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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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담에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남편을 호시탐탐 노리는 뻔뻔한 태도를 보였다.
빌어먹을.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다니.
체면과 함께 최소한의 양심마저 내려놓은 것인가.
어물전을 힐끗힐끗 쳐다보면서 기회를 엿보는 도둑고양이처럼 교활하기 짝이 없다. 당당히 남편의 옆을 차지하려는 뻔뻔함에 분노를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주군은 어찌 얼토당토않은 부탁을 덥석 들어주셨는지….”
곽가가 조심스럽게 운을 떼면서 물었다.
정실(正室).
놀랍게도 부인의 지위를 요구했다.
과연 하북을 제패했던 패자에게 어울리는 위풍당당한 면모였다.
질투의 화신으로부터 첩의 지위를 인정받는 것만으로도 하늘의 별 따기처럼 험준하거늘…. 어떻게 감히 정실부인에게 정실의 지위를 요구한단 말인가.
분명 거친 광풍이 몰아닥칠 터.
곽가는 오들오들 떨면서 뒤이어 들이닥칠 후폭풍을 두려워했다.
“최대한 빨리… 천하통일을 달성하기 위해서다. 맹탁의 부탁이기도 하고. 달리 방도가 없었다.”
조조는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있었다.
천하통일의 대업.
오랜 벗이 마지막으로 남긴 유지.
그것들을 동시에 달성할 방법은 이것뿐이다.
멸망을 체념하고서 몰락을 받아들였던 원소가 유일하게 요구했던 것이 바로 이성휘였다. 대업에 동참하는 조건으로 당당히 정실의 자리를 요구했다.
참혹한 유혈사태를 저지하고자 어떻게든 원소의 협력을 얻어내야 했던 조조는 이를 빠득 갈면서 불편한 심정을 드러내면서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설마 뻔뻔하게 정실을 요구하다니…! 세력이 멸망하면서 머리가 돌아버린 게 아닌가!”
흑발을 늘어뜨린 여인이 질투를 씩씩 토해냈다.
정실.
감히 정실을 요구하다니.
제 형부를 몰래 따먹었던 동생들조차도 언감생심하지 못한 지위가 아니던가.
첩(妾)이 아닌 처(妻)가 되겠다.
천하를 거머쥐겠다는 웅대한 야심을 안타깝게 포기한 군주는 이성휘의 정실부인이 되겠다는 제2의 야심을 조조에게 선언했다.
“봉효, 네 생각은 어떤가!”
“네?!”
노기로 얼굴을 일그러뜨린 조조가 물었다.
질투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그에 곽가는 아연실색하는 반응을 보였다.
지금까지 대장군의 처첩들을 받아들였던 것처럼 그냥 체념하라는 대답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했다간 현장에서 곧바로 목이 달아날 터.
그렇기에 곽가는 함부로 대답할 수 없었다.
‘히이익! 하야하고 싶어! 은퇴하고 싶어! 흐아앙, 아빠아…! 엄마아…!!’
조조의 질투 짬처리 쓰레기통.
언제부터 참모가 이런 업무까지 맡았단 말인가.
뇌리가 백색으로 번졌다.
오랜만에 위에서 통증이 몰려들었다.
조조군에 어떻게든 임관하고자 스스로 받아들인 결과였다. 수많은 사내들과 연애를 즐겼다며 감히 떠벌린 것에 대한 인과응보나 다름없었다.
“무, 물론… 주군의 말씀이 맞습니다!”
품속에 항상 넣어둔 사직서.
하지만 지금은 사직서를 꺼낼 때가 아니다.
곽가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면서 주군의 의견에 동참했다.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질투의 화신이 되어버린 주군의 심기를 건드리면 무간지옥을 온몸으로 경험하게 될 테니.
“어떻게 감히 유일무이한 정실의 반열을 넘본단 말입니까…. 분명 이치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흐음.”
실로 필사적인 아첨이었다.
그에 조조는 무거운 침음을 흘렸다.
정실이 되고자 한다.
실로 천인공노할 탐욕이었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이성휘에게 담아두었던 감정을 간직하고 있는 원소의 모습에 조조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주군.”
조조의 고민이 계속 깊어지고 있었을 때,
거구의 사내가 다가왔다.
무위중랑장(武衛中郞將) 허저였다.
“선비인지 신비인지… 처음 듣는 샌님이 감히 주군에게 알현을 요청한 모양입니다.”
미련한 곰처럼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말했다.
