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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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만 대군이 남하하기 시작했다.
형주(荊州)에 짙은 전운이 깔렸다.
그리고 양주(揚州) 또한 형주와 마찬가지였다.
위나라를 건국한 조조군이 남정 정벌을 선언하면서 양주의 손견군은 곧장 비상령에 돌입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20만 대군이 내려온단 말이냐.”
어처구니가 없다.
20만 대군,
상상을 초월한 규모가 아닌가.
수많은 전투들을 승리로 이끌었던 강동의 호랑이조차 경악할 정도였다. 장강의 물결처럼 거침없이 쏟아질 조조군 병력들을 상상하면서 혀를 내둘렀다.
“한평생 수많은 전투들을 치렀으나… 20만 대군이 동원되었다는 소식은 처음이다.”
손견의 중얼거림에 휘하의 제장들은 경직된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남방을 모조리 쓸어버리기 위한 정벌군이 틀림없었다. 형주를 포함하여 익주와 양주, 교주까지 한꺼번에 쓸어버리기 위한 군세들이다.
대장군(大將軍) 이성휘.
수많은 군벌들을 멸망시킨 괴물이 정벌군을 거느리고 있었다.
손견군은 조조군과 군사동맹을 맺은 긴밀한 관계였음에도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다. 조조군이 과거에 비해 너무도 강대한 힘을 거머쥐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조조가 양주를 도모하겠습니까? 주군을 제후로 책봉했던 사람이 바로 조조입니다. 어떻게든 아군을 회유책으로 구슬리려 할 겁니다.”
주군을 오후(吳侯)에 책봉하지 않았던가.
오군(吳郡)은 제후의 땅이다.
한나라의 제후국인 위나라가 정식으로 책봉된 제후를 공격할 리가 없다.
손견군의 관료들은 양주가 오나라 제후의 봉토임을 주장하면서 다소 안일한 답변을 내놓았다.
“하지만 그때와는 많은 것들이 달라졌습니다. 이제 더 이상 조조군은 동맹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천하통일에만 전력을 다할 뿐입니다.”
건위중랑장(建威中郎將) 주유가 입을 열었다.
수많은 군벌들과 대치하던 조조군은 존재하지 않는다. 천하통일의 위업을 완수하여 결국 한나라를 집어삼키려는 위나라만이 존재할 뿐이다.
천하통일.
그것은 한나라 13개 주의 정복을 의미했다.
복종하든가. 아니면 멸망하든가.
아군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그것이 전부였다.
한나라를 멸망시키려는 위나라가 제후의 봉토 따위에 양심의 가책을 느낄까? 성난 황소처럼 밀어붙이며 남방 정벌을 완수하려 들 것이었다.
“놈들이 쳐들어온다면 전력을 다할 뿐이오!”
“조조군 놈들, 올 테면 오라!”
한당. 정보. 황개. 조무.
손견을 오랫동안 보필해온 숙장들은 기꺼이 맞서겠노라며 호기로운 모습을 보였다.
죽기를 각오하면 이길 수 있다.
20만 대군의 위용에도 손견군의 숙장들은 결코 굴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다수의 장수들은 흐려진 낯빛을 보이면서 조조군의 침공을 두려워했다. 일말의 승산도 없는 전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조조군과 싸운다면 유표군과 동맹을….”
“그 오만한 늙은이가 동맹을 받아들이겠소?”
손견군과 유표군은 불구대천의 원수나 다름없는 험악한 적대관계였다.
동맹?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었다.
타협과 조정이 불가능한 원수지간이 어떻게 동맹을 맺을 수 있겠는가. 유표군은 멸망하는 순간까지 결코 아군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으리라.
“싸움을 걸어온다면 싸울 뿐이에요. 그게 오군손씨 가문의 방식이니까요.”
백금발을 늘어뜨린 소녀가 늠름한 발걸음을 내딛으면서 장수들에게 말했다.
기도위(騎都尉) 손책.
호랑이의 여식이 맹렬한 용맹을 내비쳤다.
오로지 가족들을 위해 고군분투를 거듭해온 여걸은 결코 물러섬이 없었다. 양주의 군벌들을 모두 때려잡은 맹장다운 면모였다.
“제장들은 휘하를 거느리고서 대기하라. 결코 가벼이 움직여선 안 된다.”
손견은 신중하게 숙고하는 모습을 보였다.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더욱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세력을 호령하는 군주로서 군세들을 거느린 손견은 노련한 호랑이가 되었다. 승산이 희박하다는 것을 알기에 날카로운 발톱을 숨긴 채 조조군의 동태를 살폈다.
* * *
위나라를 선포한 조조는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고자 모든 병력과 물자들을 집중했다.
20만 대군.
웅장한 태산이 움직이듯 지축이 흔들렸다.
난세의 숙명을 짊어진 장졸들이 강행군을 거듭하면서 남하를 개시했다. 악전고투를 돌파해온 역전의 용사들답게 거침없이 전장으로 나아갔다.
“적들의 동태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습니다. 아마 장강에서 대적하려는 모양입니다.”
위나라의 친위기병대가 남양군(南陽郡)에 당도했다.
척후들을 풀어 전선을 살폈다.
하지만 유표군은 뭍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대장군부의 참모들이 예상했던 대로 유표군은 수전(水戰)을 선택했다. 절망적인 격차를 뒤집어낼 유일한 방법이 바로 함대들을 동원한 수전이었기 때문이다.
