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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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사슬로 묶은 함선들이 화염에 잠식되었다.
콰직-!
불에 잠긴 돛이 꺾여나갔다.
수상(水上)이 온통 불바다였다.
삽시간에 솟구친 불길은 북서풍에 휩쓸리면서 조조군의 함선들을 더욱 맹렬하게 불태웠다. 광경을 지켜보던 유표군 병사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흐하하! 모조리 불타고 있다!”
“조조군이 무너진다! 역도들이 무너진다!!”
북서풍이 거세게 불었다.
빠르게 불길이 확산되면서 함선들을 먹어치웠다.
칠흑처럼 검은 연기.
강물을 말려버릴 듯한 맹렬한 불길.
하늘처럼 푸르게 물들었던 장강의 물결이 주황빛으로 변했다. 불길이 장엄하게 치솟을수록 장강의 물결 또한 붉게 물들었다.
“배를 포기해라!”
“갑판 위로 불길이 번지고 있다!”
철컥-! 철컥-! 철컥-! 철컥-!
풍랑이 거칠어질수록 금속음이 처절하게 울렸다.
틀렸다.
불바다에서 도망칠 수가 없다.
함선마다 연결된 쇠사슬 때문에 기동력을 발휘하기 어렵다. 연이어 불길이 확산되면서 쇠사슬에 묶인 함선들이 모두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했다.
“으아악!”
“어서 강에 뛰어들어라!”
조조군 병사들이 헐레벌떡 강물에 뛰어들었다.
한두 명이 아니었다.
수많은 인원들이 함선을 버리고 입수했다.
쇠사슬에 연결되지 않은 함선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구조에 나섰다. 강물에 빠진 병사들을 구조하면서 서서히 전선을 이탈했다.
“실로 장관이로군….”
이보다 호쾌한 전쟁이 또 있을까.
함선들이 불타고 있다.
남방을 정벌하겠다는 역적의 야망이 잿더미가 되어 흩날리고 있었다.
채모는 맹렬하게 일렁이는 불길들을 바라보면서 주먹을 거머쥐었다. 천하의 군벌들을 모두 제패했던 이성휘를 쓰러트렸다는 사실에 희열감을 느꼈다.
“형님, 저기를 보십시오!”
종제(從弟) 채중이 소리쳤다.
조조군의 기함이 가라앉고 있다.
새카맣게 타버린 대장군의 대장기와 운명을 함께하듯이 기함이 차디찬 강물 속으로 침몰했다.
과연 저 기함에 이성휘가 있을까.
상관없다.
놈은 모든 함선들을 잃었으니.
구사일생으로 불길 속에서 목숨을 건졌다고 할지라도 놈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결국 양양성을 코앞에 둔 채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을 터였다.
“우리들이 이겼다!”
“흐하하! 조조군이 완패했다!”
갑판 위의 병사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채중과 채화 또한 가세했다.
불바다를 바라보면서 승리의 달콤함에 도취되었다.
“장엄한 대승이로군.”
“조조군 놈들, 형주의 무서움을 잘 알았느냐!”
북서풍을 이용한 화계로 조조군의 함대들을 섬멸했다. 도독 채모와 강하태수 황조는 제장들을 소집하여 전열을 가다듬었다.
조조군을 마침내 물리쳤다.
형주의 장졸들이 승리에 도취되고 있었을 때-.
불길한 북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두웅! 두웅! 두웅! 두웅! 두웅!
“후방에 함선들이 출현했습니다!”
“저, 저 함선들은…! 양주의 손견군입니다!”
조조군을 섬멸했던 유표군 함대들은 재정비를 갖추기도 전에 손견군을 맞이하게 되었다.
수십 척의 규모였다.
신출귀몰하게 모습을 드러낸 손견군의 함대들은 위압을 가하듯이 유표군의 배후를 붙잡았다.
오후(吳侯) 손견.
제후의 대장기가 펄럭였다.
손견이 전장에 당도했다.
붉은색으로 칠한 손견군의 기함이 위풍당당한 용력을 뽐내면서 유표군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 * *
어째서.
대체 어째서.
놈은 전혀 연관이 없을 터.
그런데 무슨 이유로 전군을 동원했단 말인가.
요란하게 울리는 북소리에 압도당한 채모는 북서풍에 펄럭이는 손견의 대장기를 노려보았다. 분명 손견이 장강 전선에 당도한 것이었다.
‘설마 전투를 거들어줄 셈이었나? 아니, 오만불손한 손가 놈이 그럴 리는 없겠지….’
아군을 도우려는 목적으로 전선에 개입하진 않았을 터. 어째서 놈이 전군을 동원했단 말인가.
이해할 수 없다.
두 눈을 부릅뜨면서 손견군을 노려보았다.
“소, 손견이다!”
“빌어먹을! 양주의 잡놈들이 어째서!”
손견군의 돌발적인 개입에 유표군 장졸들은 경악을 토해냈다.
난데없이 등장한 손견군에게 배후를 잡혀버린 유표군은 두려움을 내비쳤다. 갑판 위를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어떻게든 대응하려 했다.
하지만,
그를 손견군이 용납할 리 없었다.
“전속력으로 돌진하라!”
“공격하라! 채모와 황조의 배후를 쳐라!”
유표군의 배후를 붙잡은 손견군의 함선들은 북서풍을 타고 돌격을 벌였다.
북서풍을 동원하여 돌진했던 유표군의 폭선처럼 손견군의 함선들 또한 공세를 감행했다. 역으로 허점을 붙잡힌 유표군은 허둥대면서 전열을 흩트렸다.
“기름항아리를 던져라! 불화살을 쏴라!”
“놈들이 북서풍에 붙잡혔다! 지금이 기회다!”