이름을 그새 까먹은 듯하다.
과연 용맹과 무식함이 평행선을 이루는 장수였다.
“큭! 이름도 제대로 기억 못하는 건가! 참으로 덜떨어진 호위장이로군!”
“히잉.”
주군의 불호령에 허저가 시무룩한 표정을 보였다.
후우….
곽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질투 짬처리 쓰레기통이었던 호위장에게 화살이 향해졌기 때문이다. 미련함 곰이 혼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동병상련의 고통을 느끼면서도 이기적인 안도감을 만끽했다.
* * *
원소군의 몰락에 일조했던 곽도와 신평은 공방전이 조조군의 승리로 종결되었음에도 돌아오지 못했다.
청주자사(青州刺史) 곽도.
의랑(議郞) 신평.
감옥에 수감된 죄수들은 조조군의 파상공세에 업성이 함락되기 직전에 목숨을 잃었다.
교활한 간신들은 분명히 조조에게 빌붙어서 주군을 시해하려 들 것이었다. 그것을 경계한 정로장군 국의는 후환을 끊어내고자 곽도와 신평을 척살했다.
“정로장군 국의의 수급을 성문에 내걸어 제 형님의 억울함을 달래주십시오, 승상!”
국의의 부하들에게 살해당한 형님의 명예를 회복하고자 병조종사(兵曹從事) 신비가 조조에게 찾아왔다.
형님께서 비참하게 죽었다.
신비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국의에게 부관참시를 내려달라며 호소했다.
“신평이라면 분명… 허유와 내통했던 졸개로군.”
조조가 턱을 괴고서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평.
허유와 작당했던 놈이었다.
거짓 정보에 놀아나 업성을 혼란에 빠트렸다.
이성휘의 기만책에 훌륭하게 넘어간 무능한 간신이 아니던가. 그로 인해 부화뇌동한 원소군은 섣불리 오환족 군세들을 끌어들였다가 대패를 당했다.
“듣지 않는 것으로 하겠다. 물러가라.”
“하, 하지만 승상…!”
“네 형이 기만책에 훌륭하게 넘어간 덕분에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으니 너희 가문에게 여죄를 묻진 않겠다.”
“제발 국의를 처벌해주십시오! 승상!”
신비가 읍소하며 부르짖었다.
하지만 조조는 한없이 완강하기만 했다.
호위병들이 달려들었다.
이윽고 바닥에 엎드렸던 신비를 끌고나갔다.
필사적으로 몸을 웅크렸던 신비였지만 기골이 장대한 호위병들의 힘을 버텨낼 순 없었는지 무력한 모습을 보였다.
“의기를 높게 평가하여 속관으로 삼겠다. 물러나서 대기하고 있으라.”
형 신평과는 달리 신비는 강직한 선비로서 많은 명망을 쌓은 인물이었다.
이대로 내치긴 아깝다.
그렇게 판단한 조조는 신비를 의랑에 임명했다.
지금은 무엇보다 사대부와 호족들을 아군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급선무였기에 관용을 베풀었다. 만약 그러한 이유가 없었다면 당장에 목을 베어버렸을 테지.
“간신들이 멀쩡히 살아있었다면 원소를 참소하면서 모략을 일삼았을 테지. 충심을 보이겠다며 병력을 이끌고 관저를 습격했던 놈들처럼.”
눈살을 찌푸리면서 모멸감을 내비쳤다.
더러운 놈들.
간악하기 짝이 없는 배신자들이었다.
뱃속에 욕심만 그득했던 버러지들을 끝까지 이끌었던 원소가 한없이 미련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니 내게 진 거다, 본초.”
패배의 원흉이나 다름없음에도 끝까지 곽도와 신평을 죽이지 않았다.
실로 안일한 결정이었다.
본인이었다면 즉시 목을 베어버렸을 것을.
조조는 원소의 우유부단한 면모 덕분에 건곤일척의 결전에서 승전을 거뒀음에도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간신들의 무능과 배신으로 인해 몰락한 오랜 벗이 안타까웠기 때문이리라.
* * *
비록 원수처럼 싸웠던 험악한 적대관계였음에도 전장에서 전사한 적장들의 장례를 후하게 치러주었다.
분무장군(奮武將軍) 저수.
정로장군(征虜將軍) 국의. 치중종사(治中從事) 심배.
원소를 보필하면서 하북을 호령했던 거두들이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 주군을 지키고자 사력을 다했던 인물들에게 예우를 갖추었다.
