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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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말해야 할까.
그녀의 꿈을 짓밟았다.
그녀의 오랜 염원마저 불태웠다.
그녀를 따르던 부하들을 모두 처참하게 살해했다.
분명 나를 진심으로 원망하고 있겠지.
화기애애하게 담소를 나누었던 과거로는 결코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른다. 평생 나를 원망하면서 저주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테니.
옥좌에 앉은 여인에게 다가서던 이성휘는 딱딱하게 경직된 표정을 지으면서 발걸음을 멈췄다.
“모시러… 왔습니다.”
무거운 입을 열었다.
양심의 가책을 억누르면서 말을 건넸다.
“저를 말인가요?”
몰락한 군주가 물었다.
비참한 슬픔으로 가득한 목소리였다.
일장춘몽(一場春夢).
한바탕의 봄 꿈처럼 모든 것들이 덧없이 사라졌다.
견고하게 쌓아올린 권력과 대업에 동참했던 부하들을 한순간에 잃었다. 원소는 위태롭게 느껴질 정도로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성휘, 국의는… 어떻게 되었나요?”
원소가 물었다.
전풍과 같은 물음이었다.
“격전에서 전사했습니다.”
“…….”
수많은 칼끝들이 사방에서 목숨을 위협했음에도 용맹하게 달려들어 책무를 완수했다.
자웅을 겨뤘던 적이다.
하지만 그의 충성과 용맹은 찬사를 받아 마땅했다.
이성휘는 마지막까지 주군에게 충성했던 장수의 장렬한 최후를 전해주었다.
“결국 저를 지키려다가… 목숨을 잃었군요. 장렬하게 전사한 다른 장수들처럼. 홀로 외롭게 남겨두고서 모두 떠나버렸어요.”
새하얗게 타버린 잿더미를 연상하는 회한만이 그녀의 얼굴에 가득했다.
슬픔과 고독.
좌절과 허망함이 쓰라리게 느껴졌다.
“…….”
이성휘는 침묵을 이어나갔다.
위로를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슬픔을 달래줄 수도 없었다.
어떤 말로 그녀의 슬픔을 다독여줄 수 있을까.
슬픔과 고독으로 빠트린 원흉이 바로 자신이었기에 그녀에게 선뜻 다가서지 못했다.
“성휘, 제가 틀렸나요?”
애처로움이 느껴지는 물음이 날아들었다.
짙게 흐르는 울음기.
오열에 가까운 목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쏟아졌다.
“제발 대답해줘요…. 천하의 권력을 거머쥐려 했던 저의 오만이 결국 소중한 사람들을 모두 죽음으로 빠트린 건가요?!”
나 때문이다.
내가 그들을 죽음에 몰아넣었다.
헛된 야심을 품지 않았다면.
천하의 권력을 넘보지 않았다면….
뛰어난 무략과 용맹을 자랑하는 장수들은 한나라를 대표하는 명장으로서 영광을 누렸을 테니까.
몰락의 구렁텅이로 추락한 군주는 죄책감을 토해내면서 스스로에게 모멸과 자괴감을 보냈다.
“결국 저 때문이에요…! 내가, 한낱 얼녀 따위가 천하통일의 대업에 욕심을 품었기에… 결국 인과응보를 맞이하게 된 거예요!”
옥좌에 걸터앉은 여인이 망가진 인형처럼 쓰러지면서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 때문이다.
내 실책이 수많은 전우들을 죽음에 내몰았다.
패전의 책임을 모두 자신에게 돌렸다.
비겁한 사리사욕에 현혹되어 충절을 배신했던 부하들의 변절조차도 자신의 무력과 나약함이 원인이었다며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아아, 아아아…! 흐윽, 흐아아앙!! 모두, 모두 제가 못났기 때문에…! 제가 모두 망쳐버렸어요…!! 흐아아아앙!!”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렸다.
체면을 벗어던진 채.
무거운 중압감을 내려두고서.
눈물을 세차게 흘리면서 죄책감으로 얼룩진 오열을 억수처럼 쏟아냈다.
완전무결의 군주를 연기하면서 수많은 군중들을 이끌었던 군주는 연모하는 사내의 앞에서 그간 계속 억눌렀던 비참한 슬픔을 내질렀다.
“흐윽… 흐으윽…! 아아아아…!!”
그녀가 이토록 애절하게 눈물을 보인 적이 과연 있었을까.
완벽한 면모만을 보이면서 나약한 내면을 필사적으로 숨겼을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자 무거운 연민이 밀려들었다.
“본초.”
자괴감을 토해내면서 오열하는 여인의 모습에 죄책감으로 경직되었던 발걸음이 움직였다.
그녀에게 다가섰다.
허리를 숙이면서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결코 장수들은 본초를 원망하지 않을 겁니다.”
알고 있다.
내게 그녀를 위로할 자격 따윈 없다는 것을.
몰락을 불러온 장본인.
비참한 멸망으로 빠트린 원흉.
그럼에도 이성휘는 자괴감의 늪에 빠져버린 여인을 위로하고자 손길을 건넸다.
“꿈에 동참한 이들에게 있어 가장 각별하고 중요한 목표는 꿈을 실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중한 이상을 함께 공유하면서 나아갔다는 것, 그것이 꿈에 동참했던 이들이 소중하게 생각했을 이상일 겁니다.”
웅대한 포부를 담았다.
위대한 대업을 위해 나아갔다.
