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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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곤일척의 결전은 수많은 목숨들의 희생을 삼키고서야 종결되었지만 피해는 매우 적은 편이었다.
3개월 만에 끝났다.
또한 공방전이 기주(冀州)에 국한되어 벌어졌다.
조조군과 원소군은 무고한 백성들에게 피해가 전가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덕분에 하북의 생산기반은 전쟁을 치렀음에도 여전히 건재할 수 있었다.
“4개 주에 전령들을 파견하여 현황을 살피세요. 먼저 비축한 물자들부터 점검해야 합니다.”
상아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미녀는 하북의 호적부(戶籍簿)를 살피면서 군현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과연 하북이다.
중원에 비해 인구수와 생산량이 훨씬 높았다.
난세의 소용돌이를 피하고자 황하를 넘은 백성들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다. 그리고 원소의 선정에 감화된 북방의 오랑캐들이 귀부하면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실로 경이로운 수준이군요…. 급성장하는 원소군을 저지하지 못했다면, 결국 전쟁에서 패전한 쪽은 아군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어요.’
급성장을 계속 반복하면서 전력을 강화했음에도 여전히 하북은 잠재력이 무궁무진했다.
방대한 인구와 물자들을 바탕으로 경제력과 생산력을 늘려나간다면 나라를 세울 정도의 강대한 힘을 비축할 수 있을 터.
경이롭다.
그리고 두려울 정도였다.
강대한 힘을 거머쥐었던 원소군을 상대로 결전에서 승리했던 아군 장졸들에게 경의를 표했다.
“어르신, 지적도(地籍圖)를 가져왔어요.”
“고마워요.”
방울꽃처럼 아름다운 은발을 늘어뜨린 소녀가 양손에 죽간들을 안아들고서 다가왔다.
전후처리에 매진하는 순욱을 보필하고자 기꺼이 나선 제갈량은 관료들과 업무에 종사했다. 물론 양수와 사마의도 경험을 쌓고자 제갈량과 함께 나섰다.
“으읏, 무… 무거움! 조금만 들어주셈!”
“그것도 못 들어요? 평소에 운동 좀 하라니까!”
“본좌는 덕조처럼 살덩어리가 없어서 힘들어!”
“또, 또 가슴 이야기…!”
서책과 죽간들을 안아든 사마의가 크게 휘청거리더니 곧바로 양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토지대장(土地臺帳).
율령도서(史律令圖)를 비롯한 각종 문헌들.
하북 4개 주를 세밀하게 정리한 공부(公簿)답게 방대한 양을 자랑했다. 수많은 관료들이 달려들어 자료를 옮겼음에도 극히 일부에 불과할 정도였다.
“후후.”
아름답고 총명한 소녀들이 도와주고 있다.
순욱은 업무에 종사하는 대장군부의 어린 참모들을 바라보면서 밝은 미소를 지었다.
“공명.”
“네, 어르신.”
순욱이 입을 열었다.
그에 제갈량이 대답했다.
“저는 이제 퇴청하도록 할게요. 미뤄선 안 될 중요한 일이 있어서요….”
“네? 예에…. 알겠어요.”
이른 아침부터 시작되었던 오전 일과를 끝냈을 때,
순욱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급한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일벌레로 유명한 상서령이 일찍 퇴청한다는 사실에 관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세상이 무너져도 집무실에 출근하여 업무에 종사할 것 같았던 상서령이 반차를 내다니! 상서대의 관료들은 근거 없는 낭설을 수군거렸다.
‘설마 어르신에게 남자가…?’
‘무슨 바보 같은 소리인가! 그럴 리가 없잖은가!’
상서령 어르신에게 남자라니!
그럴 리 없다.
말도 안 되는 억측이다.
천부적인 학식과 물망초처럼 순결한 아름다움을 겸비한 순욱을 우상으로 떠받드는 관료들은 어르신에게 결코 남자가 생겼을 리 없다며 격분을 터트렸다.
상서령은 절벽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피어난 물망초처럼 고결한 분이시다.
결코 천아(天鵝)의 꽃이 꺾일 리 없다.
상서대의 관료들은 경애하는 우상에게 절대적인 믿음을 보였다.
* * *
순욱은 퇴청하자마자 곧바로 집에 돌아왔다.
목욕을 하고 머리를 곱게 정리했다.
그리고 수수하고 소박한 예복을 골라 입었다.
노복들에게 간단히 선물을 꾸리도록 지시한 순욱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그녀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오라비 순심의 저택이었다.
“오라버님, 문약입니다.”
상아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미녀가 공손하게 예를 갖추면서 대문 앞에 섰다.
가만히 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긴장감에 찬 한숨을 내쉬었다.
오라버니께선 그간 강녕하셨을까.
물론 아니겠지.
강녕할 리가 없었다.
여남원씨 가문을 위해 분골쇄신하듯 노력했던 오라버니가 아니신가. 덧없이 무너지는 세력을 그저 무력하게 지켜보면서 통탄과 탄식을 쏟아내셨겠지.
존경하는 오라비께서 흘리셨을 눈물과 회한을 상상한 순욱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조조군의 참모로서 원소군의 몰락에 기여를 하지 않았던가.