하북의 민심을 위해서였다.
또한 원소를 배려한 행동이기도 했다.
몰락한 군주가 되어버린 여인은 충성스러운 장수들의 장례에 참석하여 넋을 달래주었다.
“…괜찮으십니까.”
상복을 입은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성휘가 그녀를 맞이하면서 손수건을 내밀었다.
분명 눈물을 흘리면서 부하들의 희생을 슬퍼할 터.
그것을 예견했던 이성휘는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낼 수 있도록 손수건을 미리 준비했다.
“고마워요, 장례를 치를 수 있게 도와줘서.”
“당연히 지켜야 할 본분입니다.”
원소가 감사를 표시했다.
그에 이성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휘는… 저들이 밉지 않은가요? 전장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적이었잖아요. 그 과정에서 수많은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천하의 권력을 거머쥐고자 수많은 장졸들이 차디찬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무려 수만 명이다.
어마어마한 목숨들이 전쟁에 희생되었다.
그로 인한 증오와 분노가 대단할 터.
자욱하게 뒤덮은 시산혈해만큼 지독한 증오가 마음속에서 몰아치고 있으리라. 그럼에도 많은 인정을 베푸는 이성휘의 모습에 원소는 의아함을 내비쳤다.
“물론 그렇습니다만…, 저들은 주군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쳤던 충신이었습니다.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싸웠던 절개와 충절을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성휘가 가슴에 손을 얹으면서 예를 취했다.
하북의 충신들을 위해.
불꽃처럼 맹렬했던 절개와 충절에 경의를 표했다.
망자들이 편안하게 안식을 취할 수 있도록 계속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자신이 뻔뻔하게 모습을 드러내면 필시 망자들은 두 눈을 감지 못할 테니.
“성휘.”
“예, 본초.”
상복을 입은 여인이 발걸음을 멈췄다.
이윽고 고개를 돌려 뒤따르던 사내를 응시했다.
“그대들에게 협조하는 조건으로… 맹덕에게 무엇을 요구했는지 궁금하지 않은가요?”
“…….”
모르겠다.
과연 무슨 약속을 맺었는지.
하북을 양도하는 조건으로 맺은 약조.
이성휘는 침묵을 머금으면서 원소의 대답을 잠자코 기다렸다.
“당신의 부인이 되고 싶다고 말했어요.”
“…예?”
경악. 당혹. 의아.
여러 감정들이 무뚝뚝하던 얼굴에 드러났다.
원소의 대답에 이성휘는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무슨 말이지.
똑똑히 들었음에도 이해하기 어렵다.
혼란과 동요가 몰아치면서 뇌리를 어지럽혔기에 이성휘는 그대로 평정심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내일부터… 여보라고 불러도 될까요?”
“…….”
금발을 늘어뜨린 여인이 얼굴을 붉히면서 사랑스럽게 속삭였다.
여보.
참으로 가슴 뛰는 호칭이다.
그리고 가슴이 철렁이는 호칭이기도 했다.
오랫동안 간직해온 연심을 꺼내면서 고백을 속삭이는 여인은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지금 이성휘는 어느 때보다도 혼란한 상태였기에 고백에 대한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럼 아만이… 이혼을, 결정한 겁니까.”
“네?”
약조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바람둥이 남편과 이혼하겠다는 뜻이 아닐까.
이런 파국이 찾아오다니.
천하의 바람둥이는 아연실색하는 반응을 보였다.
정실은 오직 한 명이다.
그렇기에 본처(本妻), 혹은 정처(正妻)인 것이었다.
이성휘는 원소의 대답에 털뭉치처럼 어지럽게 얽힌 오해를 해버리고 말았다.
“지금까지 짐작하고는 있었습니다만… 설마 갑작스럽게 이혼을 결정할 줄은 몰랐습니다. 지금까지 숱한 염문으로 여러 불상사들을 끼쳤으니까요. 갑작스럽게 이혼을 결정하신 것도 이해는 됩니다. 하지만 저희들에겐 아이들이 있는데…!”
과연 바람둥이에게 어울리는 고뇌였다.
평소에 떳떳하고 번듯한 면모를 보였다면 고민하는 일도 없었겠지.
이성휘가 침울한 목소리를 이어나갔다.
그 모습을 원소는 잠자코 바라보기만 했다.
첩첩산중처럼 짙어든 오해를 이대로 풀어내기엔 이성휘의 모습에 너무 재밌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