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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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났다.
참화가 멎어들었다.
잔혹하게 이어졌던 살육의 연쇄를 끊어냈다.
건곤일척의 결전에서 승전한 조조군은 모든 제장들에게 명령하여 전장을 수습하도록 했다. 꽁꽁 얼어붙은 주검들을 운반하면서 전쟁의 흔적을 지워나갔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이모님.”
종사중랑(從事中郞) 양수가 원소를 배알했다.
대장군부의 신입 참모는 기고만장한 성정으로 유명했음에도 원소에게만큼은 깍듯하게 예의를 지켰다.
양수의 어머니 원씨가 바로 원술의 누이였다. 그리고 원소의 이복언니이기도 했다.
외가가 여남원씨 가문이었던 양수는 원소를 웃어른으로 예우하면서 문안인사를 올렸다.
“아, 어서 와요.”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였기 때문일까.
원소와 양수는 닮은 구석이 많았다.
찬연하게 빛나는 금발.
새하얀 얼굴과 섬세한 이목구비.
풍요와 권력을 상징하는 커다란 거유까지.
아름다운 선남선녀들로 유명한 여남원씨 가문의 혈육답게 원소와 양수는 몹시 아름다운 미녀였다. 특히 고귀한 기품과 늠름함이 빼닮았다.
“이야기 들었어요. 대장군을 옆에서 보필하는 종사중랑에 배속되었다고요?
“…네.”
원소가 포근한 미소를 지으면서 물었다.
그에 양수는 얼굴을 굳혔다.
대장군부의 참모.
하북 세력의 멸망에 일조를 할 셈이다.
혹시라도 이모에게 노여움을 받을까 두려웠던 양수는 전전긍긍하는 심정으로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우려와는 달리 원소는 자애로운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대장군부의 종사중랑…. 중요한 자리예요. 바로 지척에서 대장군을 보필하는 속관이니까요.”
설마 성휘가 나를 향한 그리움 때문에 조카딸을 속관으로 임명한 게 아닐까.
후후….
당연히 억측이겠지만 상상만으로도 즐거웠다.
자신을 빼닮은 조카딸이 아닌가.
분명 외조카를 바라보면서 자신을 아련한 첫사랑처럼 떠올렸으리라.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괜찮으세요…? 혹시 불편한 점은 없으시고요?”
“네, 괜찮아요.”
패주(敗主)의 운명은 항상 비참한 법이었다.
세력을 잃은 군주.
망군(亡君)은 중상모략의 희생양이 될 뿐이다.
그렇기에 양수는 이모님께서 혹시 중상모략에 휘말리진 않을까 두려워했다. 만약 이모님의 신변에 문제라도 생긴다면 어머니께서 크게 슬퍼하실 테니까.
‘수춘성에서 외숙부가 처형당했을 때도… 어머니께선 남몰래 눈물을 흘리셨으니까.’
낯빛을 흘리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수춘성이 함락되었을 때,
숙부님께선 대장군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결국 비참하게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오열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기에 양수는 어떻게든 이모님만큼은 지켜내려 했다.
설령 자신의 안위까지 위험해지더라도.
“저는 성휘를 원망하지 않아요.”
“네?”
양수의 속내를 헤아린 것일까.
원소가 쓴웃음을 흘리면서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어요. 권력을 차지하고자 죽음과 불행을 흩뿌리고 다녔죠. 수많은 민중들에게는 영웅의 행보처럼 보였을지는 몰라도 적들에게는 분명 무자비한 약탈자로 보였을 거예요.”
빛나는 영웅.
무자비한 약탈자.
그것은 관점에 따른 차이일 뿐이었다.
자신이 수많은 사람들을 불행으로 빠트렸던 약탈자임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인과응보처럼 자멸하고 말았다는 자조어린 평가를 내놓았다.
“절대 그렇지 않아요! 이모님께선… 수많은 민중들로부터 지지를 받은 영웅이셨어요! 비록 난세에 무너졌지만 이모님은 위대한 분이세요!”
패배자의 낙인조차도 감히 찬연하게 빛났던 영웅의 위업을 더럽힐 순 없으리라.
양수는 얼굴을 붉히면서 용기 내어 소리쳤다.
멀리서 항상 응원했다.
영웅의 위풍당당한 행보를 지켜보았다.
수많은 난적들을 격파하고서 하북의 패자로 군림했던 이모님을 진심으로 존경했다. 분명 이모님은 경의를 받아 마땅한 영웅이었으니까.
“후후, 고마워요. 정말 상냥하시네요.”
“네… 네엣.”
성모처럼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면서 자신을 응시하는 이모님의 모습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화악-.
끓는 찻주전자처럼 뜨거워졌다.
너무도 아름다운 사람이다.
미려하고 고아한 용모에서 성스러움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원소가 새하얀 이를 드러내면서 웃음을 짓자 양수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언니께선 강녕하신가요?”
“네…. 건강하세요.”
머지않아 조조와 함께 허도로 가게 될 터.
미천한 얼녀라며 핍박했던 여남원씨 가문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보살펴주었던 언니를 떠올렸다.
재회에 기뻐하실까.
아니면 동생의 몰락에 슬퍼하실까.
기뻐하면서도 동시에 슬퍼하시겠지.
새하얀 달빛처럼 아름다운 얼굴에 숙연함을 담아냈다.
“허도로 향하시는 이모님을 보필하겠습니다.”
“아뇨, 성휘를 계속 보필해주세요.”
각오가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원소는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조카딸의 친절을 사양했다.
나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든든한 오랜 벗이 자신을 지켜줄 테니까.
오히려 벗에게 무자비한 역공을 당할 조정대신들이 걱정이었다.
