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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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녘의 태양처럼 찬연하게 빛나는 여인을 손아귀에 거머쥐고 싶었다.
총애를 받으려 발악했다.
어떻게든 마음을 사로잡고자 노력했다.
공손찬을 쓰러트렸다.
흑산적과 흉노족을 모두 쓸어버렸다.
천하통일의 대업을 위한 주춧돌들을 천천히 쌓아올리면서 그녀를 하북의 패자로 추대했다. 천하의 모든 부와 권력은 그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에.
-그대들의 간절한 염원을 모아 천하의 권력에 도전하겠어요.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루도록 하죠.
고결한 이상과 늠름한 용맹.
그래,
이 분이 바로 나의 주인이다.
난세에 절망하여 주저앉았던 군중들에게 희망과 이상을 심어준 하북의 태양.
절체절명의 위기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승리를 쟁취해낸 그녀야말로 내가 평생을 기다려온 만인지상(萬人之上)의 패자이리라.
‘주군, 당신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기주목(冀州牧) 한복을 배신했다.
그의 병마들을 빼앗아 여남원씨 가문에 바쳤다.
배신자의 오명을 썼다.
업성에서 섬긴 주군을 배신했다며 사대부와 호족들에게 지탄을 받았다.
그럼에도 개의치 않았다.
난세의 어둠을 몰아낼 찬연한 태양께서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뤄낼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악명과 오명이라도 마다하지 않겠노라고 맹세했으니.
“원소를 죽여라!”
“병력은 겨우 수천에 불과하다! 다 죽여라!!”
업성의 반란군이 몰려들었다.
대의를 망각한 배덕의 무리들.
찬연한 태양을 떨어트리려는 사악한 어둠.
아름다운 주군을 천하의 옥좌에 옹립하고자 칠난팔고를 마다하지 않았던 하북의 명장은 검을 굳게 거머쥐면서 무수히 많은 적들을 맞이했다.
“그래, 모조리 덤벼라!!”
반란군이 궐문을 넘었다.
노도처럼 밀려들면서 내성을 침범했다.
무려 병력이 1만에 달했다.
지금의 전력으로는 결코 막아낼 수 없을 터였다.
그럼에도 국의는 장졸들과 함께 반란군에게 달려들면서 검을 휘둘렀다. 결코 이길 수 없음을 알면서도.
“크학!”
“국의…! 네 이놈!!”
국의는 명장임과 동시에 맹장인 장수였다.
공손찬과 자웅을 겨룬 맹장.
용맹무쌍한 백마기병을 상대로 물러서지 않았던 절차탁마의 숙장이기도 했다.
국의가 검을 휘두르자 짐승처럼 달려들었던 반란군이 뒤로 나가떨어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놀라운 광경에 반란군 병사들이 주춤했다.
“꼬락서니가 참으로 우습군! 무력한 필부의 만용으로 하북의 태양을 배신했던 것이냐!”
두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조조군에게 세력을 팔아넘긴 배신자들을 향해 날카로운 칼끝을 겨누었다.
“정로장군을 따르라!”
“놈들은 오합지졸이다! 밀어붙여라!!”
국의의 용맹에 보답하듯이 내성을 수비하던 장졸들이 용감하게 맞서 싸웠다.
불리한 열세에 처했다.
그럼에도 용맹을 뽐내면서 앞을 가로막았다.
세력의 운명을 짊어진 최후의 강병들은 결사항전을 벌이면서 마지막 불꽃을 토해냈다. 결코 무력하게 몰락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용기의 발로였다.
“국의, 이 어리석은 놈!”
“결국 네놈을 괄시했던 원가 년과 죽을 셈이냐!”
반란군을 지휘하던 마연과 장의가 소리쳤다.
이해할 수 없다.
어째서 예견된 몰락을 받아들였단 말인가.
전쟁의 승패는 결정되었다.
가라앉는 조각배에 몸을 계속 의지한다면 칠흑처럼 어두운 강물 속으로 수장될 터.
