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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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천의 기병들이 호관(壺關)을 넘었다.
태원군(太原郡)의 병력이었다.
병주를 관할하던 장수들은 무장을 해제하고서 위군(魏郡)에 당도했다.
전쟁을 일으킬 것처럼 일촉즉발의 상황을 유도했던 병주 세력이 백기를 치켜들었다. 결국 승패를 직시한 원소군의 잔병들은 헛된 희망을 내려놓고서 조조에게 귀의하였다.
“투항하겠습니다!”
“부디 소장들을 받아주십시오!”
과연 원소의 예측대로였다.
병주자사 고간을 태원군으로 파견하자 기병을 지휘하던 장수들이 모두 항복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하북을 호령했던 병주의 기병군단이 모두 조조군의 휘하로 편입되었다.
원소와 고간을 의심했던 조조군 장수들은 기상천외한 결과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용맹무쌍하던 병주의 기병군단이 순한 양이 되어 굴복했기 때문이다.
“너를 계속 병주자사에 임명하겠다. 휘하들을 맡길 터이니 황실과 조정의 명령을 받들어 변방을 수비하도록 하라.”
“…명을 따르겠습니다.”
고모 원소를 보필하고자 조조군에 귀순했던 고간은 병주 세력의 항복을 받아내는 활약을 세웠다.
주모자 곽원을 압송했다.
또한 휘하 장수들을 투항으로 이끌었다.
일당백의 정예로 유명한 병주의 기병군단을 고스란히 손아귀에 거머쥔 조조는 활약을 크게 참작하여 고간을 열후에 책봉하고 식읍을 하사했다.
“정말 말대로 됐군.”
“설마 순순히 투항해올 줄이야….”
뛰어난 혜안이다.
실로 날카로운 안목과 식견이었다.
하북을 제패했던 여걸다웠다.
조조군 장수들은 원소의 능력에 혀를 내둘렀다.
“과연 대단한 통솔력이옵니다. 전쟁을 준비하던 장수들을 모두 설득할 줄이야….”
“덕분에 시름을 덜었네요.”
현장을 주시하던 대장군부의 참모들이 사태가 일단락되었음을 인지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가후와 순유,
두 군사들은 원소의 혜안에 감탄을 표시했다.
천하의 권력을 차지하고자 치열하게 난립했던 하북의 효웅다운 뛰어난 지모였다. 과연 천하통일의 대업에 어울리는 여인이었다.
만약 조조라는 일생일대의 적수가 없었더라면 그녀가 천하통일을 이뤄냈을 테지.
오랜 벗이자 평생의 숙적.
쓴웃음을 흘리면서 두 여걸들의 관계를 떠올렸다.
“그대로 전쟁이 벌어졌다면 단번에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치달았겠죠. 전쟁의 참화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을 거예요. 결국 연주와 예주로 피해가 확대되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사예주를 관통하여 연주와 예주를 침공한다는 곽원의 계획은 매우 위험천만한 발상이었다.
현재 중원은 빈집이나 다름없다.
숙련된 정예들이 한꺼번에 하북으로 투입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마터면 세력의 근간이 흔들릴 뻔했다.
전력을 다하여 막아낸다면 진압에 성공하겠지만 분명 미증유의 피해를 떠안았을 터였다. 투항한 지방관들을 위무하면서 세력을 재정비하던 조조군은 다시금 난관에 봉착했으리라.
“최악으로 치닫지 않아 천만다행이옵니다.”
“우리 주군께서 또 해내셨네요.”
“영예로운 주군… 말이옵니까?”
“절세의 매력으로 하북의 태양을 떨어트렸잖아요.”
가후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에 갈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인이 장난스러운 웃음을 쿡쿡 흘리면서 대답했다.
“주군에게 반하지 않았다면 과연 도와줬을까요? 갑자기 그런 의문이 드네요. 도움을 줬더라도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협력하진 않았을 것 같은데요.”
“…….”
반박할 수 없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으니.
그것은 자신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이 아닐까.
어쩌면 그를 진심으로 연모하는 여성 장수들에게도 모두 통용되는 말일지도 모른다.
