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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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까지 하지?
설마 대장군은 나를 좋아하나?
“…흐읏!”
업무 도중에 붓을 멈춘 채로 망상을 이어가던 상서령이 화들짝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주제넘은 망상이다.
아무리 답답해도 그렇지 얼토당토않은 망상을 감히 품다니…!
공부 밖에 모르는 범생이 따위를 누가 좋아할까.
상아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미녀는 급히 허둥지둥하며 새빨갛게 달아오른 뺨을 진정시켰다.
“상서령?”
“아,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고양된 표정과 시무룩한 표정을 반복하면서 망상을 이어가는 상서령의 모습에 상서대의 관료들은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상서령께서 업무 도중에 딴청을 부리다니….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맑은 냇물처럼 고아한 심중에 큰 변화가 생긴 것이 분명했다.
‘조카님에게 고민을 상담해볼까요…. 대장군을 오랫동안 보필한 참모니까 의중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테죠.’
산중의 다람쥐처럼 이성휘의 뒤를 졸래졸래 따르면서 보필해온 조카님의 모습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실컷 놀림을 받게 될 게 틀림없었다.
익살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집중적으로 놀려댈 조카님의 모습을 상상하자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대장군을 좋아하신 거네요?
-제가 뭐랬어요! 역시 고모님은 대장군을 연모해온 거였군요!
-승상의 남편을 남몰래 연모한 상서령…! 괜찮다면 고모님의 연담을 차기작으로 써도 될까요?!
지금까지 조카님에게 당했던 놀림들만 하더라도 머리가 아팠다.
대장군을 남몰래 연모했다는 사실이 조카님에게 결국 알려지게 된다면… 분명 곤혹에 처하게 되겠지.
‘차, 차라리 죽었으면 죽었지…! 조카님에게는 절대로 말할 수 없어요!’
정상적인 관계였다면 당연히 조카에게 고민을 털어놓았을 터였다.
하지만 문제는 조카님이 음란물들로 천하를 뒤흔들었던 희대의 탕녀라는 점이었다.
어째서 수많은 명사들을 배출했던 영천순씨 가문에 그런 변태가 태어났단 말인가. 순욱은 조카님에게 도움을 구하려는 생각을 단번에 철회했다.
“허도에서 별다른 연락은 없었나요?”
순욱은 머쓱해진 분위기를 잠시 환기시키고자 관료에게 물음을 보냈다.
그에 관료가 입을 열었다.
“예, 승상부에서 도착한 명령은 없었습니다. 상서령과 대장군에게 전권을 위임했으니… 내정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의중이 아니겠습니까.”
조조는 공신들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기에 오로지 허도의 본업에만 집중했다.
하북이 전후처리에 박차를 가하듯이 중원도 전후처리에 많은 골치를 썩고 있을 터였다.
무려 4개 주를 정복했다.
과중된 업무들을 짊어질 수밖에 없었다.
“겨울나기에 어려움을 호소하는 백성들을 면밀하게 조사하여 구호에 힘써주세요.”
“예, 어르신.”
전쟁에서 수많은 장졸들이 목숨을 잃었다.
가장을 잃은 가구들이 많았다.
또한 기주의 가구들 중에 초상을 치르지 않는 집들이 없을 정도였다.
그것을 무겁게 받아들인 순욱은 관료들을 총동원하여 구호에 전념했다. 반기로 돌아설 백성들의 분노와 원망을 어떻게든 잠재워야 했기 때문이다.
“잠시 대장군부에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저희 상서대가 독단으로 처리할 일은 아니니까요.”
업성으로 전임된 상서대와 대장군부는 하북의 전권을 행사하는 통치기구로 군림했다.
그렇기에 순욱은 대장군부의 수장인 대장군 이성휘와 자주 의논을 하고는 했다.
후우….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순욱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과연 대장군이 집무실에 있을까?
물론 계시겠지.
여느 때처럼 다른 여인들도 동석하고 있겠지만.
어떻게 연모해온 사람에게 마음을 전할까 전전긍긍하면서 마음을 애태웠던 순욱은 실타래처럼 얽혀버린 마음을 떠안고서 집무실을 나섰다.
