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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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소군이 공세를 준비했다.
태원도위(太原都尉) 곽원의 독단 때문이었다.
분명 조조군은 크게 지쳤을 터.
어찌 하늘께서 내려주신 기회를 놓치겠는가.
업성에 주둔하는 조조군을 대파하여 위기에 봉착한 세력을 구원하겠다. 웅장한 포부를 품은 곽원은 병주의 기병군단을 앞세우면서 군세들을 지휘했다.
“제장들은 명심하라! 이것은 중원의 더러운 침략자들로부터 하북을 구원하기 위한 전쟁이다!!”
날카로운 칼끝을 높게 치켜들면서 장졸들의 사기를 끌어올렸다.
풍전등화의 위기에 봉착한 세력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강행군을 거듭했던 장졸들은 분기탱천하여 곽원의 명령에 복종했다.
주군을 구해야 한다.
우리들의 어깨에 하북의 명운이 달려있다.
장졸들은 병장기를 굳게 거머쥐면서 바람에 펄럭이는 조조군의 군기를 노려보았다.
“태원도위를 따르라!”
“조조군 놈들을 모조리 몰아내야 한다!”
침략자들을 몰아내자.
곽원의 호령에 수많은 장수들이 칼자루를 뽑아들었다.
청주별가(青州別駕) 왕수가 강경하게 반대했다.
그럼에도 수많은 장수들이 곽원을 따랐다.
업성이 함락되며 세력이 멸망했다.
주군께서는 분명 조조군의 강압에 굴복하여 명령서를 보내신 것이 틀림없었다.
오히려 장수들은 조조군에게 억류된 주군을 구출해야 한다며 분기를 불태웠다. 하북의 충성스러운 장수로서 어찌 물러설 수 있겠는가.
“고각을 높여라!”
“놈들이 나오고 있다! 전투태세를 갖춰라!!”
분기탱천한 군세들을 이끌고 업성으로 진격하자 조조군이 대응하듯 모습을 드러냈다.
드디어 놈들이 응전을 선택했다.
곽원은 호승심에 불타는 모습을 보이면서 칼자루를 뽑아들었다. 오합지졸이나 다름없는 군세들을 격파하고 우두머리를 참살하겠다며 호언장담했다.
“크흠….”
무분별하게 날뛰는 장수들의 모습에 왕수는 우려를 보내면서도 전투에 참전하여 병력을 이끌었다.
결국 전투가 벌어졌다.
군세들을 지휘하는 대장으로서 물러설 순 없었기에 곽원의 옆에서 전황을 지켜보았다.
“조조군 놈들!”
“우리들의 손으로 주군을 구해내자!!”
마침내 업성에서 출격한 조조군의 선봉이 지척까지 접근했다.
적들의 움직임을 파악한 병주의 기병들은 돌격대형을 형성하면서 곽원의 명령을 기다렸다. 고조된 긴장감이 온몸을 파고들면서 호승심을 부추기는 듯했다.
“전쟁을 멈추라!”
기병들이 돌격을 준비하고 있었을 때,
화려한 갑옷을 걸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황금처럼 찬연한 금발.
굳은 의지가 느껴지는 붉은 눈동자.
백옥처럼 섬세한 이목구비와 유려하게 물든 용모.
조조군의 선두에서 모습을 드러낸 여인은 놀랍게도 하북의 패자인 원소였다.
“주군!”
“아니, 주군께서 어찌…!”
돌격만을 앞둔 병주의 기병들이 기절초풍하는 반응을 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주군이시다!
틀림없는 우리들의 주인이었다.
소스라치게 경악하는 기병들의 노골적인 변화를 알아차렸는지 곳곳에서 말 울음소리가 울렸다.
-히잉!
-히이이잉!!
말들이 머리를 돌렸다.
사납게 울음을 토해내면서 몸을 흔들어댔다.
원소의 등장으로 분기탱천했던 군세들의 사기가 위태롭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병장기를 거둬라! 말머리를 돌려라! 결전은 조조군의 승리로 끝났다! 무의미하게 피를 흘리지 말라!!”
고결한 대의와 위풍당당한 위상으로 하북을 호령했던 군주가 우렁찬 목소리로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회군을 명령했다.
지엄한 목소리로 부하들을 꾸짖었다.
스스로 사지로 뛰어들려는 장수들의 호전적인 용렬함을 지적했다. 또한 전투를 속행한다면 수많은 희생들이 뒤따를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어찌 그런 말씀을….”
“설마 주군께서 조조군에 투항하신 것인가!”
전열이 흔들렸다.
동요와 혼란이 점점 가속화되었다.
선두에서 아름다운 주군의 모습을 지켜보던 장졸들이 웅성대면서 혼란과 두려움을 확산시켰다.
곽원과 왕수 또한 마찬가지였다.
위대한 하북의 태양께서 장졸들에게 회군을 종용하는 상황에 혼비백산하며 온몸을 떨었다.
“주, 주군!”
“분명 주군일세! 주군이 틀림없네!!”
어찌하여 주군께서 조조군의 선봉에 가세하여 우리들에게 회군을 종용한단 말인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도저히 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원소의 등장으로 수만의 군세들이 동요하면서 전의를 상실했다. 주군을 향한 절대적인 충성심으로 무장한 장졸들이었기에 파급력이 예상을 뛰어넘었다.
“조조군이 주군을 겁박하고 있는 것이외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주군께서 우리들에게 회군을 명령하시겠소?! 간악한 놈들…! 감히 주군에게 저런 치욕을 가하다니!!”
곽원이 두 눈을 부릅뜨며 칼끝을 겨눴다.