단양교위(丹楊校尉) 황개.
봉의중랑장(奉義中郞將) 정보.
손견군이 자랑하는 숙장들이 특공에 나섰다.
밀봉한 항아리를 던졌다.
가득 들어간 내용물은 코를 찌르는 기름이었다.
쩌억-! 쨍그랑-!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항아리가 박살나면서 기름이 흠뻑 쏟아졌다.
유표군 함선들의 갑판이 악취가 진동하는 기름으로 온통 가득했다. 뒤이어 손견군의 궁수들이 일제히 불화살을 날리면서 유표군에게 불지옥을 선사했다.
“크아악!”
“부, 불이다! 갑판에 불이 붙었다!!”
기름으로 범벅이 되어버린 갑판에 불길이 솟구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주로 수적이 쓰는 방법이다.
장강의 수적들을 전력으로 받아들인 손견군은 능숙하게 화공을 일으켰다.
조조군을 불태웠던 유표군의 함대들이 도리어 화계에 당했다. 형주의 정예병들이 비천한 수적 출신에게 무너지는 어이없는 참극이 벌어졌다.
“불화살을 쏴라!”
“흐하핫! 놈들이 속절없이 무너진다!”
황개와 정보의 특공이 작렬했다.
계속해서 불화살을 날렸다.
기름항아리를 던지면서 더욱 집요하게 밀어붙였다.
무적을 자랑하던 형주의 함대가 무너진다.
화공에 당해버린 채모와 장윤의 장졸들은 혼비백산하며 뱃머리를 돌렸다. 후미를 공격하고 있는 손견군에게 어떻게든 응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함선이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젠장, 북서풍 때문에…!”
“거센 바람이 불어닥쳐 배가 움직이질 않습니다!”
승리의 상징이었던 북서풍이 도리어 유표군의 숨통을 옥죄었다.
배가 움직이질 않는다.
필사적으로 노를 저어도 요지부동이었다.
더욱이 북서풍에 고조된 불길이 함선들을 휩쓸면서 피해가 계속 늘어났다. 후미를 제압당한 유표군은 조조군이 당했던 것처럼 손견군에게 일방적으로 무너졌다.
“닻을 펼쳐라! 북쪽으로 퇴각한다!”
“아, 안 됩니다! 조조군의 함선들이 길을 막고 있습니다!”
배후를 공격받고 있다.
그에 전진하여 거리를 벌리려 했다.
하지만 불바다에 휩싸인 조조군의 함대들이 선두를 떡하니 가로막고 있었다. 맹위를 떨쳤던 유표군은 도리어 앞뒤로 공격당하는 수세에 직면했다.
“도독! 어서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이대로는 다 죽습니다!”
그을음을 뒤집어쓴 무관들이 소리쳤다.
이대로는 모두 죽는다.
불길에 갇혀 비참하게 죽게 되리라.
앞뒤를 봉쇄당한 유표군의 함선들은 완강한 북서풍을 돌파하며 전선을 이탈했다. 하지만 그것을 예상했던 손견군은 미리 복병을 배치해둔 뒤였다.
“적선이 전열을 이탈했다!”
“나포해라! 형주의 함선들을 차지하자!”
수적 출신의 손견군 병사들이 나섰다.
뱃머리로 선체를 들이박았다.
뒤이어 갑판으로 뛰어들어 백병전을 벌였다.
강 위에 도망칠 곳은 없다.
유표군은 손견군의 맹습에 무너지면서 필사적인 퇴각을 시도했다. 동맹으로 가세한 손견군의 맹공에 유표군은 전멸을 앞둔 처지에 놓였다.
* * *
불타는 적벽.
그것은 유표군의 완패를 의미했다.
손견군이 움직였다.
강동의 호랑이가 위나라에 가세하여 종지부를 찍었다.
이성휘와 긴밀하게 연락하면서 동맹을 조율했던 손견이 결국 칼자루를 뽑아들었다. 유표군의 배후를 급습하여 맹위를 떨침으로서 동맹군의 신의를 지켰다.
“주군은 최선의 결정을 내리신 거다, 백부.”
“…나도 알아.”
전황을 주시하던 주유가 격려하듯 말했다.
그에 손책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받아쳤다.
알고 있다.
가족들을 위해 내리신 결단임을.
그렇기에 미안하면서도 답답했다. 자신이 미숙하여 아버지가 위나라에 굴종한 것 같았기에.
“결국 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겠지. 누구도 광풍처럼 몰아치는 대세를 거스를 순 없는 법이다.”
“…….”
천하를 거머쥐는 영웅.
아버지가 그 영웅이 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지금까지 수많은 전장들을 누비면서 절차탁마를 거듭했다. 항상 존경해온 아버지에게 천하의 권력을 안겨드리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너무 늦어버렸어. 조조가 이미 천하의 권력을 거머쥐었으니까.’
허망함이 밀려들었다.
아버지에게 천하를 바치겠다는 야망은 결국 일장춘몽처럼 흩어지고 말았다.
조조군이 천하를 통일할 터.
손책은 뼈저리게 통감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우욱…! 우욱!”
짙은 상념에 빠져들었을 때,
질척대는 토악질 소리가 상념을 방해했다.
“하여간 중원 사람은 허약하다니까!”
“하, 하지만 갑판이 너무… 우욱! 흔들려서…!”
금발을 늘어뜨린 여인이 파리해진 낯빛으로 양동이에 연신 토악질을 했다.
손견군에 밀사로 파견되었던 양수였다.
함선에 탑승한 양수는 뱃멀미를 지독하게 호소하면서 갑판에 주저앉았다. 손견군의 참모 자격으로 참전했지만 뱃멀미 탓에 도움이 되질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