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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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성(樊城)은 장강에서 뻗은 지류들을 삼면을 통해 해자처럼 감싸고 있는 형주(荊州)의 요새였다.
수상(水上)의 성이라고 해야 할까.
광활한 넓이를 자랑하는 장강의 지류들에 둘러싸인 번성의 모습은 용맹한 수문장처럼 웅장했다.
과연 번성을 함락시킬 수 있을까.
위나라 장졸들은 유표군의 정예군단이 호위하는 번성을 바라보면서 의문을 품었다. 번성을 지키고자 양양성에서 출진한 함대들이 배후에서 위풍당당한 용력을 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 맙소사…!”
“저렇게 큰 함선은 처음 보는군!”
“형주의 함선들이 저토록 대단했단 말인가!”
웅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유표군의 누선들이 밀물을 호쾌하게 가로질렀다.
펄럭이는 깃발.
갑판 위를 지키는 수많은 병사들.
채모와 장윤의 함대가 북쪽으로 내려온 침략자들을 위협하듯 모습을 드러냈다. 무려 수십 척에 육박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에 조조군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수전(水戰)에서는 도저히 가망이 없다.
어쭙잖게 수전을 벌였다간 그대로 수장될 터.
“싸움을 피하고 강을 건넌다면….”
“그게 가능하리라 보는가! 분명 함대들이 급습하여 부교를 무너트릴 걸세!”
유표군의 함대들을 따돌리고 대규모 도하를 감행하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처절하게 박살나는 부교.
차가운 강물에 집어삼켜질 수많은 장졸들.
결코 도하가 성공할 리 없었다.
그렇기에 위나라 장수들은 비관적인 반응을 내비치면서 뒤로 물러섰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물에서 싸워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번성을 포위하라. 일제히 공격하여 번성을 함락시키겠다.”
군중이 공포와 두려움에 휩싸였음에도 이성휘는 공성을 감행했다.
평소와 다름없는 이성휘의 모습에 위나라 제장들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불안감이 계속 뇌리를 엄습했지만 애써 용기를 냈다.
“그대들이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다.”
“하명하십시오.”
제장들을 돌려보낸 이성휘는 장합과 고람에게 특명을 내렸다. 원소군의 항장들에게 전공을 세울 기회를 내려주기 위함이었다.
그것을 내심 짐작했는지,
장합과 고람은 호기로운 모습으로 명을 받들었다.
“부르셨습니까.”
뒤이어 조운이 군막 안으로 들어섰다.
회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미녀를 응시하던 이성휘는 장합과 고람을 내보냈다. 그리고 조운에게 특수한 밀명을 전달했다.
밀명을 받든 조운이 입을 열었다.
“…시일이 오래 걸릴 텐데요.”
“상관없다. 임무만 완수한다면.”
이성휘는 함께 천신만고를 극복했던 부하들처럼 조운을 신뢰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밀명을 맡긴 것이었다.
그 점이 조운은 이해되지 않았다.
어째서 나를 믿지?
딱히 신뢰를 받을 만한 행동은 하지 않았는데.
조운은 경애하는 주군의 대업을 가로막았던 이성휘를 여전히 원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군께서 진심으로 그를 의지하고 있었기에 불편한 마음을 숨겼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포로의 신분으로 압송되어 파렴치한 시녀복을 입는 굴욕을 겪었지만 그래도 적잖은 은혜들을 입었다.
이제 와서 배신할 생각은 없다.
단순히 개인적으로 미워하고 있을 뿐이지.
그렇기에 조운은 결연한 모습으로 이성휘의 명령을 받들었다. 만약 그의 신변에 불상사라도 벌어지게 된다면 경애하는 주군께서 분명 슬퍼하실 테니까.
* * *
형주는 이른 봄부터 우기(雨氣)가 짙어지는 지역으로 유명했다.
먹구름이 하늘을 가렸다.
이윽고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번성을 사면에서 포위한 조조군은 진흙탕처럼 질척해진 지면을 가로지르면서 공세를 벌였다. 성난 함성과 함께 번성 공방전이 펼쳐졌다.
“성을 공격하라!”
“위나라의 군세들이여, 번성을 넘으라!!”
병마들이 일제히 진격했다.
새카맣게 집결한 군세들이 돌격하는 모습은 모래벌판을 뒤덮는 파도를 보는 것 같았다.
20만 대군이 움직였다.
성벽에서 전장을 주시하던 유표군 병사들은 마른침을 삼키면서 병장기를 치켜들었다.
“쏴라!”
“역적들이 온다!!”
창궐한 역병처럼 순식간에 천하를 집어삼켰던 위군(魏軍)이 사방에서 쳐들어왔다. 당장이라도 작은 성을 짓밟아버릴 것처럼 파상공세를 퍼부었다.
유표군 장졸들은 두려움에 떨면서도 활을 들어올렸다. 뒤이어 가까이 근접한 조조군을 향해 일제사격을 가했다.
“방패를 들어라!”
“화살이 날아든다! 모두 방패를 들어라!!”
세찬 화살세례가 쏟아지는 빗방울을 날카롭게 관통하면서 조조군을 노렸다.
수많은 공방전을 치렀던 조조군 병사들은 화살세례를 목격하자마자 방패를 들어올렸다. 쐐액, 하는 파공음과 함께 화살들이 코앞까지 도착했다.
“큭!”
“물러서지 마라!”
화살들이 방패에 꽂혔다.
발걸음이 잠시 주춤했다.
그러나 완전히 멈추는 일은 없었다.
