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3화>
==========================
살짝 열린 창문 틈으로 찬바람이 들어왔다.
파라락-.
책상 위의 서책이 펄럭였다.
아찔하게 흔들리는 등불.
주황빛으로 아름답게 물든 숫처녀의 얼굴.
상아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인은 부끄러움이 가득한 표정을 지으면서 이성휘를 응시했다. 애써 부끄러움을 참아내고 있음을 보여주듯 입술을 달싹였다.
“일단 저를… 안아주세요. 연인처럼 상냥하게.”
가느다란 팔을 뻗었다.
진녹색 눈동자를 반짝이면서 애달픔에 가득한 부탁을 건넸다.
숨소리가 짙어졌다.
불그스름한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본인도 자신이 얼토당토않은 억지를 부리고 있음을 알기에 더욱 부끄러운 것이겠지. 순욱은 침묵을 머금은 이성휘를 응시하면서 대답을 기다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의아하다.
당혹감이 엄습했다.
상서령이 왜….
갑자기 이런 부탁을 한단 말인가.
이성휘는 애처롭게 젖어든 순욱의 눈동자에 당황을 금치 못했다. 그녀의 눈빛은 틀림없이 사랑에 빠져버린 여인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예요. 대장군에게… 안기고 싶어요. 지금만큼은 잠시 잊고 싶으니까요.”
방대한 견문과 학식들을 서술한 학자였기에 온몸을 짓누르는 중압감에 시달려야 했다.
가벼이 결정할 수 없다.
수많은 사람들의 미래가 달린 문제였으니까.
충성과 충절의 대상이었던 한나라가 결국 멸망하게 되리라는 현실은 너무도 가혹했다. 선택의 기로에 접어든 순욱은 피폐해진 마음을 추스르고자 이성휘에게 몸을 맡겼다.
“한나라는 결국… 이렇게 끝나는 거군요.”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몸을 숙이면서 다가섰다.
뒤이어 순욱은 이성휘의 품에 안겨들었다.
소나기에 휩쓸린 강아지처럼 애처로운 눈길로 바라보는 그녀를 가만히 둘 수 없었다. 이성휘는 품에 안겨든 순욱을 안아들면서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괴로운 선택을 강요하게 하여,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네.”
알고 있다.
지금 얼마나 괴로운 심정일지….
그렇기에 이성휘는 사과를 전하면서 따스하게 안아주었다. 잔인한 양자택일의 기로에 놓인 그녀에게 위안이 될 수 있도록.
“따뜻, 하네요….”
마음을 애태우면서 남몰래 연모해온 사내에게 안긴 순욱은 혼란 속에서 평안을 느낄 수 있었다.
따스하다.
마음 깊이 든든했다.
몸을 기대면서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 순간이 끝나지 않기를.
결코 불가능한 망상임을 알면서도 염원했다.
‘지금 순간만큼은 다 잊고 싶으니까요. 한나라의 부흥도, 새로운 왕조의 개막도…. 중압감을 모두 내려놓고, 사랑에 빠진 평범한 여자가 되고 싶을 뿐이에요.’
잠시 생각했다.
만약 자신이,
그저 평범한 사대부의 여식이었다면….
연모하는 사내에게 구애를 받는 것만을 우선적으로 생각할 뿐인 평범한 여자였다면 어땠을까?
발랄한 미소로 사내를 맞이하면서 사랑을 속삭이는 행복한 나날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오직 사랑에만 전념할 뿐인 인생일 테니.
‘하지만 천지신명에게 맹세했어요. 난세에 시름하는 모든 백성들을 구원하겠노라고…. 그렇기에 왕좌지재의 숙명을 기꺼이 받아들였죠.’
스스로 가시밭길을 선택했다.
백성들을 구하겠다.
구원의 자애를 가슴에 품고서 난세에 뛰어들었다.
설령 시산혈해를 불러일으킨 난세에 그대로 휩쓸리게 되더라도. 난세를 평정하여 백성들을 다시 태평성대로 이끌 수만 있다면.
“억지 부려서 미안해요.”
“괜찮습니다.”
떨리는 목소리에 울음기가 가득했다.
어깨가 축축해졌다.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 때문이리라.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젠가 왕좌지재의 재상이 비극을 마주하게 것임을 알고 있었으면서 미리 대처하지 않았다. 그녀가 통곡의 비극을 마주한 뒤에야 위선자처럼 행동했다.
내 잘못이다.
내가 어떻게든 인과에 개입했더라면….
이성휘는 눈물을 흘리면서 오열하는 순욱을 안으면서 스스로에게 모멸감을 품었다.
“…대장군.”
“예.”
눈물로 얼굴을 물들인 여인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저는, 대장군을… 연모하고 있습니다. 오래 전부터 쭉 대장군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주군의 반려에게 흑심을 품어선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연모하는 마음을 키워왔습니다.”
“…….”
“지금 이 순간에 고백이라니, 많이 이상하죠? 분명 많이 이상할 거예요. 한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양자택일의 상황에 갑자기 청승맞은 고백을 하다니…. 얼굴도 못난이처럼 눈물로 범벅이잖아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고백했다.
못생긴 얼굴이겠지.
분명 터무니없는 모습일 터였다.
최대한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정성스럽게 화장을 하고 아름다운 예복으로 갈아입으면서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못생기고 추레한 얼굴을 한 채로 마음을 고백하는 통탄할 실수를 범했다.