전장에서 쓰러졌던 원소군 장수들은 결코 주군에게 원망의 말을 쏟아내지 않았다.
꿈과 이상에 동참할 수 있어 영광이었다.
분명 그러한 마음을 품고서 두 눈을 감았으리라.
‘물론 내가 감히 지껄일 말은 아니지만….’
쓴웃음을 삼키면서 자조를 흘렸다.
재앙으로 떨어트린 원흉 주제에.
원소군의 제장들에 대해서 무엇을 안다고 가타부타하듯이 지껄인단 말인가.
“미안해요…. 미안, 해요….”
따스한 온기에 기대고 싶었던 걸까.
원소가 손길을 뻗으면서 이성휘의 팔을 맞잡았다.
꾸욱-.
애처로운 악력이 느껴졌다.
한꺼번에 수많은 이별들을 겪어버린 원소는 슬픔과 고독에서 발버둥을 치는 듯한 절박함이 느껴졌다.
“저를 이제… 어떻게 할 건가요?”
“결코 위해가 가해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대장군부 직속의 기병들이 관저를 철통처럼 포위하고 있었다.
그녀를 호위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제후의 예우로서 보필하기 위함이었다.
내성을 급습했던 반란군을 와해한 대장군부의 병력들은 원소가 관저에서 나오기를 기다렸다. 지금쯤 장료의 지휘에 따라 좌우로 대열을 갖추고 있으리라.
“과연 제가 나설 자격이 있을까요?”
“살아있는 이상 나아가야 합니다. 꿋꿋하게 나아가는 것은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자의 의무니까요.”
원소가 물었다.
그에 이성휘는 부드럽게 손을 당기면서 대답했다.
포옥-.
금발을 늘어뜨린 여인이 사내의 품에 안겼다.
절망과 죄책감에 주저앉았던 원소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것을 포기하고 몰락의 이후를 받아들였다.
세력이 멸망했다.
결국 공방전의 패배로 몰락하고 말았다.
난세에 시름하는 군중들의 염원을 받아들여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룩하고자 노력했던 완전무결의 군주는 결국 스스로 멸망을 선언했다.
“주군!”
“아아…. 본초 님.”
찬연한 태양처럼 아름다운 군주가 늠름하게 발걸음을 내딛었다.
전쟁에서 패배하여 몰락한 군주가 되었음에도 결코 군중들에게 무력감에 휩싸인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느껴졌다.
전풍이 읍소하며 고개를 숙였다.
마지막까지 원소를 지켰던 시녀들도 눈물을 떨어트리면서 오열을 금치 못했다.
“그대들에게 정말 미안해요.”
원소가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몰락하고 말았다.
하북을 제패했던 찬연한 태양은 사면초가의 전황을 뒤집지 못한 채 아래로 떨어졌다.
“크윽, 주군…!”
“본초 님!”
건곤일척의 결전에서 몰락한 군주는 대장군의 호위를 받으면서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내딛었다.
여포와 장료가 나섰다.
하북의 태양에게 예를 취하면서 그녀를 호위했다.
좌우로 도열한 병사들도 이윽고 움직였다.
대장군부의 병력은 원소를 하북의 제후로서 예우하면서 명령을 수행했다. 그에 원소는 대장군부의 지시에 따라 마차에 올랐다.
* * *
원소에게 반기를 들었던 업성의 장졸들이 비겁하고 치졸한 패악질을 범했다.
전령으로부터 소식을 들은 조조는 급습에 가담했던 원소군 장졸들에게 모두 참형을 선고했다.
놈들은 대의를 더럽혔다.
당연히 그 죄는 목숨으로 물어야 마땅하리라.
승상의 명령을 하달받은 우금과 이전이 정예부대를 이끌고서 출병했다. 하북 정벌의 대의를 땅에 떨어트린 역도들을 처형하기 위함이었다.
“주군!”
주황빛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인이 다급한 표정을 지으면서 다가왔다.
군사좨주(軍師祭酒) 곽가였다.
“심배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위군심씨 가문의 친족들도 대부분 목숨을 끊었습니다. 수치심을 이기지 못해… 자결한 듯합니다.”
원소의 충성스러운 측근이었던 심배가 조카가 범한 대죄를 조금이라도 씻고자 죽음을 선택했다.
성문교위 심영이 동문을 열어 조조군을 불러들였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다른 친족들도 분탄을 금치 못하여 독약을 삼켰다.
씁쓸한 결말이 아닌가.
후안무치한 배신을 계획했던 놈은 멀쩡하게 살아있는데 애꿎은 가족들만 죽음을 맞이한 꼴이니.
“봉효, 위군심씨 가문의 장례를 엄중하게 치러주도록 하라.”
“알겠습니다.”
곽가에게 업무를 전담한 조조는 본진의 제장들에게 원소의 소식을 알아오도록 재촉했다.
많은 시간을 주었을 터.
그런데 왜 아직도 기별이 없단 말인가.
손톱을 꾹 깨물면서 조바심을 느꼈다.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신의와 우정을 관철했던 친구가 남긴 부탁. 혹시라도 친애하는 맹우의 부탁을 지키지 못하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승상!”
전전긍긍하며 고민을 이어나가고 있었을 때,
드디어 소식이 도착했다.
“대장군께서 당도하셨습니다!”
이성휘가 원소를 대동하고서 본영에 들어섰다.
조조가 경직된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