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6화>
참모와 장수들이 격렬하게 반대했음에도 조조는 원소를 신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결코 배신할 리 없다.
그런 확신이 있었기에 기회를 베푼 것이었다.
또한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조조는 수많은 반대들을 물리치고서 원소의 제안을 윤허했다. 병주와 청주의 군세들을 되돌리고자 원소를 내세웠을 때처럼 위험천만한 결단을 내린 것이다.
병주자사(并州刺史) 고간을 파견했다.
계속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는 병주의 장수들을 설득하고자 태원군(太原郡)으로 보내졌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고간이 단기필마로 태원군에 도착했다.
무사히 석방되어 돌아왔다.
곽원은 병주의 장수들과 함께 고간을 맞이했다.
전쟁에서 조조군에게 붙잡혔던 고간이 멀쩡히 돌아왔다는 소식에 장수들의 사기가 치솟았다. 병주를 호령하며 수많은 세력들을 격파했던 고간은 병사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장수였기 때문이다.
“병주자사 어르신!”
“소장들을 어서 이끌어주십시오!”
강행군을 거듭하여 업성으로 진격하였으나 결국 아무런 소득도 없이 되돌아온 병주의 군세들은 몰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조조군은 기주에 발목이 붙잡힌 상황이다.
신속한 기동력을 자랑하는 조조군이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임을 간파한 곽원은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사예주(司隸州)를 침공하려 했다.
“다시 전쟁을 일으키자는 말인가.”
고간이 크게 놀라며 소리쳤다.
그에 곽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승패는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군세들을 모두 규합하여 일전을 벌인다면 조조군을 하북에서 몰아낼 수 있을 겁니다!”
사나운 오랑캐들과 혈전을 벌이면서 국경을 수비했던 장수들답게 매우 호전적이었다.
당장 원한을 갚아줘야 한다.
병주의 기병들을 총동원하여 사예주를 황폐한 쑥대밭으로 만들어야 마땅했다.
세력이 멸망하는 일생일대의 치욕을 겪었던 장수들은 크게 분기탱천하여 복수를 부르짖었다. 반드시 조조군을 몰아내겠다는 결의가 느껴졌다.
“태원도위.”
전운이 감돌았다.
당장이라도 전쟁이 벌어질 듯했다.
사태가 심상치 않았다.
고간은 침음을 삼키면서 곽원을 불러세웠다.
“주군께서 적들에게 붙잡힌 것을 잊었는가?”
목소리에 노여움이 넘쳐흘렀다.
불의(不義)이며 불충(不忠)이다.
사예주를 침공한다면 조조군은 분명 인질로 붙잡은 주군을 방패막이로 내세울 터.
그것을 알면서도 공세를 준비하는 장수들의 행동에 분노하는 것은 당연했다. 치욕을 가한 조조군에게 되갚아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감수하겠다는 극단적인 광기가 몰아치고 있었다.
“이미 주군께서는 총기를 잃으셨습니다! 적들의 의도대로 따르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제 어르신께서 저희들을 이끌어주십시오!”
업성에 당도한 군사들에게 회군을 명령하던 원소의 모습에 크게 실망한 곽원은 충성을 포기했다.
더 이상 틀렸다.
하북의 태양은 결국 저물고 말았다.
자포자기하며 되돌아온 곽원은 오로지 복수전을 계획하면서 병마들을 집결시켰다. 조조군의 천하통일을 어떻게든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주군을 외면하자는 말인가!”
고간이 대노하여 소리쳤다.
곧바로 뽑아들 것처럼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환관 년을 대적할 적수는 어르신 밖에 없습니다!”
칼부림이 벌어질 것처럼 살벌한 상황이었음에도 곽원은 고간에게 거사를 종용했다.
장수들이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사예주를 쓸어버릴 병력 또한 준비된 상태였다.
무엇을 망설이겠는가.
조조군은 눈보라가 멎어들기 전까지 업성에서 움직이지 못한다. 그 틈을 이용하여 사예주를 쓸어버리고 연주와 예주를 먹어치운다면 능히 승산이 있었다.
“어르신께서 기병군단을 호령한다면 여남원씨 가문에 충성하는 수많은 세력들이 동조할 겁니다!”
고간은 원소의 조카였으며 여남원씨 가문의 혈육이었다.
무명이 높으며 명성 또한 대단했다.
또한 병주의 장졸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거사를 일으킨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
군세들을 규합하여 거사를 주도했던 곽원은 기꺼이 고간을 대장으로 추대했다. 고간이 거사의 칼끝을 뽑아든다면 수많은 무리들이 동조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서…! 어서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조조가 천하를 통일하지 못하도록 저지해야 합니다!”
그것만큼은 용인할 수 없다.
세력을 멸망시킨 원수였다.
철천지원수가 천하를 장악하는 광경을 어떻게 두고 볼 수 있겠는가.
천하의 권력을 거머쥐게 두지 않겠다.
대의명분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로지 복수만을 위해 전쟁을 벌이려 했다.
“사방에서 조조군이 총공세를 가해올 것일세! 이미 조조가 천하의 절반을 장악했다는 것을 잊었는가!”
불가능하다.
금방 진압될 게 분명했다.
한 주(州)로 천하를 도모하겠다니.
