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2화>
==========================
찬바람이 거세지자 이성휘는 순욱을 따라 작업실처럼 정갈하게 꾸며진 문고(文庫)에 들어왔다.
수많은 붓과 종이들.
그윽하게 풍기는 나무 냄새.
마치 화백들이 작업하는 화실처럼 보였다.
깔끔하게 정돈된 물건들을 바라보던 이성휘는 순욱에게 참으로 어울리는 공간이라 생각했다. 그녀의 꼼꼼한 성격을 그대로 반영한 것처럼 책과 종이들이 가지런히 보관되어 있었다.
“책들이 많군요. 옮기느라 힘드셨을 텐데.”
“모두 필요한 문서들이니까요.”
사대부 출신의 학자들이 애지중지하는 도서관이 바로 이러한 느낌일까.
수백 권이 넘는다.
아니,
수천 권은 족히 될 듯했다.
지진이 발생하면 수많은 서책들이 빼곡하게 보관된 책장에 깔리진 않을까 우려스러울 정도였다.
평생 동안 책을 읽어도 모두 못 읽지 않을까.
이성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죄송해요, 많이 번잡하죠? 곧 치울 테니까…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상아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인이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주변을 정리했다.
벼루에 놓인 붓.
책장에서 반쯤 튀어나온 서적들.
벽보처럼 여기저기에 붙여둔 지도와 그림들.
퇴청하고 돌아온 이후에도 업무를 이어나갔던 흔적들이 가득했다. 과연 일벌레들의 대표답다. 지독한 근면함에 감탄의 박수를 보내고 싶을 정도였다.
“여기 앉으세요. 그럼 저는 차를 내올게요.”
“예.”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순욱은 급히 발걸음을 움직였다.
달그락-. 달그락-.
찬장에 두었던 다구(茶具)들을 꺼냈다.
작업실에 손님을 맞이한 순욱은 능수능란한 솜씨로 차를 우리기 시작했다. 다도를 즐기는 사대부답게 찻잎을 우려내는 솜씨가 매우 뛰어났다.
“설마 대장군을 모시게 될 줄은 몰랐네요.”
찻주전자를 따르던 순욱이 쑥스러움 가득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이윽고 새색시처럼 조신하게 찻잔을 이성휘의 앞에 내려놓았다. 구수한 냄새의 말차였다. 과연 사치를 기피하는 순욱에게 어울렸다.
“그럼 이제… 대답을 드려도 될까요?”
“예.”
앞으로도 계속 왕좌지재의 재상으로 남아달라는 간절한 부탁.
이성휘의 부탁을 떠올린 순욱은 씁쓸함이 묻어나는 표정을 지었다. 곧바로 대답하기 난감했는지 잠시 호흡을 갈무리하고서 입을 열었다.
“분명 하북까지 제패한 승상께서는 드센 야망을 실현하고자 만인지상의 정점을 도모하시겠죠. 우리들의 주군께서는 결코 승상으로 만족할 분이 아니니까요.”
탐욕의 화신.
패도를 실현하려는 간웅.
천자를 보필하면서 천하를 다스리는 무소불위의 반열에 올랐음에도 결코 만족하지 않을 터.
공(公)이 되려는 것일까.
아니면 왕(王)이 되려는 것일까.
그도 아니라면….
새로운 왕조의 시조(始祖)가 되려는 것일까.
거대한 소용돌이가 한나라 황실을 먹어치우려 하고 있음을 느낀 순욱은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대장군.”
“예.”
“한나라의 신하로 남을 순 없을까요? 더 이상은 저도 바라지 않을게요. 제발 황실의 존속만큼은 허락해주세요.”
“…불가능합니다.”
순욱의 간절한 호소에도 이성휘는 무거운 목소리로 불가를 내비쳤다.
한나라는 수명을 다했다.
더 이상의 연명은 허락되지 않는다.
황건적들이 발호했을 때부터 이미 한나라는 숨통이 끊어진 것과 다름없었다. 지금 잔존하는 황실은 문드러진 산송장일 뿐이다.
“가렴주구와 부정부패로 난세를 불러들인 한나라는 멸망해야 마땅한 괴물입니다. 그저 희생과 고통만 감내해야 했던 백성들을 위해서라도… 저는 잔인무도한 괴물의 숨통을 끊어낼 겁니다.”
미련 따위는 없다.
애초부터 희망조차 품지 않았으니까.
천하는 새로운 주인을 원한다.
한나라 황실은 4백 년의 사직을 내려놓고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리라.
확고함이 느껴지는 이성휘의 대답에 순욱은 안타까운 쓴웃음을 지었다. 당장이라도 눈물을 뚝뚝 떨어트릴 것처럼 아름다운 얼굴에 애처로움이 가득했다.
“역시… 그러시군요.”
“죄송합니다.”
고개 숙여 사과했다.
하지만 의지는 여전히 확고했다.
한나라의 역사를 끝낸다.
새로운 왕조의 서막을 열어젖힌다.
패국조씨 가문의 천하를 이룩하고자 지금까지 수많은 역경들을 감당하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결코 맹세를 저버릴 수 없었다.
“예상은 하고 있었어요…. 대장군은 오로지 주군과 백성들을 위해 싸웠으니까요.”
한나라 황실과 조정에 우호적인 모습들을 보였지만 충성의 대상은 언제나 패국조씨 가문이었다.
그렇기에 순욱은 전장에서 활약을 거듭하는 이성휘에게 존경과 경의를 보내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불안감을 떠안아야 했다.
