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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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들이 눈을 좋아하는 것은 매우 당연했다.
하지만,
수개월 동안 엄동설한에 시달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질린다.
빨리 봄이 됐으면 좋겠다.
추워.
추워 죽겠다구.
대체 언제까지 몰아치는 거래?
흑발을 늘어뜨린 소녀가 콧물을 훌쩍이면서 몰아치는 눈보라를 바라보았다. 하늘이 구멍이라도 슝 뚫렸는지 사흘 동안 계속해서 눈보라가 몰아쳤다.
“함박눈이 펑펑 왔으면 좋겠다고 빌었던 소원을 당장 철회하겠음, 퉷퉷퉷-!”
눈이 쌓이면 길이 막힌다.
길이 막히면 보급 또한 막히게 된다.
그리고 보급이 끊어지면 쫄쫄 굶을 수밖에 없었다.
물자를 수송하던 수레들이 당도하지 못했다는 소식을 들은 소녀는 자신이 장난삼아 빌었던 소원 때문이라고 여겼는지 아연실색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사중승(御史中丞) 사마의.
소녀는 한 바퀴를 돌면서 침을 뱉음과 동시에 양손으로 몸을 터는 기이한 행동을 보였다.
민간신앙에서 전승된 부정을 털어내는 방법이었다.
“뭐해요?”
바람꽃처럼 아름다운 은발을 늘어뜨린 소녀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물었다.
대체 무슨 기행인지….
정말 이해하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이 멍청이가 정말 한나라의 어사중승이란 말인가.
진심으로 한나라의 앞날이 걱정되는 순간이었다.
“부정을 털어내는 중이잖음! 그것도 모름?”
“…부정이요?”
너무도 당당한 사마의의 목소리에 제갈량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중원에서 통용되는 유행인가?
변방의 산골짜기에서 살았기에 아는 바가 없었다.
산골짜기의 시골소녀는 미신을 쫓는 도시 사람들이 정말 이상하다며 혀를 내둘렀다.
“빨리 제갈씨도 하셈. 부정 탔을지도 모름.”
“…….”
밑져야 본전이지.
사마의의 주장에 현혹되고 말았다.
정체불명의 주술을 배운 제갈량은 사마의를 따라하면서 제자리에서 휙휙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양수는 사마의와 제갈량을 쳐다보면서 무거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바보들의 향연도 아니고.”
하지만 동기들의 우스꽝스러운 행동 덕분에 양수는 울적했던 기분을 털어낼 수 있었다.
대역죄인의 신분으로 마차에 오르는 이모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슬퍼했다.
승상께서 지켜주실 터.
그럼에도 불안한 마음을 떨쳐낼 수 없었다.
혹시라도 조정대신들의 참소와 비방에 곤혹을 겪진 않으실까. 대역죄인의 오명을 짊어진 채로 난세에 희생되진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걱정을 이어가던 양수는 동기들의 멍청한 모습을 보고 근심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다.
“머지않아 상서령께서 도착하실 거예요. 그러니 당장 업무를 재개하는 게 어때요?”
팔짱을 낀 양수가 사마의와 제갈량에게 충고했다.
상서령(尙書令).
모든 관료들을 대표하는 재상이다.
업성으로 전임된 상서령이 하북에 당도했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한가롭게 행동하는 동기들의 어리석은 모습에 고개를 내저었다.
“안 그래도 일하려고 했거든요?”
제갈량이 새침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상서령 어르신께서 오신다.
성장한 모습을 보일 절호의 기회였다.
자신을 발탁하고 대장군부에 추천해준 순욱을 은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제갈량은 들뜬 마음으로 상서령과의 재회를 학수고대했다.
‘어르신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야지!’
독설이 특기인 까칠한 성격이었지만 자신이 인정한 상대에게는 한없이 친절했다.
어른에게 칭찬을 받으려는 어린아이처럼 의욕 넘치는 모습을 보였다. 당당하게 업무능력으로 인정을 받을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 * *
엄동설한의 추위는 업성으로 전임된 관료들에게 살을 에는 고통을 선사했다.
살갗이 떨어질 것 같다.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감각이 무뎌지고 있었다.
온실의 화초처럼 글공부에 매진했던 샌님들이 혹한의 추위를 견뎌봤을 리가 없었다. 방한복을 껴입었음에도 생생히 느껴지는 냉기에 고통을 호소해야 했다.
“무, 무슨 눈보라가…!”
“어서 움직여야 하네! 눈밭에 쓰러지면 끝장일세!”
수북하게 쌓인 설원을 통과했다.
푸욱. 푸욱.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눈더미가 발목을 붙잡았다.
마치 발목을 붙잡는 것처럼 지독했다. 관료들은 천근만근처럼 무거운 발걸음을 애써 재촉하면서 북쪽으로 나아갔다.
“상서령,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습니다.”
관료들을 호위하던 무관이 물었다.
그에 순욱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은 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하북의 겨울이 엄동설한의 지옥을 자랑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풍문으로만 들었던 하북의 겨울을 온몸으로 경험하게 된 순욱은 새하얀 입김을 토해내면서 새하얀 장막에 둘러싸인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너무도 춥다.
당장이라도 얼어붙을 것 같았다.
어떻게 장졸들은 이 추위를 버텼단 말인가.
분명히 정벌에 나섰던 장졸들은 눈보라를 강인하게 참아내면서 전투를 치렀을 터. 한없이 인내하면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장졸들에게 경의를 표했다.
“수레가 빠졌습니다!”