* * *
순욱의 예상대로 이성휘는 집무실에서 업무를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집무실에 있는 이성휘는 혼자였다.
업무를 보좌하던 어린 참모들은 어디로 간 걸까?
여포 장군과 장료 장군은?
상아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인은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발걸음을 멈췄다. 설마 집무실에 아무도 없을 줄은 미처 몰랐으니까.
“상서령?”
“크흠!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출입을 망설이는 순욱을 의아하게 여긴 대장군부의 위병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에 순욱은 헛기침을 하면서 발걸음을 움직였다.
“오셨습니까, 상서령.”
집무실에 도착하자 이성휘가 공손하게 예를 갖추면서 순욱을 맞이했다.
쿠웅-.
이성휘의 인사에 가슴이 요동쳤다.
혹시라도 쿵쾅쿵쾅 요동치는 심장이 바깥으로 튀어나오진 않을까, 그런 비현실적인 걱정이 들었을 정도로 깊은 당혹감이 빠졌다.
둘뿐이다.
넓은 공간에 오직 두 명뿐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직면한 순욱은 벼락에 놀란 강아지처럼 어리둥절하는 반응을 보였다.
“네, 안녕하세요… 대장군.”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하고 싶은 말들이 많은데,
듣고 싶은 말들이 산더미처럼 많았는데….
홀로 전전긍긍하면서 전하고 싶은 말들을 정리했음에도 이성휘의 얼굴을 보자마자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비어버리고 말았다.
공손하게 인사를 건넨 순욱은 빠르게 곁눈질하면서 대장군부 집무실의 내부를 확인했다. 혹시 집무실 안에 다른 여인들이 있을까 경계하는 눈치였다.
“대장군의 집무실은 항상 붐볐는데…. 오늘따라 한산하네요?”
“예, 아무도 없습니다.”
여포와 장료는 하후돈을 보좌하여 기병부대를 지휘하느라 부재중이었다.
그리고 대장군부의 어린 참모들은 이성휘의 배려로 휴일을 보내고 있었다.
집무실이 고요하고 한적했다.
과묵한 대장군만이 집무실을 지키고 있었기에.
무거운 정적으로 가득한 집무실을 신기하다는 눈길로 훑어보던 순욱의 시선은 묵묵히 업무를 보던 이성휘에게 머무르게 되었다.
‘혼자서 계속 업무를 보고 계셨군요…. 역시 부지런하십니다.’
집무실에서 홀로 업무를 이어나가는 이성휘의 모습에 순욱은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정직하고 성실한,
그러면서도 결코 탐욕을 보이지 않는.
완벽한 이상형이었다.
이제 돌이키지 못할 정도로 반해버렸기에 이상형처럼 보이는 걸까. 아니면 근사하면서 완벽한 이상형의 모습에 재차 반해버린 것일까.
첫사랑에 황홀경을 느끼는 소녀처럼 순욱은 얼굴을 붉힌 채 하염없이 그의 모습을 시선에 담아냈다.
“상서령.”
“네, 네에…!”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것을 들켜버린 걸까.
쿠웅-.
가슴이 다시 한 번 크게 요동쳤다.
이성휘의 부름에 순욱은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경계를 서던 위병들에게 들었습니다. 계속 발걸음을 하셨다가 돌아가셨다고….”
“…….”
집무실 앞까지 도착했다가 이성휘가 다른 여인들과 있는 모습을 목격하고서 발걸음을 돌렸다.
당연히 모를 리 없었다.
수많은 병사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으니.
문관들의 수장인 상서령이 연이어 헛걸음을 했으니 의아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했다. 이성휘는 혹시 중요한 용무인가 싶어 순욱에게 직접 이유를 물었다.
“급한 용무… 는 아니었어요.”
순욱이 고개를 내저으면서 대답했다.
혹여 본심이 들킬까,
속마음을 억누르면서 입가를 내렸다.
“상서령, 괜찮으시다면 업무에 대해 여쭤도 되겠습니까? 도통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네.”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도움을 요청했다.
