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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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과 얼음이 녹기 시작한 봄,
마침내 난세의 간웅이 즉위식을 맞이했다.
흉계와 수많은 함정들,
수많은 천신만고가 목숨을 위협했음에도 결국 조조는 백마지맹(白馬之盟)을 깨부쉈다.
마침내 왕위를 거머쥐었다.
즉위식에 참석한 참모와 장수들은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을 바라보면서 고양감을 느꼈다. 두 눈을 부릅뜨면서 만천하의 영예가 허락된 즉위식을 응시했다.
“한나라 황실을 향한 승상 조조의 충의지심은 만천하의 군웅들을 고무시켰다. 또한 승상 조조의 용맹은 산천초목마저 떨게 하며 난세를 평정했다. 이에 짐은 승상을 위왕(魏王)에 책봉하여 불변의 충성에 보답하고자 한다.”
단아한 소녀가 즉위식의 중심에 섰다.
허리까지 늘어뜨린 금발.
갓 내린 눈송이처럼 새하얀 얼굴과 경칩에 피어난 꽃송이처럼 풋풋한 용모.
황제의 의례복을 걸친 유협은 옥구슬처럼 아름다운 목소리로 교서를 읽었다. 천하를 대표하여 즉위를 허락한다는 내용이었다.
“감읍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이런 철면피가….
유협이 눈앞의 여인을 노려보면서 중얼거렸다.
한나라 황실을 향한 충성.
그것이 바로 조조군이 내세웠던 즉위의 대의명분이었다.
백마지맹의 위반을 공식적으로 천명하는 자리를 충성의 서약처럼 포장했다. 만약 저택에 연금된 조정대신들이 보았다면 피눈물을 흘렸을 테지.
“삼가 받들겠습니다.”
조조는 왕위를 연이어 세 번 사양하는 정치적인 면모를 보인 이후에 유협의 교서를 받들었다.
이미 만천하에 찬탈의 역심을 알렸음에도 철면피처럼 태연함을 고수했다. 과연 난세의 간웅이라 불리는 여인답게 끝까지 치밀한 면모였다.
“황실과 조정을 대표하여 즉위를 윤허하겠다.”
유협이 선언했다.
속으로,
‘죽어버려, 빨래판.’이라고 중얼거렸지만.
“하해와도 같은 은혜를 충정으로 보답하겠습니다.”
조조가 대답했다.
은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황실과 조정에 충정을 바칠 생각 또한 없었다.
한나라의 마지막 황제와 난세의 간웅은 표리부동한 모습을 보이면서 즉위를 선언했다. 오직 거짓으로 점철된 즉위식이었음에도 말이다.
“위왕, 위나라의 건국을 윤허하겠다.”
오로지 왕에게 허락된 특례.
화려하게 장식된 면류관(冕旒冠).
왕의 날카로운 위엄을 보여주는 곤복(袞服).
권위를 상징하는 보검.
무(武)를 대표하는 궁시(弓矢)와 부월(斧鉞).
만인지상의 권력을 거머쥔 승상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군왕으로 즉위했다. 면류관을 쓰고 곤복을 걸치면서 새로운 왕이 탄생했음을 만천하에 알렸다.
패국조씨 가문의 왕.
유씨가 아닌 조씨가 왕위에 올랐다.
백마지맹은 진흙탕에 내던져졌다.
죽기 직전의 한고조(漢高祖)가 충신들에게 남긴 마지막 유지는 그렇게 완전히 뒤안길로 퇴장했다.
“위왕 전하, 천천세!”
근위병들을 지휘하던 이성휘가 소리쳤다.
두 팔을 높게 뻗었다.
그리고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천천세!”
“위나라 천세! 위왕 전하 천세!!”
즉위식에 참석한 제장들이 우렁찬 고함을 토해내면서 위나라의 시작을 알렸다.
면류관과 곤복을 차려입은 조조의 아름다운 모습에 눈물을 흘리는 자들도 많았다. 주군께서 마침내 나라를 건국한 패자에 등극하였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까.