“제가 허도로 떠나면 사대부와 호족들이 크게 동요할 거예요. 어쩌면 조조군의 통치에 반대하는 인물들이 서로 결탁하여 반란을 획책할지도 모르죠. 그러니 업성에 남아서 성휘를 도와주세요.”
“…네.”
조조군에 투항한 사대부와 호족들이 온순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원소의 영향력 때문이다.
당연히 원소가 조조와 함께 허도로 떠나게 되면 불만과 반항으로 가득한 목소리들이 조조군을 위협하기 시작할 것이었다.
우수한 참모들이 곤경에 봉착할 이성휘를 도와줘야 했다. 그래서 원소는 보필을 자처했던 외조카의 선심을 애써 만류했다.
“그런데 이모님…. 대장군을 이름으로 부르시네요.”
“네, 그럼요.”
성휘.
매우 살가운 호칭이었다.
오랜 벗을 대하는 듯했다.
그리고 연인을 다정하게 부르는 것 같았다.
대장군을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분명 대장군의 주군이자 정실부인인 승상뿐일 텐데….
대체 대장군과 무슨 사이인 걸까.
양수는 당혹감이 역력한 표정을 지으면서 이모님의 대답을 기다렸다.
“성휘와… 혼인하기로 했어요.”
“네에?!”
“성휘는 저의 낭군, 저의 남편, 저의 지아비가 되실 분이랍니다.”
“콜록콜록!”
이모님의 갑작스러운 폭탄발언에 놀란 양수는 그만 사레가 들려버렸는지 격하게 기침을 토해냈다.
낭군. 남편. 지아비.
여러 이름들이었지만 뜻은 확연히 일치했다.
그것은 이모님께서 대장군과 부부의 연을 맺는다는 것이었다.
‘대장군이 이모부가 된다니…! 그, 그러면… 지금보다 훨씬 난관이 높아진다는 거잖아요!’
직속상관을 남몰래 연모해온 대장군부의 참모는 운명의 굴레처럼 잔인무도한 현실에 눈앞에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안 돼!
대장군이 이모부가 된다니!
가족…. 가족이 된다는 거잖아!
눈앞에 이모님이 없었다면 머리를 싸매면서 바닥을 나뒹굴었으리라. 소녀의 짝사랑은 너무도 험난했다.
“왜 그러신가요?”
“아,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묘하게 허둥대는 조카딸의 모습을 바라보던 원소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귀신처럼 날카로운 혜안과 통찰력을 자랑하는 하북의 패자가 풋내기 소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할 리가 없었다.
아.
성휘를 좋아하는구나.
단번에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얼굴을 붉히면서 고민하는 조카딸의 모습이 전전긍긍하며 시름하던 자신과 너무도 닮았기 때문이었다.
* * *
조조는 제장들을 소집하여 철군을 서두르도록 엄명을 내렸다.
허도를 오랫동안 비워두었다.
봄이 시작되기 전에 허도로 돌아가려 했다.
병주자사 고간의 활약으로 적대를 이어나가던 병주를 복속시킨 조조는 분란이 진정되었음을 확인하고서 곧바로 귀환을 선언했다.
“형부의 부하들만으로는 버겁지 않을까요?”
가후. 순유.
양수. 사마의. 제갈량.
대장군부에 배속된 참모들은 분명 우수한 기재였지만 하북 4개 주의 내정을 총괄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분명 원소가 떠나자마자 사대부와 호족들이 고개를 치켜들 터.
일당백의 전력을 갖춘 대장군부의 병력이라면 신속하게 반란을 진압하겠지. 하지만 지금 아군에게 필요한 것은 통치와 지배를 이어나갈 역량이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우려를 표시하는 사촌동생의 물음에 조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서령을 업성으로 전임할 생각이다. 벌써 전령이 허도에 당도했겠지.”
“네?”
이미 명을 내리셨단 말인가.
은밀하게 진행한 사촌언니의 결정에 조홍과 조인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상서령 순욱이라면 믿을 수 있다.
한삼걸(漢三傑) 소하와 장량에 필적하는 기량과 재능을 자랑하는 왕좌지재(王佐之才)가 아닌가.
불안을 우려하던 목소리가 쑥 들어갔다.
“원양, 하북을 부탁한다.”
“맡겨만 둬.”
조조는 이성휘를 지원하고자 하후돈과 휘하의 제장들을 업성에 남겼다.
철두철미한 성정의 승상답게 혼란에 대비하여 안배를 배치했다. 한나라의 문무를 대표하는 상서령과 거기장군의 전임을 통해 조조가 하북 점령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다 순진하신 상서령도 우리 남편의 매력에 그대로 빠지는 게 아닌가 모르겠어.”
하후돈이 호쾌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에 조조가 인상을 찡그렸다.
“상서령은 사대부를 대표하는 청백한 인물이다! 발정기의 암고양이처럼 남편을 몰래 훔쳐먹은 너희들과는 격이 달라! 상서령을 음해하지 마라!”
“아님 말구.”
수많은 암고양이들이 남편을 몰래 건드렸음에도 순욱만큼은 올바른 정조를 관철했다.
주군의 지아비를 건드는 것은 천인공노할 대죄였기에 결코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꿋꿋한 지조를 이어나가던 순욱을 누구보다 신뢰하고 있었다. 총애하던 사촌들에게 매번 뒤통수를 얻어맞은 조조였기에 순욱을 향한 믿음이 더욱 컸다.
“이야기는 다 끝났으니 눈앞에서 사라져라! 주군의 남편을 훔쳐먹은 도둑고양이들 같으니라고!”
사촌이 아니라 원수들이 아닐까.
연이어 배신을 당해버린 조조는 사촌들을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지금까지 고양이에게 계속 어물전을 맡겨버린 광대짓이 되고 말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