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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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고 있다.
모두 잿더미가 되어 흩날리고 있었다.
형주의 함대가,
형주가 자랑하던 수병들이…!
북서풍에 휩쓸린 불바다는 장강을 제패했던 함대들을 지옥으로 몰아넣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참상을 응시하던 채모는 우악스러운 절규를 토해냈다.
“이, 이럴 순 없다! 이럴 순 없어!! 안 된다, 이토록 무력하게 쓰러지다니!!”
손견군의 함선은 유표군의 함선에 비교하여 크기가 작고 날렵한 몽충(蒙衝)이었다.
몽충들은 불바다가 되어버린 장강을 기민하게 가로지르면서 공세를 퍼부었다. 그에 유표군은 반격에 나서지 못한 채 진화에만 급급했다.
“계속 던져라!”
“흐하하! 유표군 놈들이 무너진다!!”
장강을 주름잡았던 수적들이 크게 광소를 터트리면서 적함의 갑판 위에 기름항아리를 던졌다.
그리고 기름으로 젖어버린 갑판에 불화살을 날리면서 거센 화염을 일으켰다. 갑판에서 허둥대던 유표군 병사들은 화염에 삼켜진 채 비명을 내질렀다.
“부, 불이다!”
“몸에 불이 붙었다! 으아아아!!”
불이 옮겨붙었다.
갑판뿐만 아니라 병사들마저 불태웠다.
화염에 둘러싸인 유표군 병사들은 병장기를 내던진 채 강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격류가 몰아치는 강물은 결코 병사들에게 자비를 내려주지 않았다.
“허업! 허업!!”
“살려… 살려줘!”
강물에 빠져든 병사들이 허우적거렸다.
유속이 빨라졌다.
장강을 헤집는 함선들 때문이었다.
수많은 병사들이 소용돌이처럼 몰아치는 격류에 휩쓸리면서 모습을 감췄다. 물에 빠져죽은 병사들의 시체는 바다까지 가라앉고 말았다.
“어서 퇴각해야 합니다, 도독!”
“명령을… 시급히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이대로는 다 죽는다.
남은 함선들이라도 수습해야 했다.
아직 다 끝난 게 아니다.
장윤의 함선들이 양양성 전선에 남지 않았는가.
서둘러 퇴각하여 장윤과 합세하여 비열한 조조군과 손견군에게 오늘의 복수를 해야 한다. 제장들은 채모에게 후일을 도모하기 위한 철군을 부르짖었다.
“손견…! 찢어죽일 놈 같으니!!”
채모가 이를 빠득 갈았다.
그놈 때문이다.
양주의 비천한 짐승이 조조군에 빌붙었다.
한순간에 붉게 물들어버린 장강을 바라보던 채모는 조조군에게 가세한 손견을 저주했다.
“어서 강하태수에게 퇴각을 알려라! 장강을 신속하게 빠져나간다!”
“예, 도독!”
손을 쓸 방법이 없다.
더 이상의 전투 자체가 불가능했다.
퇴각해야 한다.
제장들에게 명령하여 급히 뱃머리를 돌렸다.
“황조가 저기 있다!”
“어서 추격하라! 강하태수 놈이 도망친다!!”
채모가 퇴각을 결정했을 때,
황조는 사방에서 손견군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수확을 거둘 시간이다.
손견군은 피냄새를 맡은 들개처럼 포악하게 달려들면서 황조의 목숨을 노렸다.
쿠웅-!
콰과과과곽!!
불바다를 돌파하던 황조의 기함이 측면에서 돌진해온 손견군 함선에 부딪쳤다. 뒤이어 가세한 몽충들까지 충돌하면서 피해는 더욱 극심해졌다.
쩌저저저저적-.
갑판이 박살났다.
연이은 충돌에 선체에 구멍이 뚫렸다.
장강을 제패했던 황조의 기함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화염에 그슬리고 연쇄적인 충격에 반파된 기함이 사면초가의 상황에 직면했다.
“황조를 죽여라!”
“저기 투구를 쓴 놈이 황조다!”
밧줄이 달린 갈고리에 걸렸다.
황조의 기함은 사냥꾼에게 포획된 들짐승처럼 손견군의 함선들에게 포위당했다.
손견군 병사들이 뛰어들었다.
이윽고 갑판에서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다.
“수적 놈들이 올라왔다!”
“기함을 사수하라! 적들을 몰아내자!!”
유표군 장졸들이 검을 치켜들면서 갑판으로 뛰어든 손견군을 상대했다.
하지만 물밀듯이 밀려드는 손견군 병력에 무너지고 말았다. 중과부적의 상황에 직면한 황조는 직접 활을 쏘면서 저항했지만 전황을 돌이킬 순 없었다.
“커헉!”
“어, 어서 피하십쇼…!”
황조의 부관이었던 진취와 장석이 쓰러졌다.
다른 장졸들도 마찬가지였다.
황조와 소수의 병력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손견! 죽어서도 네놈을 저주하겠다! 풍요로운 형주에 재앙을 몰고 온 역귀 같으니…!”
도망칠 곳이 없다.
결국 죽음을 각오해야 했다.
황조는 손견에게 저주를 쏟아내면서 칼자루를 거머쥐었다.
뒤이어 핏물을 뒤집어쓴 손견군 병사들에게 달려들었다. 황조는 강하의 명장답게 최후의 용맹을 떨쳤지만 손견군에게는 무의미한 발악에 지나지 않았다.
“황조의 목을 베었다!”
“흐하하하! 놈의 수급을 돛에 걸어라!”