“경하드립니다, 전하.”
“고맙네!”
전하(殿下).
왕의 존칭으로 불렀다.
이성휘의 축하에 조조는 활짝 웃으면서 대답했다.
낯간지럽다.
하지만 들뜬 기분을 멈출 수 없었다.
“그대들에게 위나라의 건국을 선포한다! 앞으로 과인(寡人)은 천하통일의 대업을 완수할 것이다! 위나라의 충졸들이여, 과인과 함께 전장에 출전하여 절인지용(絶人之勇)을 떨치도록 하라!!”
조조가 보검을 치켜들면서 소리쳤다.
그러자 쩌렁쩌렁한 고함소리가 즉위식을 가득 메우면서 명령에 화답했다.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위나라를 위해 헌신하겠나이다.
수많은 전장을 종군했던 역전의 용사들은 고양감에 벅찬 반응을 보이면서 충성을 맹세했다. 오로지 위나라를 위해 싸우겠노라며 혈기를 불태웠다.
“천세! 천세!!”
“위나라 천천세!!”
한(漢)이 끝나고 위(魏)의 천하가 시작되리라.
더 이상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이미 4백 년 왕조는 빈껍데기나 다름없었다.
통일국가의 명예와 위상은 패국조씨 가문의 왕조에게 철저히 빼앗기게 되겠지. 처절하게 멸망했던 수많은 망국(亡國)들이 그러하였듯이.
“설령 만인지상의 왕이 되었어도… 나는 여전히 성휘의 사랑스러운 아내일세.”
“과분할 따름입니다.”
조조가 손을 내밀면서 귀엽게 속삭였다.
너무도 아름다운 여인이다.
이성휘는 쑥스러워하면서도 손길을 받들었다.
섬섬옥수처럼 고운 손아귀를 붙잡은 이성휘는 사랑하는 아내의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맹세했다. 그녀와 위나라를 위해 무엇이든 하겠노라고.
* * *
위나라가 선포되었다.
대경실색할 소식이 형주(荊州)에 날아들었다.
조조가 위왕(魏王)에 즉위했다.
한나라 황실과 조정의 권위가 완전히 유명무실해지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중원에 파견한 세작들로부터 충격적인 소식을 들은 형주자사(荊州刺史) 유표는 사약을 삼킨 것처럼 부아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역적 년! 고작해야 환관 집안의 계집 따위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결코 벌어져선 안 될 참극이었다.
환관 년이 즉위하다니.
어떻게 이런 파렴치한 일이 벌어졌단 말인가.
황실과 조정을 우롱했던 역적이 기어코 백마지맹마저 무너트렸다. 천군만마를 동원하여 모든 명예를 거머쥔 조조의 출세가도에 오장육부가 뒤집어졌다.
‘머저리 같은 놈들…! 역적이 왕위를 차지하는 동안에 충의지사를 자칭하던 놈들은 뭘 했단 말이냐!!’
역천을 범하려는 조조군의 발호를 저지하고자 중원 전역에서 반란이 벌어졌다.
그러나 모두 진압되었다.
빈약한 사병집단을 내세웠던 사대부와 호족들은 숙련된 정예병을 보유한 조조군에 철저히 무너졌다.
한나라 부흥군의 거병에 호응하고자 정벌군을 편성했던 유표는 허망함을 금치 못했다. 정벌군이 출전하기도 전에 한나라 부흥군이 궤멸되고 말았다.
“빌어먹을! 유언, 이 쓸모없는 늙은이 같으니…! 어째서 하필이면 지금 죽었단 말이냐!!”
백마지맹이 무너졌다.
유씨가 아닌 인물이 왕위를 거머쥐었다.
조조는 역적이다.
역천을 범하려는 대역죄인이다.
훌륭한 대의명분이 눈앞에 주어졌음에도 유표는 무력감을 곱씹어야 했다. 단독으로 중원의 역적을 상대하기엔 전력이 한참이나 모자랐기 때문이다.