조조군의 주력군단이 업성에 발목이 붙잡혔다고 하더라도 중원을 거머쥐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양주(凉州)와 옹주(雍州)에 조조를 따르는 군벌들이 포진하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사예주가 무기력하게 무너지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연주와 예주는 조조를 오랫동안 지지했던 지역들이었기에 끝까지 저항할 터였다. 그럼에도 안일하게 전황을 파악하는 곽원의 태도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당장 중단하게!”
“어르신!”
“유주와 청주가 조조에게 투항했네! 천하의 권력은 이제 조맹덕의 차지가 되었단 말일세!”
“어찌 어르신께서 그런 말을 하실 수 있습니까!”
고간이 승산이 없음을 지적하면서 중단을 요구하자 곽원은 길길이 날뛰는 모습을 보였다.
외적들을 무찌르면서 병주를 호령했던 효웅이 어찌 나약한 면모를 보인단 말인가. 배신감이 크게 치밀었는지 두 눈을 부릅떴다.
“주군께선 이미 조조군에 투항하셨다! 태원도위, 어서 무장을 해제하고 조조군에 투항하라!”
고간이 칼자루를 뽑아들었다.
스릉-.
날카로운 칼끝을 곽원에게 겨눴다.
그에 곽원이 얼굴일 일그러뜨리면서 소리쳤다.
“약해빠진 졸장부 같으니라고! 환관 년에게 머리를 조아릴 셈인가! 설령 목이 달아나더라도 대업을 짓밟은 환관 년에게 머리를 숙이진 않겠다!!”
두 번 다시 치욕을 당할 순 없다.
차라리 죽음을 맞이하겠다.
날카로운 칼끝이 목덜미를 위협했음에도 곽원은 주먹을 거머쥐면서 완강하게 버텼다.
“어르신!”
“괜찮으십니까!”
칼끝을 두고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었을 때,
장수들이 몰려들었다.
굉음을 듣고 달려온 것이리라.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이었던 곽원이 얼굴을 펴면서 고간을 노려보았다.
결국 조조군에게 투항한 주군처럼 패배를 순응하려는 졸장부는 병주자사가 아니다. 곽원은 고간을 쫓아내고 스스로 병주자사가 되고자 했다.
“태원도위 곽원을 체포하라!”
고간이 소리쳤다.
그 순간,
장수들이 검을 뽑아들면서 곽원을 위협했다.
“이, 이게 무슨 짓이냐!!”
어째서 배신자의 명령을 받든단 말인가!
곽원은 소스라치게 경악하는 반응을 보이면서 고간에게 가담한 장수들을 바라보았다.
대체 왜…!
두 눈에 경악이 역력했다.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이 고간에게 가담한 장수들의 행동은 전혀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사예주를 침공하여 천하를 뒤흔들려 했던 곽원의 거사는 허무하게 흔들렸다.
“우리들은 병주자사를 따를 뿐이오!”
“다 끝났네…! 태원도위, 이미 대세는 정해졌네!”
칼끝을 겨눈 장수들이 소리쳤다.
승패는 정해졌다.
이제 전황을 뒤집는 것은 불가능했다.
곽원에게 동조하면서도 불리한 전황을 숙지하고 있었던 장수들은 고간에게 곧바로 돌아섰다. 결국 조조군이 난세의 승리자임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 * *
원소에게 부인의 지위를 허락했다.
그 말은 곧,
부인의 지위를 ‘양도’했다는 셈이 아닐까.
바람기에 질려버린 아내가 이혼을 선언할까 두려웠던 이성휘는 아연실색하는 반응을 보이면서 조조에게 달려갔다.
“죄송합니다…!”
“성휘?”
“제발 이혼만큼은 물려주십시오! 제가 앞으로 더욱 열심히 보필하도록 하겠습니다.”
“……?”
대체 무슨 말이지.
영문을 모르겠다.
다짜고짜 달려와 이혼을 물려달라니….
업무에 매진하던 조조는 눈을 끔벅이면서 허둥지둥하는 모습을 보이는 남편을 주시했다. 항상 철두철미한 면모를 일관하는 남편답지 않게 반푼이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럼 저와 재혼하면 되죠♡”
금발을 늘어뜨린 여인이 싱글벙글 웃으면서 이성휘를 뒤에서 폭 껴안았다.
달콤한 체취.
등을 포근하게 감싸는 풍만한 젖가슴.
아찔할 정도로 야릇한 속삭임이 이성을 위협했다.
“여보의 아이라면 몇 명이든 낳아드릴게요. 여남원씨 가문을 함께 번창시키도록 해요. 천하의 무인들을 제패했던 천하제일검이라면 분명 여남원씨 가문의 훌륭한 종마(種馬)가 될 테니까.”
사내의 어깨에 손을 둘렀다.
고개를 숙이면서 사내의 귓가에 속삭였다.
수박처럼 커다란 젖가슴을 등에 문지르면서 여남원씨 가문의 종마가 될 것을 종용했다.
버티기 어려운 유혹이었다.
마치 사악한 음마(淫魔)가 속삭이는 듯했다.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유혹을 버텨내던 이성휘는 묵묵히 칼자루를 거머쥐기 시작하는 아내를 바라보면서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아아.
아아아….
식은땀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천하를 양분했던 여장부들의 기싸움에 갇혀버린 이성휘는 마른침을 삼키면서 바닥에 엎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