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0화>
============================
남방(南方)을 정벌하라.
드디어 천하통일의 대업을 실현할 때다.
위왕(魏王) 조조가 전쟁을 선포하자 전운이 고조되었다. 휘하의 제장들은 드디어 유표군과 유언군을 끝장낼 때가 왔다며 기꺼이 전쟁에 동참했다.
“백성들을 위해 하루라도 빨리 난세를 끝내고자 노력하는 대장군의 모습… 정말 좋아해요. 분명 태중의 아이들도 기뻐할 거예요.”
상아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인이 얼굴을 붉히면서 진심어린 고백을 속삭였다.
쉽지 않은 과업이 될 터.
그럼에도 대장군은 남방 정벌의 과업을 짊어졌다.
어려운 결단을 내린 이성휘를 존경스럽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불안에 떠는 백성들을 구제하고자 나선 용감한 모습에 또 한 번 반해버리고 말았다.
“에이, 설마요. 어떻게든 전하에게 용서를 받아내려고 꼼수를 부리시는 것처럼 보이는데.”
경의를 담은 눈빛으로 서방님을 응원하는 고모님의 모습에 조카가 어깨를 으쓱이며 중얼거렸다.
감격적인 순간에 찬물을 끼얹어버리는 순유의 행동에 순욱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곧이어 싸늘하게 내려앉은 표정을 지으면서 노여움을 드러냈다.
“대장군께선 난세를 끝장내어 태평성대를 열겠다는 충정으로 나서신 것입니다. 조카님, 감히 대장군을 음해하려 들지 마세요.”
“노, 농담이었어요…!”
이래서 늦깎이는 무섭다니까.
서방님을 향한 맹목적인 신뢰를 자랑하는 고모님의 모습에 순유는 급히 손사래를 쳤다.
우여곡절 끝에 받아낸 집필이 취소될지도 모른다.
폭력에 굴복해버린 순유는 명확하게 정답에 도달했음에도 발언을 철회해야 했다. 여전히 순유에게 있어 고모님은 공포의 대상이었기에.
“그럼요! 설마 전공을 내세워서 용서를 받아내려는 얕은 잔꾀를 부리겠어요? 주군께선 절대로 그런 소인배가 아니시죠!”
“…….”
과연 순유,
신묘한 혜안이 족집게처럼 능통하다.
촌철살인처럼 날카로운 순유의 발언에 이성휘는 태연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식은땀을 주륵 흘렸다.
어떻게든 고모님의 심기를 달래고자 급하게 둘러댔다. 하지만 순유의 급조한 변명은 화살처럼 날아들어 이성휘의 양심을 벌집으로 만들었다.
“정말 고마워요, 대장군. 진심으로 백성들을 생각해주는 대장군이 정말로 자랑스러워요.”
“…과찬이십니다.”
눈물기로 촉촉해진 진녹색 눈동자를 반짝이면서 고백하는 순욱의 간절한 목소리가 마음을 자극했다.
짙은 감동을 느꼈다.
그리고 양심이 처절하게 무너졌다.
정결하고 총명한 영천순씨 가문의 여인을 기만하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절대로 들켜선 안 된다는 중압감이 엄습해왔다.
“이야기 들었어, 주인님! 남방의 역적들을 정벌하기로 결정했다며?!”
“주인님께서 어려운 용단을 내리셨네요.”
순욱과 순유를 보낸 뒤,
저택으로 돌아온 이성휘는 늠름하고 아름다운 시녀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게 되었다.
남방을 정벌하기로 결정했다.
여포와 장료는 들뜬 목소리로 주인님을 반겼다.
황위를 찬탈하려 했던 유표군과 유언군을 쓰러트리면 천하통일의 대업을 달성할 수 있을 터. 여포와 장료는 경애하는 주인님에게 열렬한 존경을 보냈다.
“…그런 셈이다.”
“역시 주인님은 대단해! 대역무도한 역적들은 당연히 주인님이 응징해야지!”
대역무도한 역적이라….
일단 천인공노할 소인배는 눈앞에 보인다만.
사실을 들킨다면 어떻게 될까.
사랑스럽게 빛나는 여포의 눈동자를 응시하던 이성휘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로 마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으면 좋겠네요.”
장료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속내를 훤히 알고 있답니다~
흑발을 늘어뜨린 미녀가 야릇하게 눈웃음을 지으면서 이성휘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오랫동안 보필한 시녀답게 주인님의 속내를 정확하게 간파했다. 그럼에도 장료는 잔꾀를 부리는 주인님의 모습조차 사랑스럽다며 배시시 웃음을 터트렸다.
“오셨사옵니까, 상공.”
시녀들로부터 열렬한 공세를 받던 이성휘에게 연분홍꽃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인이 다가왔다.
시녀들을 이끄는 시녀장.
집안일을 총괄하는 안주인.
천하제일검의 둘째 아들을 낳은 낙양제일미.
대규모 원정을 반복하면서 가정을 비우는 지아비가 원망스러울 법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초선은 책무에 충실한 남편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있었다.
“새 거처는 어떻습니까.”
“예, 무척 마음이 드옵니다.”
초선은 이성휘를 따르고자 허도에서 업성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여전히 엄동설한이 위세를 떨치고 있었음에도 꿋꿋하게 옆을 보필해준 아내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보드라운 뺨을 쓰다듬었다.