당장이라도 장수들에게 공격을 명령할 것처럼 비분강개하는 곽원의 모습에 왕수가 대경실색하며 공세를 가로막았다.
“적들의 선두에 주군께서 계시오! 지금 태원도위는 주군을 공격하잔 말인가!”
“내가 그럴 리 있겠소!”
“공격을 명령했다간 틀림없이 주군께서도 휘말리게 될 거요! 주군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지금은 말머리를 돌려야 하오!”
“큭…! 이런 빌어먹을! 간악무도한 조조군을 쓸어버릴 기회를 허무하게 포기하란 말인가!”
왕수의 제지에 곽원이 분통을 터트리면서 조조군을 노려보았다.
적들은 크게 지친 상태였다.
연이은 악전고투로 기력을 소진한 상태였다.
이길 수 있다.
하북을 침략한 적들을 완파할 수 있다.
그러나 천재일우의 기회가 들어왔음에도 결코 공세를 명령하지 못했다. 적들에게 붙잡힌 주군께서 장졸들에게 회군을 명령했기 때문이었다.
“그대들의 주군으로서 명령한다! 당장 전투를 단념하고 회군하라! 기주의 풍요로운 벌판을 그대들의 피로 물들일 순 없다. 전투는 끝났다. 장졸들은 즉각 회군하여 나의 부름을 기다리도록 하라!”
원소가 재차 강경한 어조로 외쳤다.
진심이 담긴 목소리였다.
장졸들의 무익한 희생을 우려하고 있었다.
선두에서 원소의 모습을 지켜보던 기병들은 병장기를 내리고서 뒤로 물러섰다. 적들의 선봉에서 회군을 명령하는 주군의 목소리에 전의를 상실한 것이었다.
“…퇴각하셔야 하오.”
“젠장!”
왕수가 재차 말했다.
그에 곽원은 욕설을 토해내면서 말머리를 돌렸다.
이미 틀렸다.
장졸들이 크게 동요하고 있지 않은가.
분기탱천하던 사기가 단숨에 곤두박질쳤다.
조조군과 일전을 치르더라도 장졸들은 계속 동요를 이어나갈 터. 비관적인 결과를 예측한 곽원은 분기를 억누르면서 퇴각을 명령할 수밖에 없었다.
“퇴각하라!”
“모두 퇴각하라!!”
무관들이 퇴각을 부르짖으면서 말머리를 돌렸다.
어찌할 방도가 없다.
이미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다.
위대한 주군께서 적의 인질이 되지 않으셨는가.
주군이 참화에 휘말릴까 우려한 충성스러운 장졸들은 강행군을 거듭하면서 위군에 도달했음에도 일말의 망설임 없이 물러섰다.
“…미안해요.”
병주와 청주의 지원군이 물러서고 있다.
오로지 충성을 다하겠다는 각오로 엄동설한의 추위를 뚫고 달려왔던 강병들이 말머리를 돌렸다.
장졸들의 충직한 모습을 목격한 원소는 애처로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사죄했다.
“정말 미안해요.”
충성을 꺾었다.
각오와 노력을 외면해버리고 말았다.
두 눈을 바르르 떨면서 슬픔을 담아냈다.
장졸들의 희생을 저지하고자 고단한 결단을 내렸던 원소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비통함을 느꼈다.
‘그대들은 이제 나를 하북을 배신한 군주라고 여기겠죠. 하지만 괜찮아요. 그대들을 다시 고향으로 돌려보낼 수만 있다면… 기꺼이 오명을 받아들이겠어요.’
주먹을 거머쥐면서 결연한 각오를 다졌다.
암군이 되더라도 상관없다.
무자비한 참변을 저지할 수만 있다면.
말머리를 돌려 퇴각하는 장졸들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지켜보던 원소는 비참한 슬픔을 억눌렀다.
“무리를 하게 만들어…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제가 부탁한 일인 걸요.”
이성휘가 다가왔다.
그의 사과에 원소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울음을 터트리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그의 품에 안기고 싶었다.
하지만 수많은 장졸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어리광을 부릴 순 없었다. 더 이상 세력을 이끄는 군주가 아니었음에도 완전무결한 모습을 연기했던 버릇이 그대로 잔존했기 때문이다.
“부디 저한테는 속내를 드러내셔도 됩니다.”
하지만 꿋꿋한 모습을 연기했음에도 이성휘의 직감을 속이진 못했다.
훤히 내심을 헤아리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성휘는 슬픔에 빠진 여인을 위로하면서 손을 내밀었다.
“정말… 성휘만큼은 못 속이겠네요. 처첩들을 여럿 두고 있는 난봉꾼답게 여심에 능숙하시군요. 설마 이렇게 빈틈을 노리다니.”
“예? 그, 그런 게 아닙니다.”
원소의 짓궂은 농담에 이성휘는 당혹감으로 가득한 반응을 보이면서 말을 더듬었다.
푸훗-.
그 모습에 웃음을 터트렸다.
어린아이처럼 허둥대는 모습에 무심코 실소가 튀어나오고 말았다.
“후후, 농담이에요.”
부드러운 실소를 머금은 원소가 이성휘에게 초승달처럼 간드러지는 눈웃음을 흘렸다.
예쁘고 애교가 넘치는,
사내를 유혹하는 요염함이 넘쳐났다.
어수룩한 사내에게 손을 내밀었다.
슬픔에 빠져버린 여인을 어서 위로해달라는 앙큼한 속내가 담긴 행동이었다.
“해야 될 일들이 많아요. 저를 수행해주세요.”
“물론입니다.”
이성휘가 대답하면서 원소가 뻗은 손을 맞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