“이것을 요즘 말로 ‘어장관리’라고 하나요. 과연 주군은 대단하세요. 마치 미래를 예견한 것처럼 원소를 미리 꼬셔둔 상태였잖아요.”
“…짓궂은 농담이옵니다.”
어떻게 사람이 후일을 모두 예견하겠는가.
말도 안 되는 억측이다.
가후가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순유의 말처럼 영예로운 주군께서 미래를 예견하고서 원소에게 떡밥을 던져준 것이었다면… 천하제일의 난봉꾼이라 불러야 할 터였다.
“영예로우신 주군께서는 여인들의 고백을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하여 바람둥이가 되셨을 뿐… 결코 단 한 번도 여인의 마음을 악용하진 않으셨사옵니다.”
“그렇긴 하죠. 뭐랄까…. 선량한 바람둥이라고 명명해야 할까요.”
선량한 바람둥이.
뭐야, 그거.
앞뒤가 전혀 안 맞는 별명이잖아.
순유가 쿡쿡 웃음을 터트렸다.
“선량한 바람둥이께선 지금쯤 많이 바쁘시겠네요.”
천하를 제패한 여장부들의 기싸움에 말려들어 식은땀을 주룩주룩 흘리고 있을 주군을 떠올렸다.
불쌍한 사람.
하지만 어쩌겠는가.
모두 본인의 업보인 것을.
누가 그렇게 여자들을 무분별하게 꼬시래?
물론 본인이 욕심내어 벌어진 결과물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스스로가 떠안아야 할 부담이었다.
* * *
길을 끊어버리고 농성하던 병주의 장수들이 투항하자 사대부와 호족들이 업성으로 몰려들었다.
대세가 완전히 정해졌다.
최대한 빨리 조조군에 귀순하는 것만이 살길이다.
동참을 결심한 원소가 조조에게 협력하면서 하북을 복속하는 과정이 수월하게 이루어졌다.
참화에 휩싸였던 하북이 평화롭게 진정되도록 원소가 뛰어난 혜안과 수완을 발휘한 덕분이었다.
“고간을 다시 병주자사에 임명한 것처럼 왕수를 청주별가로 임명하여 다스리게 한다면 혼란이 되풀이되는 정국을 빠르게 안정시킬 수 있을 거예요.”
최대한 빨리 혼란을 잠재워야 한다.
원소는 자신이 임명했던 지방관들을 다시 군현으로 파견하여 민심을 수습하도록 조언했다.
기주. 유주. 병주. 청주.
하북 4개 주를 다스리는 대부분의 지방관들은 토착세력의 지지를 받는 사대부 출신이었다.
지방관들을 내치거나 홀대한다면 민심이 크게 동요할 터.
지금까지 받아들인 것처럼 조조는 원소의 조언대로 업무를 수행했다. 통치와 복속에 더욱 박차를 가하기 위해서였다.
“알겠다. 네 조언을 따르도록 하지.”
원소가 임명했던 지방관들을 다시 중용한다.
상당한 위험부담을 떠안는 일이었음에도 조조는 망설임 없이 조언을 받아들였다.
이제 한 배를 탄 입장이다.
오랜 벗이자 숙적이었던 원소를 신뢰하기로 했다.
조조는 속관들을 불러들여 원소의 조언대로 업무를 내렸다. 그에 원소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면서 조조를 응시했다.
“최대한 빨리 혼례식을 올리고 싶네요. 금은보화로 치장된 호화로운 혼례는 아니더라도 화려한 꽃잎들이 잔뜩 흩뿌려진 곳에서 사랑을 속삭였으면 좋겠어요.”
금발을 늘어뜨린 여인이 사랑스럽게 속삭이면서 풋풋한 연심을 전달했다.
연분홍으로 물든 뺨.
사내를 홀리는 귀여운 애교까지.
몸짓 하나하나가 치명적인 매혹을 품고 있었다.
오랫동안 짝사랑을 간직해온 여인은 아내가 지켜보는 앞에서 남편을 유혹했다. 일부러 도발하는 것처럼 풍만한 가슴을 흔들어대면서 위용을 과시하기까지 했다.
“누가 그렇게 둘 것 같은가!”
조조가 소리쳤다.