날씨 때문인지 뺨이 많이 차가웠다.
작약꽃처럼 아름다운 머리카락. 낙양제일미로 명망을 떨친 고아한 용모.
아이를 낳은 유부녀임에도 여전히 초선을 낙양제일미의 매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또 출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소녀는 괜찮사옵니다. 상공께선 오랜 난세를 평정하고자 출진하시는 것이 아니옵니까? 소녀는 그저 상공을 믿을 뿐이옵니다.”
빛이 난다.
얼굴에서 광채가 뿜어지는 듯했다.
일말의 오욕조차 보이지 않는 선의의 완성체.
어떻게든 불륜을 무마하려는 더러운 목적으로 정벌을 결정한 천하의 난봉꾼과 매우 대조적이었다. 순수한 광채를 목격한 이성휘는 뺨을 바르르 떨었다.
“아, 그으….”
“현이도 충분히 이해할 것이옵니다. 아버지가 가족들을 위해 분골쇄신하고 있노라고… 나중에 장성하면 알게 되지 않겠사옵니까.”
사실대로 말해야 할까.
말을 더듬으면서 고민을 곱씹었다.
하지만 초선은 반복하여 주저하는 이성휘의 모습에 짐짓 착각했는지 양심의 가책을 더욱 가중시켰다.
“푸훗…!”
“응? 왜 그래, 문원?”
동상처럼 그대로 굳어버린 이성휘의 모습에 장료는 표리부동을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푸훗, 아하핫!”
“치사해. 나도 알고 싶은데.”
장료가 대답을 회피하자 여포는 못마땅하단 표정을 지으면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 * *
익주(益州)와 형주(荊州)를 정벌하려 한다.
조조군이 남방 정벌을 선포하면서 휘하의 제장들을 소집했다.
투항해온 원소군 세력.
또한 유비군까지 업성으로 불러들였다.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기 위한 총력전이 펼쳐지게 된다. 그렇기에 조조는 하북을 정벌했을 때보다도 많은 병력들을 동원하려 했다.
“여포와 장료를 제외한단 말인가? 원양까지도?”
“…그렇습니다.”
여포와 장료 대신에 유비군 세 자매를 편성했다.
하후돈을 편제에서 제외했다.
그리고 항장 출신인 장합과 고람을 내세웠다.
수많은 전공을 달성했던 맹장들을 제외하고서 새로운 편제를 조직했다. 남방 정벌에 동맹군과 항장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이성휘의 행동에 조조는 의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유표군은 형주를 제패한 세력이네. 원소군 정도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전력을 다지고 있을 걸세. 혹시라도 성휘에게 변고가 생길까 우려스러울 따름이야.”
혹시 이성휘가 자만하는 것은 아닐까,
조조의 목소리에 우려가 가득했다.
“괜찮습니다. 반드시 성공하겠습니다.”
원소군 세력을 한꺼번에 흡수하면서 하북의 수많은 장수들이 휘하로 배치되었다. 또한 출신과 성분이 다른 병사들이 몰리면서 규모가 방대하게 늘어났다.
여러 소리들이 울렸다.
군부 내부에서 충돌과 혼란이 거듭되었다.
불협화음을 우려한 이성휘는 항장 출신의 장수들을 전면에 배치하여 단결을 이뤄내려 했다. 우선 항장들을 향한 불신부터 종식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제1순위 이유는 그게 아니었지만.
“성휘를 믿네. 언제 어디서나…. 만인지상의 옥좌를 내게 안겨준 사랑스러운 반려가 아닌가.”
흑발을 늘어뜨린 여인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이성휘의 품에 안겼다.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품에 얼굴을 파묻으면서 따스한 온기에 기댔다.
탄탄한 가슴.
은은하게 들리는 심장박동.
불안했던 마음을 진정시키는 사내의 체취.
-진심으로 이 사내를 사랑한다. 좌충우돌처럼 어지러운 바람기 때문에 번번이 고생하지만 말이다.
“또 아이를 가질 것 같네.”
어젯밤에 격렬히 사랑을 나눴으니 틀림없이 사랑스러운 아이를 가지게 될 터였다. 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과 딸을 낳은 어머니로서의 직감이다.
아들일까,
아니면 딸일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저 성휘를 닮은 아이가 태어나길 바랄 뿐이었다.
“미리 이름을 지어둘까요?”
이성휘가 물었다.
그에 조조가 고개를 내저었다.
“다녀와서… 다녀와서 지어주게. 후후, 분명 성휘라면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올 테니.”
“이번은 꽤 오래 걸릴 것 같습니다만.”
산세들이 험준한 익주와 장강으로 둘러싸인 형주를 도모하는 정벌이다. 당연히 장기전으로 이어질 터.
10개월 안에 돌아오라.
과연 위왕에게 어울리는 귀여운 억지였다.
“아만.”
“응. 왜 그런가, 성휘?”
이성휘의 부름에 조조가 고개를 들었다.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이윽고 말하려던 고백을 삼켰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실없기는.”
익주와 형주를 정벌해야 한다.
나아가 양주와 교주까지도 정벌할 것이다.
이성휘는 애틋함이 묻어나는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스스로에게 맹세했다. 질투의 유황불이 활활 타오르는 붉은 눈동자를 마주하고 싶진 않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