어떻게든 난세에서 살아남고자 투항을 결정한 항장들은 어리석음을 끝까지 관철하려는 국의에게 비웃음을 날렸다.
“그래, 마음대로 지껄여라.”
양손으로 칼자루를 거머쥔 국의가 중얼거렸다.
그래,
누구도 나를 이해할 수 없겠지.
웃음이 흘러나왔다.
충성과 연모의 감정을 바쳤음에도 끝까지 매정하게 외면했던 주군을 위해 죽음을 선택했다.
어리석다.
실로 어리석은 결정이었다.
틀림없이 천하의 호사가들은 천하의 얼간이가 결정한 행동이라며 크게 비웃겠지. 치기에 불과한 감정으로 죽음을 선택했다면서 손가락질하리라.
‘결국 끝까지…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지.’
노력했다.
끊임없이 발악했다.
마음을 차지하기 위해.
총애를 받아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행동했다.
하지만 결국 주군의 마음을 받아낼 수 없었다.
이미,
주군에게는 ‘마음을 준 정인’이 있었기에.
“…상관없다. 마지막까지 싸울 뿐이다.”
칼끝을 치켜들면서 중얼거렸다.
그와 동시에 병사들이 국의에게 달려들었다.
“국의!”
“놈을 죽여라!”
칼자루를 움켜잡았다.
빠르게 휘두르면서 적들에게 응전했다.
지나갈 수 없다.
주군을 해치도록 두지 않겠다.
강철처럼 견고한 용맹을 거머쥐고서 숙적에게 세력을 팔아넘긴 변절자들을 처절하게 밀어붙였다.
* * *
중과부적이다.
병사들이 하나둘씩 쓰러졌다.
그럼에도 버텼다.
숨을 헐떡이면서 적에게 검을 휘둘렀다.
“질긴 놈들…!”
“밀어붙여라! 놈들이 무너진다!”
내성을 수비하던 장졸들이 반란군의 공세에 무너지기를 반복했다.
초전에 용맹을 떨쳤음에도 압도적인 열세를 뒤집을 순 없었는지 고전하는 양상을 보였다.
궐문을 돌파하여 내성을 공격하는 반란군의 병력들이 점점 늘어날 때마다 원소군의 숫자는 그에 비례하듯 빠르게 줄어들었다.
“무의미한 발악이다! 어서 항복해라!!”
중랑장 소유가 소리쳤다.
드디어 기세를 꺾었다.
기고만장한 모습을 보이면서 장졸들에게 더욱 거세게 공세를 퍼부을 것을 명령했다.
원소의 수급을 베면 일등공신에 책봉될 터.
조조군에게 충성을 입증하고 총애를 받아내고자 극악한 배신을 결심했다. 소유를 비롯한 장수들은 본인의 안위를 위해 전주(前主)를 살해하려 했다.
“물러서지 마라!”
“커헉─!!”
국의가 검을 내지르면서 일갈했다.
마연의 목이 떨어졌다.
장졸들을 앞세워 내성을 압박했던 마연은 무모하게 국의와 결투를 벌였다가 불귀의 객이 되어버렸다.
“마, 마연 교위!”
“마연 교위가…! 정로장군에게 죽었다!”
어째서 아직도 완강한 저력이 남아있단 말인가.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그럼에도 일기당천의 맹장처럼 앞을 가로막고 있는 국의의 모습에 장졸들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어디를 보아도 승산이 없거늘… 어째서 계속 무의미한 발악을 이어나가는 게냐!”
굶주린 맹수처럼 눈빛을 번뜩이면서 검을 거머쥐고 있는 맹장에게 소리쳤다.
업성이 함락되었다.
하북을 제패했던 세력이 멸망했다.
사면초가의 위기에 봉착한 업성의 잔당들에게 구원을 내려줄 세력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럼에도 국의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계속해서 저항을 반복했다. 시간을 끌면 이길 수 있다는 어리석은 기대를 하고 있는 것처럼.
“내가 무엇을 기다리는 것 같나.”
