책의 표정을 슬쩍 살폈다.
동경심으로 선명하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
어느 때보다도 찬연하게 빛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진심인 듯하다.
그녀의 죽마고우는 무거운 침음으로 한탄을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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