대장군의 요청에 순욱은 단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주군께선 하북 백성들에게 수년 동안 조세를 걷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사대부와 호족들까지 모두 범위에 들어가는 겁니까?”
“네. 원칙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사대부와 호족들에게도 세금을 걷지 않는다면 어떻게 군비를 운용한단 말인가. 게다가 굶주린 백성들을 지원하고자 구휼미를 풀었기에 막대한 부채가 발생하고 말았다.
손실과 소비를 충당할 방법이 필요하다.
중원에서 보급되는 자금과 물자들만으로는 결국 한계가 존재했기에 이성휘는 그것을 걱정했다.
“충성을 명목으로 헌금을 받아내야죠.”
“헌금… 말입니까?”
헌금?
기부를 강요하자는 말인가.
인색하기로 유명한 사대부와 호족들이 아무런 조건도 없이 창고를 개방할 리가 없었다. 분명 갖은 변명들을 대면서 조세를 회피하려 들 터였다.
순욱의 대답에 이성휘는 의아함을 드러냈다.
“칼자루는 대장군께서 쥐고 계십니다. 사대부와 호족들은 대장군의 눈치만 보고 있죠.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기득권을 빼앗기게 될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득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주는 것을 조건으로 사대부와 호족들에게 자발적으로 자금과 물자를 받아내면 되겠군요.”
바로 그렇습니다.
이성휘의 대답에 순욱은 아름다운 미소를 만개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대장군.
총명하게 말뜻을 이해했다.
내정에 문외한인 무장 출신이면서도 이해력이 매우 높았다. 지혜롭고 총명한 학생이다. 순욱은 선생의 입장으로 바라보듯이 이성휘를 평가했다.
“그럼 다른 것들도 여쭤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요. 대장군을 도울 수 있다면.”
군권을 관장하는 대장군부가 하북을 다스리는 통치기구로 전임되면서 이성휘는 군권에 이어 내정까지도 담당하게 되었다.
어려움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내정은 결코 이성휘의 특기가 아니었으니까.
평소에는 지혜롭고 총명한 참모들을 의지했지만 지금은 모두 부재중이었으므로 순욱에게 자연스럽게 조언을 구하게 되었다.
“이쪽에 앉아보시겠어요?”
“예.”
순욱이 손짓했다.
그러자 이성휘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순욱에게 다가섰다.
바로 지척에 앉았다.
가정교사와 학생의 관계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수업이 진행되었다.
“상서령께서 업성에 와주시어 정말 다행입니다. 혼자였다면 분명 큰 낭패를 봤을 겁니다.”
“별말씀을요. 과찬이세요.”
이성휘의 감사에 순욱은 쑥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당돌한 소녀처럼 어깨를 으쓱였다.
좀 더.
좀 더 칭찬해줘요.
짝사랑하는 사내에게 받은 칭찬만큼 여인을 들뜨게 하는 것이 있을까. 헤벌쭉한 표정을 지으면서 진심으로 기뻐했다.
“언제든 말씀하세요. 도와드릴 테니까요.”
“감사합니다.”
여인의 마음은 항상 복잡한 법이다.
더욱이 사내를 짝사랑하는 여인의 마음은 얽혀버린 실타래처럼 더욱 복잡했다.
하지만 얽힌 실타래처럼 마음이 복잡하더라도 연모하는 사내의 칭찬 한마디에 근심어린 마음이 마치 설탕처럼 달콤하게 녹아내리는 법이었다.
“대장군, 혹시 괜찮으시다면….”
꾀꼬리처럼 아름다운 목소리로 가르침을 계속 이어나갔을 때,
상아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미녀가 얼굴을 붉히면서 입을 열었다.
말끝을 흐리면서 망설이던 영천순씨 가문의 아가씨는 이윽고 각오가 느껴지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무릎베개… 해드릴까요?”
“…….”
대담하다.
그리고 갑작스러웠다.
얼굴과 목덜미를 붉히면서 수줍어하는 아가씨의 돌발적인 제안에 이성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의복 아래로 시원하게 뻗은 새하얀 허벅지.
무릎을 토닥토닥 두드리면서 부끄러운 제안을 건넨 순욱의 유혹에 이성휘는 정신이 아찔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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