“상서령은 여전히 아름다우십니다. 누가 감히 상서령을 못난이라 생각하겠습니다.”
눈물에 젖어버린 진녹색 눈동자를 응시하면서 진심어린 대답을 전했다.
사랑스러웠다.
지금의 그녀는 누구보다 아름다웠다.
무심코 마음이 동요했을 정도로….
평소와 다른 빈틈투성이의 모습은 마음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이성휘는 혹시라도 순결한 여인에게 욕망을 표출할까 조심하는 모습을 보였다.
“으읏…!”
하지만 힘겹게 마음을 억누르던 이성휘와는 정반대로… 순욱은 애달프게 요동치는 욕망을 선택했다.
사랑스러운 망설임을 삼켰다.
이윽고 이성휘에게 마음을 담아 입술을 부딪쳤다.
쪼옥-.
귀여운 종달새처럼 입술을 훔쳤다.
부끄러움이 많은 순욱에게 어울리는 입맞춤이었다.
“미안해요, 갑자기 말도 없이 행동해서…. 대장군의 대답에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어요.”
자신의 돌발적인 행동에 스스로도 놀랐는지 입맞춤을 했던 도톰한 입술을 우물거렸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놀란 토끼처럼 귀여운 모습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연모해온 대장군과의 첫 입맞춤….
보석처럼 아름다운 진녹색 눈동자에 환열과 당혹감이 교차했다. 복잡하고 미묘한 마음속의 감정을 대변하듯이 눈동자가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손을 뻗어 가느다란 허리를 껴안았다.
곧이어,
이번에는 이성휘가 도톰한 입술을 빼앗았다.
진녹색 눈동자에 뜨거운 격정이 범람했다.
“으읏…! 후웃, 하아…!”
뜨겁게 탐닉하던 입술 사이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츄릅, 츄웁….
타액을 훑으면서 입술을 탐했다.
기습적인 입맞춤에 순욱은 당혹감을 느끼면서도 결코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양손을 뻗으면서 이성휘에게 매달렸다.
좀 더,
좀 더 해줘요.
나를 더 격렬하게 품어주세요.
순욱은 온몸을 짓누르던 왕좌지재의 운명을 내려놓고서 애욕에 빠져들었다. 사랑에 빠진 여인으로서 눈앞의 사내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숨이 막히진 않으십니까.”
“네엡….”
이성휘가 강렬한 시선을 보내면서 지시했다.
그에 순욱은 타액으로 축축해진 입술을 우물대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으으으….”
앓는 소리를 냈다.
부끄럽다.
자꾸 고개가 숙여질 정도로.
남몰래 연모해온 사내와의 입맞춤은 달콤한 황홀경을 자아내면서 동시에 부끄러움을 만들어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 다시 내 쪽에서 입맞춤을 해야겠지?
새하얀 도화지처럼 청초하고 순결한 아가씨는 순수하면서 응큼한 고민에 빠졌다. 방금까지 탐닉한 사내의 입술을 또 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는 속담을 바로 이 순간에 증명해냈다.
“죄송합니다.”
“아뇨…. 괘, 괜찮아요.”
죄송하면 또 찐하게 해주세요.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응큼한 속내를 드러냈다.
하지만 순욱은 점점 적극적으로 변모하는 속마음을 추스르면서 애써 욕구를 억눌렀다.
아, 안 돼….
이제 더 이상은 안 돼.
상대는 주군의 남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빠졌더라도 더 이상을 바랄 순 없었다. 충성과 충절에 위배되는 배신일 테니까.
“그읏….”
아쉬움을 토로하듯 입술을 달싹였다.
알고 있다.
알고 있는데….
이대로 일선을 넘어버리고 싶다는 욕망에 휩싸이고 말았다.
좀 더 안기고 싶다.
좀 더 입맞춤을 하고 싶다.
좀 더 그와 연인처럼 함께하고 싶다.
발칙한 망상들이 발호하며 이성을 위협했다.
달콤한 애욕에 선사하는 쾌락을 접해버리면서 견고했던 이성이 무너졌다. 농밀한 분위기가 계속 이어질수록 절제와 인내를 호소하는 이성이 힘을 잃어갔다.
그 순간,
“여기 계셨네요! 한참 찾았잖아요!”
발랄한 목소리의 여인이 급습했다.
흐아앗-!!
순욱이 화들짝 놀라 물러섰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상아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미녀는 붉어진 얼굴을 진정시키면서 호흡을 내쉬었다.
“무, 무슨 일인가요? 잠시 대장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는데….”
눈 가리고 아웅하듯 급하게 변명을 지어냈다.
사실 밀회를 나누고 있었답니다.
그것을 스스로가 인정하는 꼴이었다.
순유는 고모님의 횡설수설에 빙그레 웃으면서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홍당무처럼 붉게 달아오른 고모님의 얼굴을 관찰하면서 수확의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그럼 저도 잠시 담소에 끼어도 될까요? 저만 빼놓다니 정말 치사해요.”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면서 물었다.
그 뒤,
들고 온 향로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대체 무슨 향로지? 처음 보는 물건이다. 공달이 저런 물건을 들고 왔었던가.
꺼림칙하게 느껴질 정도로 기묘하게 조형된 향로를 응시하던 이성휘가 고개를 갸웃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