“유씨가 아닌 인물이 왕위를 찬탈하면 천하의 유씨들이 나서서 역적을 응징해야 하거늘…! 그런데 어찌하여 천하의 유씨가 나 밖에 남지 않았단 말이냐.”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면서 왕위를 찬탈했던 여후(呂后)의 가문이 결국 진압될 수 있었던 것은 왕과 제후였던 한나라 종친들의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한나라 황실의 종친들은 무력한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환관 계집이 왕위를 찬탈했음에도 한나라의 종친들은 외면하면서 침묵했다. 함께 연합하여 역적들을 물리쳤던 드높은 기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매형, 그렇다면 유비군을 끌어들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이제 만천하에 유비군 밖에 없습니다.”
도독(都督) 채모가 조심스레 진언했다.
의성정후(宜城亭侯) 유비.
수춘성을 중심으로 영향력을 확대한 유비군은 강성한 군세들을 거느린 세력이었다.
한나라 황실의 종친이며 황실과 조정으로부터 제후에 임명된 여걸이 아닌가. 왕위를 거머쥔 대역무도한 역적을 무찌르기 위해선 유비군의 도움이 절실했다.
“유비는 역적 계집의 하수인이 아니더냐! 한나라의 종친임을 망각하고 역적에게 가세한 년이다, 결코 그 년에게 도움을 구걸하는 일 따위는 없을 거다!!”
채모의 진언대로 유비는 한나라의 종친이면서 황실과 조정으로부터 제후에 임명된 군벌이다.
하지만 유비군은 조조군에게 계속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과오가 존재했다. 유표는 조조군의 산하에 위치한 유비군을 진심으로 경멸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비군 말고는… 기댈 곳이 없습니다.”
“…….”
익주목(益州牧) 유언이 죽었다.
파촉을 제패했던 거두가 허망하게 사망하면서 유표군은 더욱 궁지에 내몰렸다.
조조를 막을 대적자가 없었다.
개죽음만 당해버린 한나라 부흥군의 비참한 최후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대로 방관한다면 아군도 한나라 부흥군처럼 조조군에게 짓밟힐 터. 위나라의 탄생으로 백척간두의 위기에 직면한 유표는 두려움을 호소해야 했다.
* * *
하북 정벌에서 종횡무진의 활약을 거듭했던 유비군은 현재 청주(青州)에 주둔하고 있었다.
안량과 문추를 참수했다.
또한 오소(烏巢)에서 원소군의 주력군단을 모두 격파하는 활약을 거둬냈다.
조조는 속내를 헤아리기 어려운 유비를 경계하면서도 제국(濟國)을 맡겼다. 머지않아 유비가 의성정후에서 제후(濟后)에 책봉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언니, 밀지가 또 도착했습니다.”
흑발을 늘어뜨린 여인이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다가와 소식을 전달했다.
조조가 역천을 드러낸 이후,
황실과 조정을 추종하는 충의지사들은 계속 유비에게 동참을 호소하는 밀지를 보내왔다.
백마지맹을 깨트린 역적을 처단하라.
지금이야말로 한나라의 종친들이 왕위를 찬탈한 역적을 도모할 때가 아니겠는가.
악전고투를 치르면서 성장한 역전의 정예들을 거느린 유비군은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세력이었다. 그렇기에 충의지사들은 어떻게든 유비를 포섭하려고 시도했다.
“인기가 많은 것도 피곤하네, 그렇지 운장? 돗자리를 짜고 신발이나 팔던 촌년이 대단하신 분들에게 기대를 받게 됐어.”
“…….”
농담을 하듯 장난스러운 목소리였다.
하지만 결코 웃을 수 없었다.
관우는 긴장된 낯빛으로 맏언니를 바라보았다.
“으음….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새하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미녀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리면서 창가에 기댔다.
본의 아니게 한나라의 부흥을 꾀하는 세력들로부터 유망주 취급을 받게 되었다. 중원을 제패했던 수만의 군세들을 거느린 유비에게 귀추가 주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