“…역시 그런가.”
회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걸이 인상을 찡그리면서 중얼거렸다.
지금까지 수많은 전투들을 치렀지만 단 한 번도 물에서 싸웠던 적은 없었다. 그렇기에 조운은 꺼려하는 반응을 보였다.
다른 장수들도 마찬가지일 터.
아득하게 펼쳐진 장강을 목격한다면 분명 아연실색을 금치 못할 것이었다.
‘장강이라…. 분명 바다보다 넓다고 들었는데.’
산골짜기 촌년이 장강을 봤을 리가 없었다.
바다만큼 넓은 강.
한나라를 위아래로 양분하는 물의 경계.
과연 위나라의 군세들은 장강을 넘을 수 있을까.
조운은 조조가 이룩하려는 천하통일의 위업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경애하는 주군으로부터 간곡한 부탁을 받았기에 어쩔 수 없이 참전했을 뿐이니까.
“어떻게 넘으려는 거지? 유표군의 함대들이 사방에서 덮쳐올 텐데. 수영도 못하는 오합지졸을 데리고서 무엇을 하겠다고….”
수영이나 제대로 할까.
아니,
애초에 함선에 타본 경험이 있기나 할까?
함선에 오르자마자 역전의 용사들은 한낱 오합지졸로 전락하게 되리라. 심각한 뱃멀미를 호소하면서 스스로 자멸하게 될 테지.
‘진짜 주군의 명만 아니었어도….’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남양군에 당도한 조운은 척후들을 신야(新野)와 번성(樊城)까지 파견했다. 신야와 번성에서 유표군과 초전을 치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 *
유표군은 남양군의 병력들을 연이어 후방으로 물리면서 번성에 집중했다.
번성은 양양군(襄陽郡)의 입구였다.
그렇기에 유표는 번성에 정예들을 배치하면서 채모와 장윤으로 하여금 후방을 지원하도록 명령했다.
출병으로부터 한 달 뒤-.
위나라의 본대가 형주에 모습을 드러냈다.
“예상대로 방비가 철저하군.”
휘하 장수들을 대동하고서 유표군의 성채를 정찰한 이성휘가 입을 열었다.
준엄한 방비를 자랑했다.
형주의 정예병들이 단단히 지키고 있는 것이리라.
더욱이 번성을 철통처럼 수비하는 장수는 유표군의 맹장인 문빙이었다. 문빙은 성벽을 높게 쌓고 병사들을 독려하면서 위나라의 20만 대군을 맞이했다.
“번성을 점령해야만 진군이 가능해요. 반드시 번성을 교두보로 확보해야 돼요.”
번성은 양양군의 입구였다.
그리고 장강을 수비하는 수문장이기도 했다.
이성휘를 뒤따르던 양수는 번성의 중요성을 나열하면서 공세를 진언했다. 대군을 동원한다면 능히 번성을 무너트릴 수 있을 테니까.
“그렇다면 제가 책략을 마련해볼게요. 제게 맡겨주신다면 단숨에 철옹성을 대장군에게 바치겠습니다.”
방울꽃처럼 아름다운 은발을 늘어뜨린 소녀가 자신감에 찬 모습을 보였다.
좋은 방안이라도 있는 걸까. 제갈량은 번성 공략을 자신에게 맡겨달라며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에 이성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허락했다.
“큭! 제가 먼저 운을 뗐는데…!”
“그러게 빨리 낚아챘어야죠. 그렇게 커다란 가슴을 달고 있으니까 둔한 거예요.”
험준한 요새를 단숨에 함락시킨다면 완벽한 기선제압을 이뤄낼 수 있을 터.
공방전을 승리로 장식하는 영광을 거머쥐고자 나섰던 양수는 눈앞에서 제갈량에게 기회를 빼앗겼다. 기회를 빼앗겨 분했는지 노기를 터트렸다.
“덕조,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다.”
“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성휘의 분부에 당찬 목소리로 답했다.
대체 무슨 명령이실까.
꼬리를 흔들면서 반기는 강아지처럼 해맑은 미소를 지으면서 기다렸다.
“본좌는? 본좌는 이제 뭘 하면 됨?!”
제갈량과 양수가 지시를 이어받았다.
그에 사마의가 고개를 갸웃갸웃 흔들면서 이성휘에게 물었다.
잠시 사마의를 응시하면서 고민을 거듭하던 이성휘는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크게 반색했다. 뒤이어 사마의를 곁에 두어 편애하는 모습을 보였다.
“중달, 긴히 논의할 문제가 있다.”
“알겠음!”
으쓱으쓱-.
사마의가 어깨를 연신 들썩였다.
봤지?
대장군은 본좌를 가장 총애한다구.
기세등등한 표정을 지은 사마의는 제갈량과 양수에게 거만함을 떨었다. 대장군의 총애를 짊어진 사마의는 동기들의 질투 섞인 시선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뭔가요, 그 낯짝은.”
“대장군은 어째서 낙제생을 총애하시는지.”
이성휘는 위군에서 출병한 이후부터 사마의를 계속 곁에 두었다.
노골적인 편애라고 생각한 제갈량과 양수는 퉁명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하필이면 편애의 대상에 사마의였기에 마음이 더욱 불편했다.
그래서 어떻게든 전공을 세우려 한 것이었다.
여러모로 덜떨어진 동기에게 밀린다는 것은 상상하고 싶지도 않은 최대의 수치였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