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2화>
===========================
업성이 함락되었다.
결국 주군께서 적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너무 늦어버렸다.
강행군을 거듭하면서 업성으로 달려온 병주와 청주의 군세들은 치욕스러운 통한을 토해냈다.
“업성이 무너지다니!”
“제장들은 대체 뭘 했단 말인가!”
병주(并州)의 태원도위(太原都尉) 곽원.
청주(青州)의 청주별가(青州別駕) 왕수.
업성을 구원하고자 수만의 군세들을 이끌고 당도한 곽원과 왕수는 허탈감에 찬 비명을 쏟아냈다.
바로 어젯밤에 업성이 함락되었다.
위군의 호족들로부터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서 절망감에 빠졌다.
하루만 더 빨리 왔었다면…!
엄동설한의 추위를 돌파하는 강행군을 벌였던 노력을 비웃듯이 잔혹한 현실을 맞이해야 했다.
“당장 공격하여 주군을 구출해야 하오!”
곽원이 으름장을 놓았다.
괄괄한 성격의 장수답게 정공법으로 공세를 벌이기를 원했다.
“주군과 관료들이 인질로 붙잡혔네! 무턱대고 공격을 했다간 주군께서 곤경에 처하실 걸세!”
반면에 신중한 성격이었던 왕수는 주군께서 적들의 손아귀에 붙잡히셨다며 곽원의 제안을 뿌리쳤다.
과격한 공세는 피해야 한다.
왕수는 청주의 장졸들을 동원하여 업성에 주둔하고 있는 조조군과 대치했다. 조조군이 성문을 박차고 나올 때까진 움직이지 않겠다는 심산인 것 같았다.
“업성이 함락되었다는군.”
“유주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면서?”
“젠장, 주군께서 붙잡히셨는데 무슨 방법이 있다는 말인가…!”
업성의 성루와 성벽마다 조조군의 군기들이 펄럭이고 있었다.
세력이 멸망했다.
최후의 보루가 무너지면서 기사회생의 발판마저 사라졌다.
새카맣게 그슬린 업성의 처참함을 목격한 장졸들은 대경실색을 금치 못했다. 조조군의 측면과 배후를 공격하여 역전을 이뤄내겠다는 작전은 업성의 함락으로 시도조차 되지 못한 채 끝나버렸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곽원이 이를 빠득 갈았다.
병주자사 고간이 적들에게 포로로 붙잡혔다는 소식에 이어 주군마저 붙잡혔다.
이제 다 틀렸다.
무슨 방법으로 난황을 타개한단 말인가.
만시지탄(晩時之歎).
시기가 늦어 기화를 놓쳤음을 한탄한다.
이것이 바로 만시지탄의 비참함이 아니겠는가.
하북을 제패했던 세력이 한순간에 멸망하게 되었음에 분통을 터트렸다. 다른 장수들도 마찬가지였다. 통한을 쏟아내면서 세력을 무너트린 조조군을 노려보았다.
“태원도위!”
전방을 정찰하던 무관이 달려왔다.
“주군께서 보내신 서한이 도착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적들에게 포로로 붙잡히신 주군께서 어떻게 서한을 보낸단 말인가.
의아함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무관이 서한을 내밀었다.
분명 주군께서 친필로 작성하신 명령서였다.
서로를 바라보면서 당혹감을 공유하던 곽원과 왕수는 봉투에서 서한을 꺼냈다.
“…주군께서 적들에게 항복하셨다고 하오!”
원소는 병주와 청주의 장졸들에게 친필서한을 보내어 부임지로 철군하도록 명령했다.
업성이 함락되고 세력이 멸망했다.
조조군과 일전을 치르더라도 결정된 승패를 뒤집는 것은 불가능하리라.
무익한 희생을 용납지 않겠다.
장졸들이 비참하게 희생되는 것을 어떻게든 저지하고자 명령서를 통해 장수들에게 엄명을 내렸다.
“분명 조조군의 강압에 못 이겨 명령서를 작성하신 것이 틀림없소!”
곽원이 주먹을 거머쥐면서 소리쳤다.
교활한 농간이 분명하다.
아군의 사기를 꺾으려는 계략이 틀림없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업성을 공격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분명 적들은 치열한 공방전을 치르느라 기력을 대부분 소진했을 것이니 지금이 적기였다.
“불가하오! 주군께서 적들에게 포로로 붙잡혀 계시다고 하지 않소!”
왕수는 저돌적인 방식으로 난관을 돌파하려는 곽원을 꾸짖으면서 과격함을 지적했다.
“그럼 이대로 돌아서잔 말인가! 그것이야말로 조조군이 바라는 대로가 아니오!”
지원군으로 가세한 병주의 청주의 장수들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공격하느냐.
아니면 물러서느냐.
잔혹한 결과에 이어 위험천만한 양자택일을 앞두게 되자 원소군은 크게 동요하면서 소요에 빠져들었다.
* * *
조건부 협력으로 조조에게 가담한 원소는 사대부와 호족들을 설득하면서 혼란을 진정시켰다.
여남원씨 세력은 멸망했다.