질투로 번뜩이는 붉은 눈동자.
당장이라도 황하에 던져버릴 것처럼 흉흉했다.
하지만 상대는 원소였다.
유황불처럼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길을 눈앞에 두고 있었음에도 부드럽고 고아한 자태를 유지했다.
“왜 그렇게 역정을 내시나요? 이미 저와 약조를 했잖아요. 설마 약조를 깨실 생각인가요. 설마 조맹덕께서 이런 소인배인 줄은 몰랐네요.”
원소가 뺨에 손바닥을 올리면서 도리어 억울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철면피가 되기로 작정했는지 원소는 조조가 지켜보는 앞에서 이성휘와 팔짱을 꼈다. 알콩달콩한 신혼부부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듯했다.
“그쵸, 여보?”
“예, 예….”
고개를 내밀면서 식은땀을 주룩주룩 흘리던 이성휘에게 사랑스러운 애교를 부렸다.
완강한 기백을 자랑하는 여인들의 눈치를 계속해서 살피던 이성휘는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으로 어색하기 짝이 없는 반응을 보였다.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울어야 할지.
행복하면서도 두렵다.
두려우면서도 행복했다.
양손의 꽃.
천하를 제패했던 여장부들에게 진심어린 사랑을 받는 천하제일검은 뱃속에서 위액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느껴야 했다.
“여보는 무슨! 혼례도 안 치렀으면서!”
“네, 그러니까 서둘러 혼례를 치르려고요.”
원소가 적극적으로 조조에게 조언하면서 하북의 혼란을 잠재우려 한 것은 이성휘와 서둘러 혼례를 치르기 위해서였다.
혼례.
사랑하는 사내와의 혼인.
정실(正室)의 신분으로 맺어지게 되었다.
원소는 천하제일검의 부인이 된다는 사실에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이성휘에게 들러붙었다. 고양이라도 된 것처럼 그의 어깨에 뺨을 비볐다.
“그럼 나를 계속 도와준 것은….”
“당연히 성휘와의 혼례를 앞당기기 위해서죠.”
이유 모를 선의가 가장 무서운 법이다.
눈앞에서 꼬리를 살랑대는 계집이 음탕하고 교활한 요물임을 깨닫게 되었다.
원가 년이 제일 못 믿을 년이다.
적극적으로 자신을 보좌했던 원소에게 뒤통수를 맞아버린 조조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다, 당장 황하로 보내주겠다…! 지금까지 최소한의 인정으로 엄동설한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려주려 하였거늘! 원본초, 네년을 그대로 얼음물에 처박아버리겠다!”
“어머나, 무서워라.”
비록 세력이 멸망했음에도 원소의 영향력은 태산처럼 건재했다.
지방관과 장졸들,
사대부와 호족들에 이르기까지.
여남원씨 가문에 오랫동안 충성했던 신하들은 오로지 원소를 따르고자 조조군에 투항한 것이었다.
만약 원소에게 위해가 가해진다면 어떻게 될까.
그 순간 광범위한 대란이 펼쳐질 것이었다.
“사태가 일단락되면 곧장 허도로 귀환하겠다!”
“고마워요. 여보와 오붓하게 신혼을 만끽하도록 자리를 비켜주시겠다니.”
“큭! 네년도 데려갈 거다! 황제에게 면죄를 받기 위해서라도 먼저 입조를 해야 할 테니!”
“네, 물론 그렇겠죠.”
조조는 이성휘에게 통치를 위임하고서 원소를 데리고 허도로 돌아가려 했다.
지금까지 원소는 황실과 조정을 적대하는 모습들을 보였기에 역적이나 다름없었다.
유언과 유표처럼 완전히 국적(國賊)으로 선포된 것은 아니었지만 사실상 국적인 셈이었다. 그렇기에 조조는 황궁에 입조하여 황제와 조정대신들에게 원소의 죄를 사면해줄 것을 요청하고자 하였다.
“고마워요, 맹덕.”
“은혜를 알겠으면 행동으로 보여라.”
“네. 혼례를 하루 늦춰드릴게요.”
“이런 씨발년이….”
원소가 빙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에 조조는 이를 빠득 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