알고 있었으니까.
결국 이성휘가 돌아서게 될 것을.
막연하게 품었던 불안감이 머지않아 현실로 드러나게 되겠지. 순욱은 이성휘를 응시하면서 애달픈 한숨을 흘렸다.
“상서령, 도탄에 시름해온 백성들을 새로운 태평성대로 이끌기 위해선 상서령이 필요합니다. 새로운 왕조의 승상이 되어주십시오.”
왕좌지재의 재녀는 분명 승상에 어울리는 그릇이었다. 이미 수많은 공헌들로 그를 입증하지 않았던가.
당신이 필요합니다.
부디 앞으로도 도와주십시오.
조조가 원소에게 도움을 호소했듯이 이성휘는 순욱에게 도움을 간청했다. 마지막까지 그녀를 결코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황제 폐하께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대답을 미루었다.
그 대신-.
순욱은 가녀린 황제와의 담화를 풀어냈다.
“그리고 신신당부를 하듯 말씀하셨죠.”
황실을 위해 희생하지 말라.
조정을 위해 파멸을 받아들여선 안 된다.
오직 백성들만을 생각하라.
황실의 무능과 조정의 부패가 불러들인 아비규환의 지옥에 희생당한 백성들을 구제하는 것만을 우선적으로 여겨야 한다.
“영민하신 폐하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던 거예요.”
백성들의 마음은 이미 한나라를 떠났다.
끔찍한 난세를 겪었다.
모든 책임들은 당연히 황실과 조정에 있을 터였다.
폭정과 부정부패를 일삼았던 선황들의 원죄를 청산하고자 유협은 멸망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분명 백성들도 그것을 원할 테니까.
“민심을 잃은 나라는… 결국 무너지는 법이니까.”
끊임없이 지속된 아비규환의 굴레는 백성들에게 깊은 절망과 증오를 안겨주었다.
그렇기에 의지할 대상을 잃어버린 백성들은 난세의 영웅으로 등장한 조조에게 집결했다. 이미 민심은 한나라를 저버린 뒤였다.
“하지만 여전히 모르겠어요. 지금까지 한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했는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죠?”
상아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미녀는 울음기가 가득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모르겠어요.
이제 저는 어디에 서야 될까요.
까마득한 첩첩산중에 그대로 내던져진 것처럼 막막하기만 했다. 오로지 한나라를 위해 분골쇄신하며 노력해온 여인은 천애(天涯)의 외톨이가 되고 말았다.
“황실과 조정을 부흥시키겠다는 일념으로 지금까지 걸어왔는데… 선황과 폐하께서는 겸허히 모든 책임들을 짊어지고서 물러나기를 원하세요. 물론 후일을 고려한 숭고한 의지라는 것은 알지만,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겠어요.”
방향을 잃었다.
그로 인해 길을 헤매게 되었다.
동요와 불안.
공허와 상실로 인한 공포.
진녹색의 눈동자가 두려움을 토해냈다.
황실과 조정의 부흥만이 절대적인 대의명분이라 여겼기에 무거운 상실감이 밀려들었다. 순욱은 길을 잃은 아이처럼 이성휘에게 두려움을 내비쳤다.
“제발, 제발 가르쳐주세요…!”
순욱이 어깨를 떨면서 손을 뻗었다.
꾸욱-.
이성휘의 손을 꼭 붙들었다.
애처로울 정도로 부여잡은 손길이 떨리고 있었다.
“답은 제가 찾는 게 아닙니다. 상서령께서 직접 찾으셔야 합니다.”
장대비에 홀딱 젖은 강아지처럼 동요하고 있었음에도 이성휘는 준엄한 모습을 일관했다.
타인이 제시하는 해답을 받아들이면 무력한 꼭두각시가 될 뿐이다. 이성휘는 존경하는 상서령이 무력한 꼭두각시가 되는 것을 결코 원치 않았다.
그녀를 얻고 싶다.
하지만 비겁한 방법으로 구슬릴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홀로 남겨질 텐데….”
“제가 있습니다. 지금처럼 옆에 있을 겁니다.”
결국 새로운 왕조에 동참하기를 포기하더라도 이성휘는 순욱을 포기할 생각이 결코 없었다.
막역한 동지이며 벗이다.
마지막까지 그녀를 위해 남으리라.
해답을 찾는 것은 본인의 역할이다. 그렇기에 이성휘는 그녀가 해답을 찾을 수 있도록 옆을 지키겠노라고 결심했다.
“무엇을 하고 싶으십니까.”
“저는….”
“아직 시간은 많습니다. 누구도 상서령에게 결정을 강요하지 못할 겁니다.”
“…….”
고개를 숙이면서 대답을 주저했다.
이성휘의 손을 붙든 채,
조용한 침묵이 계속 되풀이되었다.
고민하고 동요하면서 결정을 숙려하던 순욱은 이윽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바르르 떨리는 눈빛으로 이성휘를 응시했다.
“일단 저를… 안아주세요. 연인처럼 상냥하게.”
가까이 다가섰다.
뒤이어 이성휘에게 양손을 뻗었다.
계속 고민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답을 내리지 못했다.
일생일대의 기로에 봉착한 순욱은 고민을 제쳐두고서 본능에 몸을 맡겼다.
끝까지 나와 함께 해주겠다면….
그 호언의 진위를 직접 확인하고 싶었으니까.
========================
비서랑(秘書郞) 순유.
주군을 고모부로 만들 생각이 가득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