나를 위해 성심성의껏 노력해준 경애하는 오라비를 망국(亡國)의 신하로 만드는 배은망덕한 짓을 범했다.
입술을 꾹 깨물면서 죄책감을 삼켰다.
“오셨습니까, 아가씨…!”
끼익-.
이윽고 굳게 닫혔던 문이 열렸다.
오라비를 보필해온 영천순씨 가문의 노복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심스러운 모습으로 대문을 열었던 노복은 순욱의 얼굴을 보자마자 화색을 드러냈다. 너무도 반갑고 그리웠던 얼굴이었기에 열렬히 환대했다.
“늦어서 죄송해요. 업성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아가씨.”
순욱은 가문의 노복에게도 공손한 모습을 보이면서 인사를 나누었다.
조조군에 임관하고자 기주를 떠났던 이후에 처음으로 맞이하는 재회였다. 수많은 역경에도 꿋꿋하게 오라버니를 보필한 노복에게 감사를 표했다.
“오라버니는 안에 계신가요?”
“아, 예. 그런데 그것이….”
아가씨의 물음에 노복은 얼굴빛을 흐리면서 시선을 회피했다.
고개를 푹 숙였다.
몹시 황망하여 입을 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말을 얼버무리면서 동요하는 노복의 모습에 순욱은 오라버니께서 몹시 위중함을 알게 되었다. 분명 근심으로 인한 마음의 병을 앓고 계신 것이리라.
“간혹 미음을 드시긴 하시는데… 대부분 곡기를 끊으시고 방에만 계십니다.”
“오라버니께서요?”
“계속 스스로를 책망하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
예상이 적중했다.
오라버니께서 상심에 몸져누우셨다.
건강에는 이상이 없겠지.
문제는 마음을 잠식한 근심이다.
사대부 출신으로서 강직하고 청렴한 성품이었던 오라버니였기에 상심 또한 깊은 것이리라. 여남원씨 가문을 위해 견마지로를 마다하지 않으셨으니.
“…오라버니를 뵙고 싶어요.”
“알겠습니다.”
안타깝게 이별했던 여동생과 재회하면 공자께서 상심을 딛고 일어서실지도 모른다.
상심을 떨치시기를.
부디 건장했던 모습으로 돌아오시기를.
노복은 일말의 희망을 품고서 발걸음을 움직였다.
“공자님, 문약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노복이 순욱이 방문했음을 알리자 망부석처럼 꿈쩍도 않았던 장지문이 열렸다.
초췌한 낯빛의 사내가 고개를 내밀었다.
“문약…. 무, 문약이 왔느냐…?”
수척해진 눈가.
노쇠하게 메마른 뺨.
넝쿨처럼 크게 풀어헤친 머리카락.
왕년의 지성과 총명함은 온데간데없었다.
여동생 순욱과 영천순씨 가문의 신동으로 사대부들의 존경을 받았던 순심은 의지가 완전히 꺾여버린 폐인이 되고 말았다.
“오라버니!”
영락없는 폐인이 되어버린 오라버니의 초췌한 몰골을 본 순욱은 대경실색하며 경악을 토해냈다.
예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망가지시다니.
준수한 용모와 철두철미한 기품으로 수많은 선비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오라버니께서….
유교를 숭상하며 대의를 관철했던 오라버니가 무너지고 말았다. 비참한 현실에 절망하여 최후의 의지마저 놓아버린 것이었다.
“오, 오라버니…! 몸이 많이 쇠하셨습니다! 귀한 약재들을 가져왔으니 당장 탕약을 올리겠습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운 오라버니의 모습에 순욱은 크게 펄쩍 뛰는 모습을 보였다.
여동생의 다급한 모습에 순심이 손을 들어올렸다.
“나는 괜찮다. 대장군께서 저택에 의원들을 보내어 건강을 살펴주었으니. 점점 쾌차하는 중이란다.”
순심이 애써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곡기를 끊어 쇠락해졌을 뿐이다.
식사를 재개하면서 건강을 회복하고 있으니 머지않아 원기를 회복할 수 있을 터였다.
탕약에 사용되는 약재들은 충분하고도 넘쳤다.
순심이 상심하여 곡기를 끊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이성휘가 사람들을 보내어 지원해준 덕분이었다.
“쿨럭쿨럭!”
“오, 오라버니!”
하지만 그럼에도 마음을 갉아먹는 근심은 계속해서 육신을 위협하고 있었다.
계속 곡기를 끊었다.
당연히 몸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순심이 피를 토할 것처럼 격한 기침을 토해내자 순욱이 절규에 가까운 비명을 내질렀다. 초췌한 오라버니의 모습에 순욱은 마음이 한없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미, 미안하구나…. 못난 모습을 보여.”
순심이 잔기침을 토해내면서 힘겹게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그저 무사하시기만 하면… 저는 그것으로 충분하니까요.”
오라버니의 사과에 순욱은 옷소매로 눈물을 닦으면서 밝은 미소로 대답했다.
드디어 오라버니와 만났다.
난세에 이별했던 오빠와 재회한 여동생은 숙연해진 마음을 접어두고서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