“어서 들어올려라! 조금도 지체해선 안 된다!”
서적과 죽간들을 가득 실은 수레가 결국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눈밭에 빠지고 말았다.
병사들이 여럿 달려들었다.
하지만 눈밭에 단단히 빠졌는지 요지부동이었다.
사태를 지켜보던 무관들까지 달려들어 수레를 움직이려 노력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를 지켜보던 순욱은 결단을 고심해야 했다.
“수레를 포기하겠습니다. 이대로 계속 발걸음을 지체할 수는 없으니까요.”
“하, 하지만 상서령…!”
“지금은 단념할 때입니다. 명령에 따르세요.”
“…….”
서적과 죽간들을 수송하던 수레를 포기하겠다는 순욱의 결정에 반대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내정에 필요한 문헌들이다.
통치를 위해서라도 서적과 죽간들이 반드시 필요했다.
하지만 순욱이 지엄한 목소리로 명령하자 반대하던 관료들이 입을 다물었다. 계속 행군을 지체하다간 눈밭에 쓰러져 목숨을 잃게 될 터이니.
“알겠습니다.”
“수레를 포기한다! 다시 행군을 준비하라!”
어쩔 수 없다.
결국 수레를 포기하는 수밖에.
장졸들이 다시 전열을 갖추면서 행군을 준비했다.
탄식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무엇보다 목숨이 중요했기에 안타까움을 애써 참아내야 했다.
“상서령!”
행군을 다시 재개했을 때,
무언가를 발견한 무관이 소리쳤다.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군세들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리라.
순욱이 황하를 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이성휘는 군세들을 이끌고 당도했다. 거센 눈보라를 뚫고 달려올 순욱을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상서령.”
“대, 대장군…!”
척후들에게 보고를 받고 곧바로 달려왔다.
제장들과 함께 이성휘가 도착하자 순욱은 소스라치게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대장군께서 직접 맞이하러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휘하 장수들만 보내도 됐을 텐데….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얼떨떨하면서도 기뻤다.
위기에 봉착한 나를 구하고자 이렇게 와줬으니까.
대장군의 위엄을 뽐내면서 달려온 이성휘를 바라보면서 얼굴을 붉혔다. 주군의 남편임을 알면서도 마음이 쿵쾅쿵쾅 요동쳤다.
“수레를 옮겨라.”
“예, 대장군!”
이성휘가 명령하자 무관들이 움직였다.
여럿 달려들었음에도 움직이지 않았던 수레가 요란한 굉음과 함께 눈밭에서 빠져나왔다.
일당백의 정예로 유명한 대장군부의 무관들답게 용력이 대단했다. 육중한 수레를 들어올리는 모습을 바라보던 관료들이 크게 놀랐을 정도였다.
“어찌 대장군께서 직접….”
“왕좌지재를 맞이하는 일입니다. 제가 직접 상서령을 맞이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순욱의 물음에 이성휘가 입을 열었다.
낯간지러운 대답이다.
상아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인이 수줍음에 물든 표정을 지었다.
“혹시 불편한 곳은 없으십니까?”
“아뇨, 괜찮습니다.”
행군이 재개되었다.
순욱은 이성휘와 나란히 말을 몰면서 나아갔다.
위군(魏郡)까지 상당히 가깝다.
대장군과 상서령은 서로 의논하여 강행군을 거듭하기로 결정했다.
“대장군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오르네요.”
“…그렇습니까.”
조조군을 따르고자 오라비 순심과 헤어지고 연주에 도달했을 때,
처음 맞이해준 사람이 바로 이성휘였다.
인재를 맞이하는 일이다.
정중하게 예우를 다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이성휘를 처음 만났을 때를 회상하면서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와의 첫 만남은 결코 잊을 수 없는 행복한 추억으로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었으니까.
“그때도 대장군은 저를 정중하게 맞이해주셨어요.”
추억을 떠올리면서 미소를 담아냈다.
행복이 차올랐다.
달처럼 아름다운 얼굴에 웃음기가 만연했다.
“대장군께선 항상 변함없이 성실하시네요. 높은 지위에 거만해지지 않고… 오로지 책무에 몰두하시죠.”
“과찬이십니다.”
거만을 경계하며 성실함을 지켜왔다.
나태를 용납지 않았다.
항상 대의와 책무를 우선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나라의 모든 무관들을 대표하는 대장군에 임명되었음에도 예전과 변함없는 이성휘의 모습을 바라보던 순욱은 갈수록 커져가는 자신의 감정을 확인했다.
연심(聯心).
은인을 향한 연모의 감정이 분명했다.
나는 항상 성실하고 다정한 이 사내를 남몰래 연모하게 된 것이 틀림없었다.
말고삐를 꾹 움켜잡았다.
주군의 남편을 열렬히 연모하고 있음을 깨달아버린 순욱은 안타까움에 찬 침음을 삼켰다.
“공달이 상서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조카님께서 대장군을 당혹스럽게 만들지는 않았는지… 그게 오히려 걱정스러울 따름이에요.”
천하를 떠들썩하게 만든 치녀.
음란한 소설들로 미풍양속을 뒤집었던 탕녀.
대장군에게 많은 민폐들을 끼쳤을 조카님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고 상서령의 오라비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
원소군의 참모였던 순심은 세력이 멸망하자 그대로 칩거를 선택했다.
멀쩡히 살아있다.
정중하게 예우했기에 다친 곳도 없었다.
이성휘로부터 오라비의 소식을 들은 순욱은 경직된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