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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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순씨 가문으로부터 기별을 받은 이성휘는 복잡해진 심정으로 초대에 응했다.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
과연 그녀를 설득하는 게 가능한 일일까.
한나라 황실을 지키려는 순욱.
4백 년의 사직을 끝내버리고 새로운 왕조를 열려는 조조.
머지않아 대립하게 될 터.
이성휘는 언젠가 파국으로 치달을 것임을 알면서도 미리 대비하지 않은 스스로를 원망했다. 순욱이 조조군에 임관했을 때부터 예견된 비극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오, 오셨어요… 대장군?”
마음속에 떠안은 근심에 대해 알고 있을까,
이성휘가 도착하자 순욱은 얼굴을 붉히면서 공손하게 맞이했다.
영천순씨 가문을 방문한 손님.
가문의 귀빈이자 은인에게 쑥스러움에 물든 미소를 지었다.
마치 퇴청하고 돌아온 서방님을 맞이하는 아내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백옥처럼 새하얀 뺨에 붉은 홍조가 풋풋하게 서렸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순욱이 예를 취하자 이성휘 또한 공손하게 예를 갖추면서 화답했다.
“내실에 미리 주안상을 마련해두었어요.”
“…그렇습니까?”
정중하게 손님을 맞이하는 순욱의 모습에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마음속의 근심이 더욱 짙어졌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과묵하던 입이 더욱 과묵해진 듯했다.
고민을 거듭하면서 뇌리를 정리하던 이성휘는 순욱을 따라 내실로 이동했다. 주안상을 마련했다고 하니 순욱과 술을 마시면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해보려 했다.
“잠시 내실에서 기다려주세요.”
“예.”
내실까지 안내했던 순욱이 이성휘에게 미리 양해를 구하고서 자리를 비웠다.
드륵-.
이성휘는 문을 열고 내실로 들어섰다.
심사숙고하며 상념을 이어가던 이성휘가 무거운 발걸음을 내딛었다. 내실에 들어서자 발랄한 인상의 미녀가 폭 매달리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 오세요, 주군! 예상대로 약속한 정시에 딱 맞춰서 오셨네요.”
“…공달.”
“네, 주군의 공달이에요!”
“…….”
해맑게 웃으면서 인사하는 순유의 모습에 잠시나마 근심을 잊을 수 있었다.
이성휘는 장난기로 가득한 밤색 눈동자를 응시하면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영천순씨 가문이었지…. 까먹고 있었군.”
“그,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그렇게 매도하면 상처 받거든요!”
그래,
영천순씨 가문의 여식이 또 한 명 있었지.
사대부의 여식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천박한 모습들만 계속 보였기에 곧잘 잊어버렸다. 당혹을 금치 못하는 이성휘의 모습에 순유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지으면서 뺨에 바람을 넣었다.
“어서 앉으세요. 영천순씨 가문의 아름다운 여식들이 따르는 가주(佳酒)을 마실 기회라구요?”
아름다운 미색으로 유명한 사대부의 여식들이 좌우에서 술을 따르는 극상의 예우는 천하의 모든 사내들이 마다하지 못할 대접일 것이었다.
분명 이성휘 또한 그렇게 생각할 터.
무뚝뚝한 주군을 놀려먹을 생각으로 가득한 순유는 앙증맞은 애교를 떨면서 이성휘에게 매달렸다.
“…그냥 내가 마시겠다.”
어떻게 예주를 대표하는 대명문가의 여식에게 그런 망측한 일을 시키겠는가. 이성휘는 경직된 표정을 지으면서 애써 탕녀의 제안을 뿌리쳤다.
순욱을 위해서였다.
영천순씨 가문을 위해서이기도 했다.
“…….”
그리고 순유는….
음란소설들로 세간을 뒤흔들었던 탕녀에게 설마 정조, 정절에 대한 관념이 있을 리 없었기에 무시했다.
“대장군, 오래 기다리셨죠?”
이윽고 순욱이 내실에 들어섰다.
잠시 옷을 갈아입었는지,
상아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미녀는 청초한 매력이 드러나는 순백의 예복을 입고 있었다.
날갯짓하는 백아(白鵝)처럼 아름답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를 보는 것만 같았다.
이성휘의 시선을 느꼈는지 순욱은 얼굴을 붉히면서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혹시라도 자신의 모습이 이상하게 보일까 입술을 쿡 깨물었다.
“우리 고모님, 엄청 예쁘죠?”
순유가 이성휘와 팔짱을 끼며 물었다.
영천순씨 가문의 가련한 꽃봉오리.
같은 여성이 보기에도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미묘한 분위기를 감지한 순유는 장난스럽게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서 이성휘에게 칭찬을 재촉했다. 그에 순욱은 부끄러워하면서도 기대에 찬 눈길로 이성휘의 대답을 기다렸다.
“상서령, 무척 예쁘십니다.”
“그… 그런가요? 고마워요, 대장군.”
거창한 수식어들을 담아낸 칭찬이 아니었음에도 순욱은 어깨를 바르르 떨면서 진심으로 기뻐했다.
예쁘다.
그 한마디만으로 충분했다.
남몰래 연모해온 사내의 칭찬이었으니까.
어젯밤부터 치장에 전념하면서 오늘을 위해 준비했던 노력들이 행복한 만족을 이루어냈다. 순욱의 입가에 어린아이처럼 풋풋한 미소가 어렸다.
“그럼 이제 앉을까요? 만찬을 준비했어요.”
이후에 각자 자리에 앉았다.