조조군을 섬멸하고자 적벽에 집결했던 유표군의 함대들은 손견군의 급습에 전멸했다.
불바다가 되어버린 장강.
함선들을 불태우는 시커먼 연기로 가득했다.
일방적인 급습에 무너진 유표군은 장강에서 수많은 함선과 병력들을 잃고 말았다. 불바다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함선의 잔해들로 가득했다.
처절한 대패였다.
하늘을 뒤덮은 연기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 * *
잿더미가 되어버린 병력과 물귀신이 되어버린 병력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수전에서 치러진 화계.
참혹한 공세가 수많은 생명들을 먹어치웠다.
형주의 함선들이 차디찬 강물에 가라앉았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잔병들로부터 비보를 들은 유표는 대경실색하며 책상을 내리쳤다. 다른 장수들 또한 경악을 토해내면서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도, 도독이…!”
“수많은 함선들이 모두 침몰했단 말인가!”
압도적인 승세를 자랑하는 조조군에게서 역전할 유일무이한 전력이 소실되었다.
승리를 호언장담했던 유표군 장수들은 서로 눈치를 보면서 입을 다물었다. 확신하던 전력이 완패를 당하면서 유표군의 사기는 바닥을 치게 되었다.
“손견군이 가세하다니!”
“비열한 짐승답게 역적과 손을 잡았군!”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틀림없이 손견은 군세들을 이끌고 쳐들어올 겁니다!”
천하제일검 이성휘에 이어 강동의 호랑이까지 상대하게 되었다.
최악의 국면이다.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절망에 직면했다.
조조군과 손견군의 협공으로 양양성은 불바다가 될 터. 형주를 발판으로 만승천자의 옥좌를 거머쥐려 했던 위대한 야망은 잿더미가 함께 사라지겠지.
“아, 아버님….”
숙연한 공포가 좌중을 지배하고 있었을 때,
창백한 낯빛의 청년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의견을 제시했다.
유표의 장남인 유기였다.
“어서 강릉성으로 지원군을 보내야 합니다. 조조군과 손견군은 강릉성까지 도모하려 할 겁니다….”
머지않아 강하성(江夏郡)이 무너질 터.
뒤이어 조조군과 손견군은 강행군을 거듭하여 강릉성(江陵城)까지 공격할 게 분명했다.
강릉성은 후방의 요충지였다.
남형주의 모든 물자들이 비축되어 있었다.
천하를 제패했던 노련한 숙장들이라면 분명 강릉성을 접수하여 아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겠지. 그에 유기는 강릉성으로 병력들을 파견할 것을 건의했다.
“안 됩니다!”
“양양성의 방위가 위태로워집니다!”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양양채씨 가문을 따르는 장수들이었다.
병력을 떼어 보낸다니.
양양성의 방위에 구멍이 생기고 말 것이다.
물자들이 비축된 강릉성이 함락되더라도 결국 위태로운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럼에도 장수들은 유기의 제안을 격렬히 반대했다.
“주군!”
이제 강릉성이 위험해진다.
유표가 아들의 주장을 되뇌고 있었을 때-.
다급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적들이 강하성과 강릉성을…! 도, 동시에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지원군을 요청하는 파발들이 빗발치고 있습니다!”
유기의 예측은 정확했다.
그러나 조조군과 손견군의 민첩한 기동력을 예측하진 못했다.
이미 공세가 시작되었다.
형주의 함선들을 장강에 침몰시킨 조조군과 손견군은 강하성과 강릉성을 단번에 들이쳤다.
* * *
손견군은 강하성을,
조조군은 강릉성을 공격했다.
적들의 기세가 꺾였다.
채모가 대패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형주의 호족들은 저항을 포기하고 투항의 뜻을 밝혔다.
3만의 군세들을 이끌고 강릉성 공략에 나선 이성휘는 계속 무혈입성을 반복했다. 강릉을 수비하던 유표군 장졸들까지 투항해왔기 때문이다.
“항복하겠습니다!”
“부, 부디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머지않아 강릉성이 함락되었다.
천하제일검이 온다.
강릉성의 호족들이 성문을 열며 투항했다.
너무도 허무하게 희망이 꺾여버린 형주의 호족들은 위나라의 무력에 바짝 엎드렸다. 군세들을 거느린 이성휘를 목격한 호족들은 아연실색을 금치 못했다.
“강릉성의 보급로를 끊어버리면 양양성은 내부에서 무너지게 될 거예요.”
강릉성은 형주의 군참이다.
군참이 끊어졌으니 무너질 수밖에 없을 터.
극심한 뱃멀미를 앓다가 몸져누운 양수를 대신하여 제갈량이 군략을 총괄했다.
제갈량의 진언에 이성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군, 강하성이 함락됐습니다!”
강릉성을 접수한 이성휘가 군세들을 이끌고 북진을 개시하려 했다. 뒤이어 다급하게 달려온 전령이 강하성의 함락을 알렸다.
손견군의 맹공에 강하성이 쓰러졌다.
이성휘는 참모들과 의견을 조율하여 강하군을 손견군에게 양도했다. 동맹의 자격으로 함께 싸워준 것에 대한 답례였다.
“지금부터 양양성으로 진격한다. 이제 유표를 잡을 때다. 남형주의 병력들이 가세하기 전에 정벌을 완수하겠다!”
형주의 함대들을 차디찬 강물에 수장시켰다.
강하성과 강릉성을 접수했다.
유표군은 풍전등화의 상황처럼 위태로운 처지에 내몰렸다. 완승을 거둔 조조군과 손견군은 일제히 북상을 개시하면서 양양성을 위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