도처에서 처절한 비명들이 울렸음에도 병사들은 당당하게 성벽으로 나아갔다. 이윽고 함성과 함께 수많은 운제(雲梯)들이 성벽을 찍어눌렀다.
“언니, 선봉군이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적들의 저항이 제법 거세네.”
위나라의 동맹으로 참전한 유비군이 파상공세의 일각을 담당했다.
붉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소녀가 우렁찬 목소리로 장졸들을 호령했다.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화살세례에도 당당하게 선두를 지키면서 위엄을 떨쳤다.
“빌어먹을, 아주 억수처럼 쏴제끼네! 궁수들이 대체 얼마나 많은 거야?!”
장팔사모를 치켜든 장비는 혀를 내두르면서 형주의 철옹성을 바라보았다.
번성,
코딱지만큼 작은 성이다.
하지만 그만큼 방어가 견고하고 험준했다.
유표군이 정예들을 배치하여 번성의 방위를 강화했기에 뚫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번성을 지휘하는 장수는 형주에서 무명이 자자한 문빙이었다. 당연히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충차! 어서 충차를 가져와! 저 빌어먹을 성문을 뚫어버려!!”
전장을 가로지른 장비와 유비군 무관들은 철옹성의 성문에 도달했다.
장비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호령하자 공병들이 신속하게 충차를 끌고 왔다. 소나기에 질척질척해진 진흙탕을 통과한 충차가 이윽고 성문을 두들겼다.
꽈앙-!
꽈아앙!!
연이어 충각(衝角)을 때려박았다.
금속음이 울렸다.
하지만 번성의 성문은 완고하게 공세를 버텨냈다.
유비군은 충차를 동원하여 번성의 성문을 공격했음에도 돌파에 실패했다. 목재로 만들어진 일반 성문과는 달리 번성의 성문은 갑옷처럼 금속을 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야! 뭐가 저렇게 튼튼해?”
성문에 움푹 패인 자국이 생겼다.
그러나 성문을 강타했던 충차도 마찬가지였다.
날카롭던 끝이 무뎌졌다.
성문을 거듭하여 때렸지만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위험합니다!”
“일단 물러나시지요!”
설상가상으로 운제를 타고 성벽을 오르던 병사들도 난항을 겪고 있었다.
문빙이 극을 휘두르면서 분전하자 유표군 장졸들이 크게 고무되어 반격했다. 계속 위태롭게 흔들리던 운제가 무너지면서 굉음이 울렸다.
“중원의 비열한 역도들을 격멸하라! 우리들은 형주의 수문장이다! 결코 번성이 뚫려선 안 된다!!”
형주의 맹장이 완강하게 버텨냈다.
과연 철벽이다.
몰아치는 파상공세에도 태세를 유지했다.
형주를 쓸어버릴 것처럼 강행군을 거듭했던 조조군은 번성에서 잠시 주춤하게 되었다. 문빙과 결사대의 저항이 너무도 맹렬했기 때문이다.
* * *
계속 버텨냈다.
20만 대군이 흔들리고 있었다.
번성은 형주의 철옹성이다.
갑판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주시하던 채모와 장윤은 결사항전을 거듭하는 문빙과 장졸들을 응원했다.
“하지만 계속 버텨낼 순 없을 겁니다! 우리들도 이제 공세에 나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물론이오, 부도독.”
장윤의 말에 채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공세가 번성에 집중되고 있다.
채모는 상륙을 시도하여 공성전에 집중하는 조조군을 교란하고자 준비했다.
수륙양용으로 동시에 공세를 감행한다면 분명 조조군은 부화뇌동에 빠질 터.
채모는 초조한 기색을 드러내면서 조조군의 피해와 소모가 더욱 누적되기를 기다렸다. 끝까지 문빙과 결사대가 버텨내리라는 믿음을 가지고서.
“그런데 저것은 대체….”
전장을 주시하던 채모의 시선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후방의 조조군 병력을 집중했다.
무기를 들지 않았다.
삽과 곡괭이를 들고 있을 뿐이다.
공방전에서 제외된 병력들은 밤낮으로 땅을 파면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치열한 공방전을 거듭하는 병력들 때문에 보이지 않았던 조조군의 음험한 꾀가 며칠 만에 드디어 포착되었다.
“설마! 이, 이성휘…! 빌어먹을 역도 놈이!!”
형주의 풍토에 능통했던 채모는 조조군이 가하려는 공세를 단숨에 간파했다.
공포에 떨었다.
아연실색하며 갑판 위의 무관들을 소집했다.
틀림없이 수공(水攻)이다.
장강의 지류들에 둘러싸인 번성을 단숨에 물바다로 만들려는 수작이리라. 오로지 토목공사에만 전념하는 적들의 모습을 통해 짐작할 수 있었다.
* * *
단기간에 수공을 준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성휘는 시도했다.
제갈량의 제안을 수용하여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였다.
8만 명에 육박하는 병력을 동원하여 장강의 지류들이 번성으로 향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수로마다 둑들을 배치하여 강물을 저장하기까지 했다.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둑들을 일제히 터트리면 번성은 물바다가 되겠죠.”
제갈량이 이성휘에게 완료를 보고했다.
준비가 모두 끝났다.
제방들에 비축된 강물은 번성을 물바다로 만들어버리고도 남을 정도였다.
장합과 고람을 위시한 장졸들의 활약으로 단기간에 수공 준비를 끝마쳤다. 번성의 명운을 거머쥔 이성휘는 제갈량에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공세를 승인했다.
“야음을 틈타 후방으로 물러난다. 새벽녘이 밝아올 때 수공을 개시하겠다.”
“네.”
이성휘의 명령에 제갈량이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