국의가 고개를 들어 소유를 노려보았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얼굴에 묻은 핏물을 닦아내면서 칼자루를 굳건하게 움켜잡았다.
“끝까지 오만방자한 놈이로군! 장의를 죽였다고 하여 정해진 대세를 뒤집을 순 없거늘!”
소유가 손을 번쩍 들었다.
후열에서 대기하던 병력들이 전선에 가세했다.
숙련된 정예부대였다.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는 전황에 초조함을 느낀 소유는 자신을 호위하던 정예병들을 투입시켰다.
“정로장군!”
“소장들이 역도를 막겠나이다!”
적들이 재차 몰려들면 생사를 장담하기 어려울 터.
충성스러운 무관들이 앞을 막아서면서 국의에게 피신을 종용했다.
어서 주군을 지켜야 한다.
무관들의 간절한 종용에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관저의 주군을 지키겠다.”
그렇게 말하고서 부하들과 작별을 고했다.
피할 곳은 없다.
잠시 죽음을 유예했을 뿐.
끝까지 충성을 관철한 부하들을 바라보면서 경의를 표시했다. 진퇴양난의 상황임을 알면서도 분기탱천하여 역도를 막아선 그들이야말로 충병(忠兵)이었다.
“다 같이 저승에서 보자.”
발걸음을 물린 국의는 부하들에게 현장을 맡기고서 원소가 있는 관저로 향했다.
최후의 장수로서 책무를 다하기 위해서였다.
* * *
금발을 늘어뜨린 여인은 화려하게 치장된 옥좌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회한. 상념.
붉은 눈동자에서 여러 감정들이 맴돌았다.
과거의 전성기를 회상하면서 파멸을 기다리는 현실을 개탄했다. 마치 다 타버린 잿더미처럼 무미건조한 미소를 흘리면서 자신의 무능과 어리석음을 탓했다.
‘결국 지금까지 쌓아올린 모든 것을 한순간에 잃어버렸네요.’
세력도.
함께 해온 전우들도.
하북을 휩쓸었던 충성스러운 장졸들마저도.
모든 것들을 잃었다.
환몽과 허영처럼 덧없이 사라졌다.
천하통일의 대업을 위해 멸망시켰던 군벌들과 마찬가지로 몰락을 앞둔 비참한 처지에 직면했다. 지금까지 범한 악행들의 대가를 한꺼번에 돌려받듯이.
‘이것이 바로 인과응보겠죠….’
난세를 평정하겠다는 대의를 명분으로 수많은 생명들을 살해했다.
꿈을 짓밟았다.
타인의 염원을 망가트렸다.
아군을 적대하는 모든 세력들을 진멸하면서 하북을 시산혈해의 땅으로 만들었다. 야망의 실현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불행에 빠트리는 패악마저 범했다.
인과응보(因果應報).
지금까지 쌓았던 후안무치한 원죄들이 재액의 원흉으로 찾아온 것이리라.
비천한 신분을 극복하고 대업을 이루겠노라는 가당치도 않은 야망을 품은 오만한 계집에게 내리는 인과응보의 징벌이었다.
“분골쇄신하며 쌓아올렸던 꿈과 추억들이… 한바탕의 짧은 꿈이었네요.”
아래를 내려다보며 상념에 빠져들었던 원소는 탁자에 올린 술잔을 응시했다.
보석들로 장식된 술잔.
하지만 그것은 안타깝게도 독약을 넣은 독배였다.
종막(終幕)의 때가 도래했다.
막을 열었던 사람이 막을 내리는 것이 도리일 터.
회한과 안타까움으로 물든 눈빛으로 독배를 응시하던 원소는 떨리는 손길을 애써 뻗으면서 종막으로 다가섰다.
“위대하신 하북의 태양께서… 겨우 독배 따위로 생을 끝내려는 겁니까.”
끼익-.
문이 열리면서 피투성이의 사내가 들어왔다.
정로장군 국의였다.
바깥에서 대기하던 별가종사 전풍에게 전말을 들었는지 너덜너덜한 모습으로 대전에 들어섰다.