이제 조조군의 통치를 받아들이도록 하라.
하북의 패자가 조조군에 투항했다는 사실에 알려지자 수많은 사대부와 호족들이 귀순을 결정했다. 모두 원소를 적극적으로 따르던 무리들이었다.
“따르겠습니다!”
“본초 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의지하면서 따랐던 세력이 멸망했음을 받아들인 사대부와 호족들은 읍소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위대한 대업을 무너트린 조조군에게 적개심을 표출하면서도 결코 주군의 뜻에 반항하지 않았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이성휘가 우려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무리하는 것은 아닐까.
분명 부담감이 강하게 짓누르고 있을 터였다.
사대부와 호족들을 설득하여 참화를 막으려는 원소의 행동에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쓰러운 마음이 물결처럼 밀려들었다.
“괜찮아요. 덧없는 희생을 막기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이 무리를 해야죠.”
엄동설한의 설원에 시체들이 계속 쌓여가는 광기를 이제는 멈춰야 했다.
전쟁을 끝내야 한다.
싸움이 되풀이되는 것을 막아야 했다.
그렇기에 원소는 조조군에게 가담하여 귀순을 종용하는 치욕을 받아들였다. 분명 마음을 짓누르는 중압감을 느끼고 있을 텐데도 원소는 결코 내색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성휘는 잘못한 거 없어요. 맹덕을 위해 싸웠을 뿐이잖아요.”
이성휘가 정중하게 사과했다.
그에 원소는 옅은 미소를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당신도, 나도…. 이미 예상하고 있었잖아요.”
“…….”
비극으로 마주하게 될 운명.
극명하게 엇갈린 입장에서 마주하리라는 것을 당연히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슬펐다.
이성휘는 고개를 숙이면서 숙연함을 곱씹었다.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겉옷을 벗어 원소의 어깨를 덮어주었다.
자상한 배려에 원소가 웃음을 흘렸다.
“고마워요, 성휘. 당신은 항상 나를 지켜주는군요.”
그는 변하지 않았다.
급박하게 격변하는 난세에도 본인의 의지를 끝까지 관철했다.
지켜드리겠습니다.
이성휘의 말 한마디에 얼굴이 붉어졌다.
목숨을 위협하는 흉수들로부터 끝까지 자신을 지켜주었던 이성휘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대장군!”
원소와 이성휘가 발걸음을 움직이면서 다음 장소로 향하려 했을 때,
학맹이 다급하게 달려왔다.
이성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원소의 눈치를 살피던 학맹이 입을 열었다.
“병주와 청주에서 당도한 군세들이 당장 공격을 가해올 것처럼 전투태세를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전투를 결심했단 말인가.”
분명 회군을 명령하는 원소의 친필서한을 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원소군은 전쟁을 결정했다.
결국 전투가 벌어진다면 수많은 사상자들이 발생할 터. 절체절명의 상황을 직감한 이성휘는 원소군을 요격하기 위해 장수들과 출진하려 했다.
“성휘!”
“본초는 여기 계십시오.”
원소가 절박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불렀다.
그에 이성휘는 그녀를 제지했다.
“저도 참전하겠어요.”
“…예?”
부하들을 토벌하는 전투에 참전하겠다는 원소의 발언에 이성휘는 의아함을 느껴야 했다. 옆에서 대화를 경청하던 학맹도 마찬가지였다.
함께 참전하겠다니….
그렇다면 토벌에 가세하겠다는 뜻인가.
얼토당토않은 말이었다.
분명 본인도 그것을 잘 알고 있을 터.
“어떻게든 제가 막겠어요.”
그럼에도 원소는 결연함이 느껴지는 시선으로 이성휘를 바라보면서 호언했다.
병주와 청주의 장수들이 조조군에게 인질로 붙잡힌 주군의 안위를 무시하고 전투를 결심했음에도 원소는 유혈사태를 막겠다는 의지를 꺾지 않았다.
후우….
이성휘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붉은 눈동자가 맹렬한 의지로 번뜩이고 있었다.
조조와 똑같은 눈빛이었다.
분명 절대로 고집을 꺾지 않겠지.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결국 이성휘는 원소의 간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 * *
장수들의 결사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성휘는 끝내 원소와 함께 출진했다.
분명 업성에서 탈출하려는 속셈이라며 수많은 반대들이 있었음에도 조조는 원소와 이성휘를 허락해주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신 건지….
조조군 장수들은 혼란을 토로하면서도 이성휘와 함께 선두에 나선 원소를 경계했다.
“걱정 마십시오.”
“만약 도망치려고 한다면 기병들과 함께 배후를 추격하여 붙잡겠습니다!”
원소가 나서자 장수들이 경계태세를 갖췄다.
불신 가득한 눈길로 원소를 노려보았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선두에 나선 이성휘가 물었다.
긴장감이 섞인 물음이었다.
이성휘의 물음에 원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저들을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은 저뿐이에요.”
그렇게 말한 원소는 말에 박차를 가하면서 점점 앞으로 나아갔다.
원소의 옆을 이성휘가 지켰다.
또한 무예가 출중한 정예병들이 호위에 가세하면서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