주군에게 꼭 달라붙은 여성만 제외하고.
“조카님, 어서 이쪽에 앉으세요.”
“네? 하지만 저는 주군의 옆이 좋은데요.”
순욱이 차갑게 내려앉은 눈빛으로 이성휘에게 찰싹 달라붙은 조카님을 노려보았다.
여우처럼 달라붙어선 온갖 아양을 떨어대는 순유의 모습에 잠깐 눈살을 찌푸렸다.
부럽다.
그리고 질투가 났다.
마치 자랑을 하듯 대장군과 알콩달콩한 모습을….
순유는 매력적인 눈웃음을 흘리면서 이성휘에게 양손으로 술을 따라주었다. 과감하고 대담한 순유의 행동에 이성휘와 순욱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조금 떨어져.”
“에잉~ 내심은 좋으시면서.”
명망 높은 사대부 가문의 아가씨가 연회의 흥을 돋우는 기생처럼 외간남성에게 술을 따르다니.
세간에 알려지면 지탄과 비난을 피할 수 없을 터.
문란한 행동이다.
결코 해선 안 될 사특한 기행이었다.
하지만 세간을 뒤흔들었던 탕녀에게 있어 사회적인 통념은 그저 감미로운 조미료에 지나지 않았다.
순유는 근사하고 완벽한 주군을 바라보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달콤하게 젖어든 눈빛에는 장난기 넘치는 사랑만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어서 자리에 앉으세요.”
“네엡.”
순욱이 재차 경고를 보냈다.
그러자 순유는 아쉬움을 내비치면서 순욱의 옆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고모님은 술을 안 드시잖아요?”
“오늘은 대장군께서 귀빈으로 참석하셨으니까… 조금만 마실 거예요.”
강직하고 부지런한 성품의 순욱은 음주를 멀리하는 모습을 보였다. 음주는 정신을 흐려지게 만들 뿐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황실과 조정의 연회에 참석하되,
술 대신 차를 마시면서 정신이 흐려지는 것을 방지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예외라고 여긴 걸까.
순욱은 지금까지 기피해온 술을 조금씩이나마 마시기 시작했다. 쓴맛과 함께 올라오는 취기에 익숙하지 않았던 순욱은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세상에…. 고모님께서 술을 드시다니.”
대체 얼마나 대장군을 좋아하는 거람.
그렇게 싫어하던 술을 입에 대시다니.
순유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무리 안 하셔도 됩니다.”
“괘, 괜찮아요! 겨우 몇 잔만 마실 텐데요.”
이성휘가 우려하자 순욱은 취기를 애써 억누르면서 술잔을 들어올렸다.
위태로운 모습이다.
술을 못하는 사람이 꼭 저렇게 말하던데.
혹시 마시다가 쓰러지진 않을까….
우려스러운 시선으로 술잔을 비워내는 아름다운 여인을 바라보았다.
* * *
아니나 다를까,
순욱은 금세 취해버리고 말았다.
자신만만하게 호언하더니….
겨우 술 몇 잔에 정신이 혼미해지기에 이르렀다.
“괜찮으십니까?”
“예, 조금… 괜찮아진 것 같아요.”
이성휘는 찬바람에 취기를 털어내고자 순욱과 함께 아담하게 조성된 정원을 거닐었다.
다행히 순욱은 인사불성 상태까지 치닫지는 않았지만 다시 술을 마시진 못할 듯했다. 일단 술을 마시기 전에 본인의 주량부터 가늠해야 되지 않을까.
“으으, 왜 사람들은 술을 마시는 걸까요…?”
“저도 모르겠습니다.”
글쎄.
어째서일까.
꽤나 철학적인 접근성이다.
순욱의 물음에 이성휘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죄송해요. 대장군에게 감사를 전하고자 마련한 자리였는데… 저 때문에 흥이 깨졌네요.”
“괜찮습니다.”
취기에 얼굴이 달아오른 귀여운 모습을 두 눈에 담았기에 오히려 만족스러웠다.
매사에 꼼꼼하고 철두철미한 상서령이 술에 취해서 허둥대는 모습을 본 사람은 나뿐일 테니.
새로운 모습을 알게 되었다.
이성휘는 웃으면서 순욱을 바라보았다.
“언젠가 상서령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저한테요?”
술에 취한 여인이 두 눈을 끔뻑였다.
그에 이성휘가 말을 이어나갔다.
“만약 상서령이 없었다면 결코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겁니다. 상서령이 계셨기에 주군께서 원소군을 쓰러트리고 정점에 우뚝 설 수 있었습니다.”
“과, 과찬이세요…!”
진심어린 감사에 순욱은 당혹스럽다는 반응을 지으면서 손사래를 쳤다.
술 때문일까.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취기 때문일까.
가슴이 거칠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밤하늘을 배경으로 정원을 거닐던 순욱은 이성휘를 바라보면서 애달픔에 젖은 침음을 흘렸다. 마치 고백을 앞둔 상황처럼 보였기에 더욱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니 앞으로도… 왕좌지재의 재상으로서 주군을 보필해주셨으면 합니다.”
결국 한나라는 뒤안길로 사라진다.
멸망을 피할 수 없을 터.
그렇기에 이성휘는 순욱이 새로운 왕조에 동참하기를 바랐다.
촉촉하게 젖은 진녹색 눈동자를 응시하면서 지금까지 망설였던 진심을 전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함께 나아갔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부탁이었다.
“…대장군.”
이성휘의 호소를 경청하던 순욱은 이윽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